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야기
3월을 건너뛰고, 4월이 왔다.
복자의 기억 속에 4월이 되면 불현 듯 떠오르는 짧은 소설이 하나 있다. 이야기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해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로 끝난다.
옛날 옛적에, 어느 곳에 소년과 소녀가 있었다. 그다지 잘생긴 소년도 아니고, 그리 예쁜 소녀도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외롭고 평범한 소년과 소녀다. 하지만 그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는 100퍼센트 자신과 똑같은 소녀와 소년이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길모퉁이에서 딱 마주치게 된다.
“놀랐잖아, 난 줄곧 너를 찾아다녔단 말이야. 네가 믿지 않을지는 몰라도, 넌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란 말이야”
라고 소년은 소녀에게 말한다.
“너야말로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남자아이인걸. 모든 것이 모두 내가 상상하고 있던 그대로야. 마치 꿈만 같아”
라고 소녀는 소년에게 말한다.
두 사람은 공원 벤치에 앉아 질리지도 않고 언제까지나 이야기를 계속한다. 두 사람은 이미 고독하지 않다. 자신이 100퍼센트의 상대를 찾고, 그 100퍼센트의 상대가 자신을 찾아준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나 두 사람의 마음속에 약간의, 극히 사소한 의심이 파고든다. 이처럼 간단하게 꿈이 실현되어 버려도 좋은 것일까 하는.....
대화가 문득 끊어졌을 때, 소년이 이렇게 말한다.
“이봐, 다시 한 번만 시험해보자. 가령 우리 두 사람이 정말 100퍼센트의 연인 사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어디선가. 다시. 만날 게 틀림없어. 그리고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에도 역시 서로가 100퍼센트라면, 그때 바로 결혼하자. 알겠어?”
“좋아”라고 소녀는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렇게 소년은 서른두 살이 되었고, 소녀는 서른 살이 되었다. 시간은 놀라운 속도로 지나갔다.
그리고 4월의 어느 맑은 아침, 소년은 모닝커피를 마시기 위해 하라주쿠의 뒷길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해 가고, 소녀는 속달용 우표를 사기 위해 같은 길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해 간다. 두 사람은 길 한복판에서 스쳐 지나간다. 잃어버린 기억의 희미한 빛이 두 사람의 마음을 한 순간 비춘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란 말이다.
그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남자아이야.
그러나 그들의 기억의 빛은 너무나도 약하고, 그들의 언어는 14년 전만큼 맑지 않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스쳐 지나, 그대로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고 만다.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공기가 남달랐다.
포근하면서도 가벼웠다.
오랜만에 복자의 기분이 좋았다.
옷장에서 문득 손에 잡힌 하늘색 외투도 무척이나 맘에 든다.
토요일 오전, 현정의 결혼식이 있다.
음식 맛이 썩 괜찮은 작은 레스토랑을 하나 빌려 식을 올린다고 했다. 청첩장과 데면데면한 하객들, 시끌벅적한 인사치레도 모두 생략이라 했다. 현정은 풍성한 웨딩드레스 대신에 크림색이 감도는 깔끔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봉긋하게 올라온 아랫배도 숨기지 않았다.
“고마워. 와줘서.”
현정은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복자를 제 품에 꼭 안아 주었다. ‘멋있는 여자다’라고 복자는 생각했다. 자신의 인생에 다가온 변화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원하는 쪽으로 선택하는 그 모습이 말이다.
인생의 변곡점마다 끌려가지 않고, 제 자신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복자는 잘 알고 있다.
“당연히 와야죠.”
복자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현정은 가만히 복자의 등을 토닥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손길의 의미가 무엇인지 복자는 알 것 같았다.
힘내...
너의 어두운 시간을 뚫고, 나를 축하해 주러 온 너의 마음에
감사해.
복자는 속삭이듯 덧붙였다.
“행복하세요. 팀장님. 나도 그럴게요.”
