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한 번째 이야기
나무가 그랬다
정직하게 맞아야 지나간다고
뿌리까지 흔들리며 지나간다고
시간은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고
이렇게 무언가를 데려가고
다시 무언가를 데려온다고
좋은 때도 나쁜 때도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게 아니라고
- 박노해<나무가 그랬다>
병실이 가까워지자, 복자의 손을 감싸진 제이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가 작게 심호흡을 했다. 복자는 앞만 바라보며 걸으면서 그의 긴장을 모른 척 해주었다. 문 앞에 의사 가운을 입은 백발의 중년 여성이 기대어 있었다. 진희였다. 그녀는 두 사람을 보더니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힘겨운 웃음이었다.
“왔어요? 고마워요.”
“네, 안녕하세요.”
복자는 진희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나눴지만, 제이는 굳은 얼굴로 그녀 쪽을 바라봤다. 복자가 손을 힘주어 잡으니, 그는 간신히 애써 고개를 움직이는 시늉을 하다 만다.
“어서 안으로 들어와요.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진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 얼굴로 병실 문을 밀며 두 사람을 병실 안으로 안내했다. 크고 넓은 방이었다. 부드러운 크림색으로 채워진 방 안은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안락한 느낌을 주었다. 중앙에 놓인 침대 옆으로 작은 서가들이 줄지어 있었고, 꽤 많은 양의 책들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다. 또 다른 한쪽 벽에는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금색 모양의 축음기가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상해 보이죠? 이것저것 가지고 오다 보니... 여기가 집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주변을 흥미롭게 둘러보는 복자를 향해 진희가 웃으며 말했다. 미소에는 익숙한 슬픔이 묻어 있었다. 진희는 고개를 돌려 침대 쪽을 향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왔어요. 당신이 몹시 기다린...”
누워있는 중년의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지만, 어딘가 묘하게 미소 짓고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눈과 입이 움직이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 느껴졌다.
닫힌 눈꺼풀 아래로 길게 내려온 속눈썹과 우뚝한 코와 얇게 다문 입술. 복자는 옆에 서 있는 제이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갈색 눈동자는 집중해서 자신과 오묘하게 닮은 민수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깊고 정직한 시선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와 당당히 마주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눈가가 붉어졌다.
식물인간의 상태로 17년을 흘러 보냈지만, 민수는 마치 어제 잠든 사람 같았다. 금방이라도
“ 어? 왔어?” 라고 말하며 눈을 비비고 일어날 것 같았다. 깔끔하게 면도된 턱과 단정한 머리, 부드러운 피부결의 상태. 복자는 민수를 바라보다 시선을 옮겨 그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진희를 바라보았다. 그 오랜 세월, 시간이 정지한 이 방안에서 그녀는 홀로 늙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제이의 한 손을 침대 위의 손이 움직여 맞잡았다. 모두가 멈췄다. 숨 쉬는 것조차. 말도 하지 못하고 어 하고 입을 약간 벌린 상태로 제이는 놀란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우연히 스친 정도가 아니라, 힘을 주어 꽉 잡고 있었다. 그때의 순간을 단어로 표현한다면 하나뿐이다.
기적..
너는 버려진 게 아니다.
나는 늘 너를 그리워했다.
보고 싶었다.
언제나 늘 보고 싶었다.
살과 살이 닿는 촉각을 따라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어... 바..반사적인 행동일 거야. 가끔 하품을 하거나 눈꺼풀이 흔들리는 그런 증세가 나타나거든. 너무 놀라지 않아도 돼.”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진희가 고개를 들어 복자와 제이를 번갈아 보며 가벼운 투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 배어난 흥분은 감춰지지 않았다. 17년 동안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그녀도 드물게 본 광경임엔 틀림이 없었다. 복자는 침대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제이의 손을 맞잡은 민수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가만히 덮고 쓰다듬었다.
제이가 그런 복자를 뜨겁게 바라보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복자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두 남자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고, 그들의 틈을 보듬어 주고 싶었다.
이젠 괜찮다고, 다 지나간 일이라고. 그러니 그만 슬퍼하라고.
누군가는 그렇게 그들을 위로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잔인하게 끊어졌던 그들의 인연을 소중하게 이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겹쳐진 손 위로 뜨거운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한 방울이 떨어지고 다시 그다음 방울이 그 위를 덮었다. 진희는 벌써 등을 돌리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복자는 가만히 두 팔을 벌려 제이를 안아 주었다. 제이는 아래로 고개를 푹 숙인 채 한동안 가만히 선 채로 눈물을 흘렸다. 복자는 소리 내도 좋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그가 원하는 대로 그냥 편안히 두고 싶었으니까.
