계절마다 한철이라는 식재료들이 있다. 봄에는 봄동이나 완두콩, 마늘종 같은 식재료들이 그렇다. 잠깐 보이는가 싶더니 금방 없어진다. 당근이나 양파처럼 사시사철 나오면 좋으련만... 저장성을 높이기 위해 장아찌나 말려놓기도 하지만 바로 사서 먹는 신선한 맛만큼은 아니다. 차라리 한동안 생각이 안 날만큼 제철일 때 듬뿍듬뿍 사서 먹으리라....
요즘 둥그런 조선호박, 가지가 많이 나온다. 장에 갈 때마다 한 두 봉지씩은 꼭 챙겨 들고 온다. 얼마 전부터는 고구마 줄기도 눈에 띈다. 여름에 먹을 만큼 먹다가 말려서 정월 대보름 때 나물반찬으로 올려도 그만이다. 이제 나오기 시작했으니 한동안은 고구마 줄기 반찬도 올려야겠다.
친정에서는 제사를 많이 지내서 시금치나 고사리, 무나물은 흔히 먹었는데 고구마 줄기로 만든 반찬은 밥상에 오른 기억이 없다. 친정아버지가 고기를 좋아하셔서 고기반찬을 많이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구마 줄기는 어릴 때 먹었던 기억이 없어서인지 정석처럼 이맛이다라는 것이 없다. 어릴 때 접하지 못했던 음식은 커서도 익숙해지기가 어려워 아이들에게도 여러 음식들을 맛보게 한다. 잘 먹지 않더라도 처음 만들었을 때 한 입만은 꼭 먹게 한다. 익숙해지는 시기가 지나면 좋아하는 음식이 될 수도 있고 나처럼 나이가 들었을 때 다시 찾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시어머니께서 반찬을 자주 해 주셨다. 큰 아이가 어릴 적 많이 보채서 음식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멸치볶음, 감자조림 같은 밑반찬들이 많았고 그중 고구마 줄기 볶음도 있었다. 이전엔 먹어본 적이 없던 터라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이 맞게 조리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주신 고구마 줄기 볶음은 아삭아삭 씹히고 양조간장으로 진하게 양념을 한 맛이다. 고구마 줄기는 맛이 없는 無맛이다. 음식에서 느껴지는 맛이라는 건 대부분 양념인데 진한 간장 맛이 강해서 내 입맛에는 별로 맞지 않았다. 음식마다 어떤 정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음식은 원래 이렇게 해서 먹는 건가 보다 했다. 나도 아이도 어머니의 고구마 줄기 볶음을 좋아하지 않아서 남편이랑 고추장 넣어 쓱쓱 비벼먹고 먹어치웠다는 기억뿐이다. 어머니께서 주신 음식이 특별히 맛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서 내가 일부러 찾아 먹진 않았던 것 같다.
고구마 줄기로 한 음식이 맛있다는 걸 여름휴가로 여행 다니면서 알게 되었다. 어느 식당에서 밑반찬으로 나온 고구마 줄기 무침을 먹었는데 처음엔 뭔지 몰라 주인아주머니께 뭐냐고 물었다. 여태까지 먹었던 음식과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푹 퍼진 나물볶음이었는데 고소하고 감칠맛이 좋아 몇 접시를 다시 받아서 먹었다. 사진으로 찍고 어떤 재료로 만드는지만 알아왔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고구마 줄기를 사 오고 이래저래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보았다.
여행 때 먹었던 건 어머니께서 쓰신 간장 맛은 분명 아니었다. 맛이 잘 잡히지 않아 동네 할머니들께도 들어가는 양념들을 묻기도 하고 네이버에서 검색도 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로 만들어봤다. 검색을 해서 만들었는데도 내가 원했던 맛이 나온 적이 많지 않았다. 삶는 과정도 그렇고 간을 맞추는 것에서 음식 맛이 무너졌다.
고구마 줄기는 다른 나물들과 다르게 푹 무르게 삶는다. 모든 나물은 휘리릭 데쳐내듯이 익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고구마 줄기는 10분 정도 쪄내듯 삶아내야 한다. 손으로 만졌을 때 뭉개질 정도로 말이다. 어석어석하게 씹히는 맛보다 푹 퍼서져 부드러운 맛이 입에 착착 감긴다.
물에서 10분 정도 충분히 삶은 후 한 김 식혀준다. 어느 정도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때까지 식으면 데친 고구마 줄기에 마늘과 액젓으로 간을 해서 먼저 조물조물 무친다. 간이 겉돌지 않고 쏙쏙 들어가게끔 하는 밑 작업이다.
오늘은 갈아놓은 돼지고기가 있어 함께 사용했다. 고기는 먼저 마늘, 맛술, 소량의 간장으로 양념 후 볶아낸다. 고구마 줄기를 넣고 양파를 넣고 아주 소량의 설탕을 넣었다. 볶다 보면 물기가 생기긴 하는데 난 멸치육수를 한국자정도 더 추가했다. 그리고 미리 양념하여 볶은 돼지고기를 섞어 함께 볶아내면 된다. 돼지고기 대신 깐 조개를 넣어도 좋고 고구마 줄거리만 볶아내도 맛이 좋다.
마지막에 거피 들깨가루를 넣고 들기름을 둘러 마무리했다.
고춧가루를 살짝 넣어도 맛있다. 칼칼한 맛이 돌아 더 좋긴 한데 고춧가루 들어간 음식은 작은 아이가 잘 먹질 않는다. 다음번에 볶을 때는 고춧가루도 살짝 사용해봐야겠다
남편은 맛있다 맛없다 말이 없다. 맛있는 음식은 접시를 깨끗이 비울뿐이다.
점심때 만든 고구마 줄기 볶음은 저녁까지 먹을 요량으로 넉넉히 했음에도 다 몇 접시나 비워졌다.
고구마 줄기로 생선조림을 해도 그만이다. 요즘 병어나 민어가 제철이지만 너무 고급 생선이라 그나마 값이 저렴한 고등어나 삼치를 고구마 줄기와 푹 조려내도 그만한 밥도둑이 따로 없다. 맛이 없는 맛이라 조리하기가 까다로울 수도 있지만 조화로울 수 있다.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시어머니 반찬은 결혼한 지 16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배달된다. 망친 것 같다면서 양념을 다시 하라는 반찬도 있고 아이들이 잘 먹는 반찬도 있다. 고구마 줄기 볶음처럼 어머니 음식이 맛이 없어서 반찬을 만들기 시작한 것도 있고 어머니의 손맛이 좋아 따라가 만들다 보니 잘 만들게 된 것들도 있다.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결혼했는데 친정에서는 라면 하나도 못 끊였다. 대부분의 음식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조금씩 배워나간 것 같다.
내 음식 솜씨의 반은 시어머니 공이 크다. 맛있어서 혹은 맛없어서 만들기 시작한 것들이 이제는 제법 곰삭은 맛이 나올 때가 있다. 맛이 있든 없든 아이가 어릴 때는 이것저것 만들어 주셔서 남편 반찬 걱정은 덜어냈다. 그때는 내가 음식 솜씨가 없으니 어머니가 도와주신 것 같은데 이렇게 장기간 지속될 줄은 몰랐다. 이젠 쉰을 바라보는 아들 반찬은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겠으니 반찬은 그만 주시라는 것이 맞을까 연로해져서 기력이 다하실 때까지 주시는대로 받아오는 것이 맞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