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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Oct 28. 2024

65.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는 거

예순 다섯번째 이야기 


빤한 삼각관계인 줄 알았다 

    

멀쩡하다 못해 훌륭하기까지 한 두 남자가 나김 복자를 좋아한다니     

그 사실만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몽롱하고괜히 기분이 우쭐해졌다     

달콤함만 있을 거라 생각했다어리석게도   

  

자만했는지도 모른다불안한 줄타기였지만막연히 언젠가는 끝이 정리되지 않을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 착각은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흔들리고 뒤집히기 시작했다     

마음이 아팠다

그들에 대한 내 감정이 호기심이 아니라 진심으로 변하면서

아프기 시작했다.

두렵고 무겁고 아득했다     




 

 이 실장님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사실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제멋대로 떨렸다새벽 2시가 넘어 걸려 온 예상치 못한 이의 전화는 반가운 소식은 분명 아닐테니까     

 “...민 우성 전무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일주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짧지 않은 시간인데도 잠을 자고 일어나니, 2월의 끝이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오늘이 있다면 분명 어제도 있었고그제도 있었을 텐데가위로 싹둑 잘라놓은 것처럼 말끔히 지워졌다     


더 이상 고통스럽기 싫은 일종의 자기방어일 것이다     

미안해서 고통스러운 건 태어나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그의 안녕은모두에게 꽤 치명적인 구멍을 안겨 주었다고로우성 주변의 많은 것들이 정리되었다최 회장은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고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더 이상 그들의 이성이 아니었다그에게 허락된 얼마간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허비할 수 없다고 여겼다망가진 자식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아비의 무거운 죄를 용서받겠다고 했다     


무겁고 죄스러운 얼굴을 한 최 회장의 모습이 텔레비전 브라운관 화면 안에도 차 있었다그것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민재는 하늘색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벌려진 입 안에서 끈적한 침이 턱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지나가던 할머니 환자 한 분이 그 침을 제 손으로 슥 훔치고 다시 제 갈 길을 간다그러는 동안에도 민재는 눈만 껌벅일 뿐다른 움직임은 없다     


 이제 운동할 시간이에요텔레비전은 그만산책 시간입니다.”     


흰색 옷을 입은 간호사가 민재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팔을 끌며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으킨다민재는 별 저항 없이 가만히 그녀의 움직임에 제 몸을 맡긴다그러다 고개를 돌려 창밖 유리창 쪽을 쳐다보더니 한참을 그곳을 응시한다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래요누가 있어요환자분.”     

 ...아니.. ..우성이야저기서 날 쳐다보고 있잖아.”     


민재는 손가락을 창 쪽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간호사의 손을 잡고 그쪽으로 가보니 초록색 수풀만이 바람에 약하게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없는데요?”     

 아닌데... 이상하다분명히 우성이었는데....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근데 왜 그렇게 슬퍼 보일까걔 얼굴이.”          





 

 핸들을 꽉 부여잡은 손이 거칠게 차를 몰고 시골길을 빠져나온다손등에 올라온 핏줄이 희미하게 떨렸다그 위로 투명한 액체가 툭 떨어졌다한 번그리고 그 위로 겹치며 또 한 번     


-끼이이이이이익     


귓가를 찌르는 대단한 굉음이었다바로 눈앞에 주황색 덤프트럭이 멈춰 섰다자욱하게 올라온 뿌연 흙먼지가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어이당신!! 미쳤어!! 그렇게 막 끼어들면 어떻게!!!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에이 씨.”

       


트럭기사는 창밖으로 가슴 위까지 내밀어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해댔다승용차 안에 얼이 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 남자의 얼굴이 눈물범벅이다이런 별 미친놈이 다 있네기사는 커다란 핸들을 힘 있게 돌려세워 트럭을 조금 뒤로 뺀 다음 승용차를 피해 옆으로 지나쳤다     


흙길을 밟고 지나치는 육중한 덤프트럭의 소리가 멀리 사라져 주변은 완전히 고요해졌다길가에 아무렇게나 서 있던 차는 아까의 모습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흐흐흐흑....흐흑...”     


세상의 침묵이 그를 울게 만들었다제이의 단단하고 넓은 어깨가 사정없이 흔들렸다끝끝내 참아왔던 눈물이 물꼬가 트인 둑처럼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아이처럼 울어버렸다     

    

평생을 저주한 사람이었다

내 어머니를내 가족을나의 어린 시절을 잔인하게 짓밟았으니깐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처절하게 망가진 그 모습을 얼마나 상상했던가자신의 오랜 염원이 이루어진 오늘가진 걸 모든 걸 빼앗겨 놓고선 텅 빈 껍데기만 남아있던 그 여자완전한 패배였고 굴복이었다그러나 제이는 환희는커녕 애통에 가까운 절절함에 제 몸을 내맡겼다이렇게 가슴이 찢어질 줄이야....    