병실 문이 닫히고, 복도를 내려가는 동안 두 사람 뒤로 진희의 발걸음 소리가 길게 따라왔다. 복자는 자신의 손을 맞잡고 있던 제이의 손을 힘주어 세게 잡은 후 살포시 내려놓았다. 묻는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제이를 올려다보는 복자. 그리고 작게 말한다.
“잠깐 나 화장실 좀.”
복자는 자리를 피해 주었다. 두 사람에겐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저기... 서..서준아. 내가..”
“고맙습니다.”
“뭐?”
뜬금없는 제이의 말에 진희는 둔탁한 것에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고맙다니... 자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 속속들이 다 기억하는 이 아이가...
몸을 돌려 진희를 바라보는 제이, 물기가 아직 남은 그의 눈이 편안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또 한 번 뜻을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말을 한다.
“아줌마. 긴 시간 아버질, 돌봐주셔서요.”
“흡... 흐.. 아..아니...”
진희는 끝끝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곧바로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이고 두 손으로 급하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뜨거운 물줄기가 연신 눈으로 흘러넘쳐 아래로 떨어졌다. 머리 위로 뜨거운 것이 빠른 속도로 쏠리고 얼굴 전체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볼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어떤 말도 대답해주지 못하고, 진희는 뒤돌아 자신의 몸을 숨길 만한 곳으로 빨리 걸음을 옮겼다. 사라지고 싶었다.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젊은 날, 민수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었다. 그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한 채로, 그는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고맙다니... 나 같은 인간한테.... 차라리 욕을 하고 침이라도 뱉어주지... 아마 그가 예상대로 진희의 죄를 탓하고 원망했더라면 지금보다 덜 괴로웠으리라. 모든 걸 이해하고 이제는 용서한다는 그 눈빛을....
진희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분... 이랑 인사 잘 했어?”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복도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는 제이 곁으로 복자가 다가왔다.
“응”
그가 짧게 웃으며 답했다. 그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보였다.
“좋아. 가자. 이제.”
복자가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감싸 쥐고, 두 사람은 발걸음을 맞추어 햇살이 쏟아지는 병원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바깥은 겨울 끝자락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차 안은 클래식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담백한 피아노 연주곡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복자는 창밖을 바라보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앞을 향한 제이의 얼굴 위로 저무는 노을빛이 강렬하게 비집고 들어왔다. 빛났다. 이런저런 질문들이 목구멍을 간지럽혔지만, 입을 다물었다.
17년 만에 만난 아버지, 그의 오랜 기억 속에 또 다른 가해자로 남아있던 여자 이 진희...
지우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끔찍한 과거와의 대면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걱정스러웠다. 식물인간이지만 아직 그의 아버진 살아있었고, 그런 아버질 돌보는 사람은 오래전 그를 극한의 상황 속에 남겨두고 달아난 자였다. 시간은 앞으로도 흐르지만, 그 사실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왜? 너무 잘생겨서 그래?”
그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계속 정면만을 주시했다.
“뭐~야? 칫..”
싱겁다는 듯 복자는 웃어 넘겼지만, 여전히 그를 보는 눈빛엔 걱정스러움이 묻어 있다.
“괜찮아. 나. 나처럼 그 사람들도 힘들었을 거라곤... 생각 못했었어.”
제이가 말했다. 그래. 복자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였다. 다시 눈가가 뜨거워질 것 같아, 목 안으로 억지로 침을 삼켰다. 좋은 일이니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해묵은 지난 상처들과 서서히 결별하고 있었다. 그 자신 앞에 불어 닥친 모진 바람과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고 이렇게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어느 시인이 말한 나무처럼 말이다.
잘한 일이야. 멋진 일이야.
한껏 칭찬해주고 싶었다.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잘했다고, 대견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살아준 게 가장, 고마웠다.
“쪽”
복자의 손등에 제이가 입맞춤을 했다. 붉게 물든 웃음이 양 볼에 스며들었다. 기분 좋은 간질거림이 온 세포에 퍼져 나갔다.
“오늘 같이 있을래?”
제이가 고개를 돌려 복자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멋진 갈색 눈이다. 거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