모두들 불편함 없이 편하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현정은 인성의 손을 잡고 짤막한 인사말을 하고, 고 영감님은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송했다. 눈물보다는 웃음이 많은 시간이었다. 서투르지 않고 자연스러웠고, 모든 게 편안했다. 억지로 꾸며내는 게 없는 점, 그게 좋았다.
시종일관 현정을 향해 해바라기 마냥 웃음을 짓고 있는 인성을 보니, 복자도 기분 좋은 웃음이 연신 지어졌다. 까칠하고 투박했던 그의 첫인상으론 오늘의 순간은 절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나를 포함한 타인의 생을 함부로 재단하는 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의 100퍼센트를 만났으니까.
서로를 시험해 본다거나 상투적인 운명의 파도에 희롱당하게 만만하게 두지도 않았다.
좋은 것을 보니, 그저 좋았다. 나에게도 저런 눈부신 순간이 있었나, 혹은 다시 있을 수 있나하고 복자의 끝 웃음이 씁쓸하다.
“뭐해?”
새벽이 복자 옆자리에 와 앉는다. 오랜만에 본다는 거추장스러운 인사는 없는 사이다.
“응, 왔어. 팀장님, 예쁘다.”
복자의 말에, 새벽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 세상 모든 여자가 가장 눈부실 때지.”
“맞아.”
“너도 그랬어.”
새벽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한 다음, 잔에 담긴 가벼운 식전주를 마셨다. 무슨 소리냐는 듯, 복자가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너도 반짝거렸어.”
새벽은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대답했다. 그의 건조한 말이 복자의 가슴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왜 행복했던 순간들은 모두 과거형이란 말인가.
꾹꾹 참았는데, 결국엔 제이의 얼굴이 생각나고야 말았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빠져나와 복자는 거리를 걷는다. 해가 지기 시작한 거리는 주말 저녁 몰려나온 사람들로 더 풍성해졌다.
신호등 앞에 선 복자.
빨간 불에서 초록 불로 신호가 바뀌고, 사람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바쁘게 움직인다. 편한 자리라고 생각했지만, 오랜만에 사람들 틈에 섞여 웃고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 애쓴 것이 꽤나 피곤했던 모양이다. 모든 그림이 흐릿해지고, 갑자기 느려졌다.
복자는 잠시만 가만히 서 있자 생각했다. 선명하게 빛나던 신호는 깜박거리기 시작하고 곧 신호는 다른 색으로 바뀌었다. 이젠 기다려야 한다. 다음 신호를. 크게 한번 숨을 쉬어본다.
복자는 하늘색 외투 주머니 안에 손을 가만히 넣었다. 4월의 바람은 때때로 차가웠다 따뜻했다 변덕을 부렸다.
다시 신호가 바뀌었다.
몸을 앞으로 움직이려고 한 발을 떼려던 순간, 그녀의 눈앞에 그가 보였다.
제이가 빛바랜 청재킷을 입고, 사람들 무리 속에 우뚝 서 있었다. 복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흔들림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부지불식간에 사람의 마음을 몽땅 흔들어 놓아버린다.
그녀를 떠나버린, 한때는 100퍼센트 자신의 사람이라 생각했던 남자.
상투적인 운명의 파도에 제대로 부딪힌 그들은 나락으로 떨어져 갈기갈기 찢어졌었다. 그래서 그의 무심한 증발을 원망하지 않으리라 복자는 노력했다.
세상 어딘가에서 분명히 살아남아 밥을 먹고, 하늘도 보고, 잠도 자고, 허락된다면 글도 쓰기를.... 바랐다. 무던해지려고, 노력했지만 피어나는 원망과 미움을 감출 순 없었다. 좋아한 만큼 미웠고, 사랑한 만큼 보기 싫었다.