      

-띠리리리리     


흐느낌으로 채워졌던 차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복자였다... 그녀다제이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누른다그러나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울먹이는 소리를 낼 수는 없었기에     


 여보세요어디야집에도 없고.... 일단 보고 얘기해집에 있을게알겠지?”   

  

그녀의 목소리에 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다우성의 죽음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충격일 텐데 작고 여린 그 여자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나란 놈도 어떻게 될까봐 전전긍긍이다내가 그녀에게 대체 무엇을 해 줄 수 있단 말인가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녀를 안고 싶다잠긴 목소리로 겨우 짧게 대답했다.     


 응      

 ... 그래.. 알았어.”     


여자의 한쪽 얼굴을 쓰다듬듯핸드폰을 매만지며 전화를 끊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쉬지 않고 달렸지만깊은 밤이 되어서야 집 안으로 들어왔다그녀의 초록색 운동화 두 짝이 가지런히 제이를 반겼다그것만으로도 외롭지 않았다작게 미소가 지어졌다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이제야 사람 표정 같아진다    

 

불 꺼진 2층을 푸르스름한 달빛에 의지해 천천히 올라간다하얀 침대 위에 오도카니 옆으로 누워있는 작은 몸뚱이가 보인다쓰러지듯 그 옆으로 제이가 눕는다침대가 살짝 흔들렸지만복자는 처음 그 자세 그대로 창문 쪽을 향해 누워있다     


제이손을 뻗어 가만히 복자의 머리를 쓰다듬는다천천히잠에서 깨지 않게사랑스럽다는 듯 그 곳에 작게 입을 맞춘다사람의 온기를 오랜만에 느낀다그의 한 쪽 마음에 뻥 뚫린 구멍이 조금은 채워지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자는 줄 알았던 복자의 손이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품 쪽으로 끌어당긴다자는 줄 알았던 제이가 조금 움찔했지만두 사람 모두 말은 하지 않는다밤의 적막을 함께 나눌 뿐이다두 손이 복자의 품에 맡겨진 제이는 뒤에서 그녀의 등을 껴안듯 다가가 자신의 머리를 그녀의 뒤에 두었다     


 손이 차가워.”     


새벽을 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또렷했다   

  

      

 내일은 밥을 먹자.”     

      

 내일은 목욕도 하자.”     

      

 내일은 산책도 하자.”     

      

 내일은....”     


말끝에 물기가 서렸다복자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그 진동이 제이의 이마 위로 온전히 다 느껴졌다슬픔을 숨길 수가 없었다우성은 죽었지만그를 아는 두 사람의 아픔은 쉬이 정리되지 않을 거다  

  

그는 이제 두 사람에게 투명인간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없으면서도 있는 존재사라질 수 없는 존재그를 보면 우성이 떠오를 거고그녀를 안으면 우성이 더 슬픈 얼굴로 그들을 바라볼지도제이는 떨리는 입술 끝을 강하게 깨물면서 복자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사라지면 안 돼

도망가면 안 돼

나한테서 멀어지면 안 돼   

  

벅차오르는 감정이 흐느끼는 울음과 함께 밖으로 튀어 나온다.        


 사랑해..사랑해... 너무 사랑해...”     


두려워서 말했다겁이 나서...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마음속으로 수백 번 그녀도 사랑해라고 맞장구쳤다단지 그 진심보다 뜨겁게 녹아내리는 슬픔에 잠겨 있었을 뿐이었다     

제이는 한 번 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 너무 사랑해...당신을...”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그의 고백은 간절하고 안타까웠다.    

 



        

 여느 때처럼 날이 밝았다어제의 다음 날이 왔다복자의 눈이 천천히 떠졌고이불 한쪽을 옆으로 치운다오랜만에 푹 잤다눈은 조금 부어있었지만간만에 편안한 잠자리였다그의 품이 자신을 받아 주고 있었고조금은 괜찮아질 수 있을 거란 용기를 서로가 주고받았다 생각했다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움푹 꺼진 옆자리를 손으로 매만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의 이름을 부르며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커다란 거실 창밖으로 남김없이 아침 햇살이 안으로 들어왔다부엌과 거실과 책들이 꽂힌 서가에 햇살 부스러기들이 조용히 떠다녔다  

   

그리고 복자는 알았다     

제이가 떠났다는 걸

그가 결국엔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는 걸.     

복자는 다 내려온 계단 끄트머리에 결국 주저앉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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