신호가 한 번 더 바뀌고, 자동차의 행렬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 틈으로 우뚝하게 서 있는 제이가 보이고, 담담히 앞을 보고 있는 복자가 서 있다. 오십 미터쯤 되는 거리였다. 제이의 시선이 뜨겁게 그녀를 쫓아온다. 두 사람의 시선이 그 사이를 가로막는 수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에 보였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한다.
한 대의 버스가 지났고, 복자가 있던 자리가 텅 비었다. 제이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핀다. 버스는 지나갔을 뿐, 멈춰서 손님을 태우진 않았다. 아래 방향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하늘색 여자를 본 것 같다. 제이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달렸다. 사람들을 밀치고, 미안하다. 죄송하다 말할 틈도 없었다. 서둘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온 몸으로 혈액을 공급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젠 정말 저 여자를 놓쳐 버릴 것 같다는 불안함. 절망감 때문에 그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복자는 아무 버스에나 올랐다. 그것은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나마 자신의 몸을 숨기기 위함이다. 창가 뒤로 자신을 아스라한 눈으로 쫓는 그와 마주쳤다. 둘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히다 멀어졌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사라진 복자. 그녀를 태우고 떠난 버스의 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제이, 그는 공중으로 허탈하게 한숨을 내쉰다.
두렵고, 불안했고, 망설였지만 그 또한 설렜다.
다시 그녀의 곁을 서성인다는 게.
이제와 찾아온 자신을 쉽게 용서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복자를 다시 본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두근거렸었는데....
핼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자, 무거운 그의 마음이 더할 수 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외롭고 평범한 소년은,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주어진 100퍼센트의 소녀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죽음과도 같았던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그는 어느 때보다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내리는 벌이라면 무엇이라도 달게 받을 것이리라.
불 꺼진 집 안으로 파김치가 돼서 돌아온 제이. 끝도 없이 거리를 걸었었다. 마음의 무거움을 덜어내려고 몸을 가차 없이 혹사시켰다. 이미 여러 날이었다. 달빛으로만 채워진 2층에 다다랐을 때, 그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어제와 분명히 다른 공기로 방 안은 채워져 있었다.
제이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바보처럼 입 모양만 벙긋거린다.
손이 떨리고, 어깨도 들썩거릴 정도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결국에는 다리가 풀려 침대 곁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복자가 침대 위에 옆으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인데, 진짜였다. 자신의 간절한 바람이 만들어낸 허상은 아닐까? 문득 두려워진 제이가 가만히 복자의 머리칼을 만져 본다. 손에 닿는 촉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머리칼에서 내려온 손은 눈썹,
감긴 두 눈을 지나 작은 콧방울,
볼록한 입술 언저리까지 훑듯이 지난다.
스치는 손길마다 미안함과 사랑스러움이 한껏 묻어있다.
“미안해. 사랑해.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 계속 이렇게 있고 싶은데... ”
제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물기가 어린 목소리가 밤의 적막을 뚫고 복자의 귓가로 전달되었다. 여전히 복자의 두 눈은 감겨져 있었지만, 그 틈으로 반짝이는 것들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짧은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복자는 대답 대신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했던 순간이 다 지나버린 과거로 남겨두고만 싶지 않았다.
잃어버린 소년과 소녀가 다시 만나 나누었던 그 확신에 찬 약속처럼, 언젠가 다시 만난대도 틀림없이 우리는 서로에게 100퍼센트 일거라고.
그를 밀어내면서도 그리워했고, 잊어야겠다하면서 매일을 기억했었다.
두 사람은 참을성 있게 먼 길을 돌아왔다. 그 숱한 시간과 사연과 주변 인물들을 지나치면서도 서로에 대한 마음은 옅어지지 않았다. 그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대단한 이유와 거창한 의미가 필요한 게 아니지 않은가. 사랑한다는 것에 있어서 말이다.
이렇게 마주잡고 있는 두 손이 따뜻하기만 한데...
그들이 이제 함께할 시간은 100퍼센트로 선명하고, 4월의 햇살처럼 분명 따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