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네번째 이야기
“그 사고가 없었다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요? 좋은 사촌 지간이 될 수 있었을까요? 괜히 궁금해지는군요.”
- 아마도.
“아마도....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군요? 복자씨랑 .”
- 최선을 다할 겁니다. 저도.
“ 부탁해요.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진심입니다.”
- 이상하게 들리지만, 진심인 건 압니다.
“훗. 그래요. 통화 즐거웠습니다. 기자 회견 반응이 뜨겁군요. 언젠가 세월이 더 지나면 마주보고 이야기 할 날이 오겠죠?”
- 언젠가는. 그러지 않을까요?
“그래요. 그럼.”
우성은 인터넷에 앞다투어 올라오는 제이의 기자회견 기사를 클릭해본다. 숨기고 봐줄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제이에겐.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게 바닥까지 드러나는 건 당연했다. 돈으로 감싸 쥔 거대한 성벽이 무너지고, 그 안에 감추고 숨기고 싶은 비정상적인 가족사가 온 세상에 날것으로 드러났다.
가족... 우성에겐 참으로 생경한 단어다.
숨통이 조여왔다. 나에게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 나에게는.... 나 밖에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테라스와 연결된 거실 중앙 창문을 시원하게 열어젖혔다. 서늘한 기운이 남아있는 회색 바람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베이지색 얇은 카디건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바람에서 축축한 기운이 느껴졌다.
“비가 오려나...”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리며 테라스 바깥으로 괜히 손을 뻗어본다. 하늘에선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는다. 빗방울이라도 떨어져 주지.... 마음 한구석에서 괜한 트집을 잡아본다.
복자와 있을 때 내가 어땠지.
우성은 제 모습을 천천히 그려본다. 기억해 내본다. 조금씩 닿지 않게 아끼듯이 천천히. 엘리베이터에서의 첫 만남. 천방지축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딘가 도와줘야 할 거 같은 빈틈에, 금방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까맣고 커다란 동그란 두 눈. 흰 눈에 덮인 산을 배경으로 서 있던 녹색 드레스를 입은 눈부신 모습까지... 그 때의 두근거림이 지금도 전해진다.
참 좋았다. 모든 순간이.
무엇보다 그 여자가 주는 따뜻함이 좋았다. 그 온기를 오랫동안 나누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던 일련의 일들이 매번 그 여자 앞에서 조금씩 어그러지고, 망가졌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다가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내심 두렵기도 했다. 살얼음 위를 걸었던 것 같다.
그 어수선함은 모두 좋아해서였다.
많이 좋아했구나.
내가 그 여자를.
그녀에 대한 마음이 무거워지고 깊어질수록 조급해지고 초라해졌던 것이리라.
- 띠띠띠....
밖에서 도어락의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촉촉하게 빛나던 우성의 깊은 눈이 현관 쪽으로 재빨리 쏠린다. 자신 있게 그 번호를 누르는 사람은 우성의 기억엔 하나뿐이다. 어머니. 두 번 정도 시도한 후에도 문이 열리지 않자,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날카롭고 무례한 소리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녀의 몸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지만, 표정은 대단히 침착해 보였다. 스카치 병을 따서 잔에 따르는 소리가 굉장히 소란스럽게 들렸다. 노란 액체가 유리컵에 절반을 넘겨 부어졌다.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다른 사람의 옷을 걸쳐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한 침묵이었다. 시간이 정지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전부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텅 비고 메마른 땅에 우성과 그의 어머니, 민재만 남아있는 것 같다. 절망이다. 그건.
“후우-”
적막을 뚫고 민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걔.... 손보라고 했지? 너 왜 막았어?”
“어머니.”
“어머니? 쳇. 네가 날 아직도 그렇게 부를 줄은 몰랐구나. 언제나 내 뒤통수 뒤에서 언제나 대기하고 있는 천하의 배은망덕한 놈인줄 알았는데.”
“이제... 그만하세요. 우선 한국을 떠나 계신 게 좋을 거 같아요. 아직 출국금지령을 안 된 상태니깐, 더 깊이 문제가 드러나기 전에 ... 프랑스로 가시는 게 어때요? 거기 좋아하시잖아요.”
착- 쨍그랑
우성이 서 있는 창가 옆으로 술잔이 날아왔다. 유리컵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나 박살이 났다. 투명한 유리창 아래로 노란 액체가 흘러내렸다.
“뭐? 좋아하시잖아요? 너 나 보내버리는 거니? 아, 그게 네 계획이야? 할아버지랑 너, 그렇게 짠 거야? 아님 너 혼자만의 생각이야? 역시, 역시.... 최 민재 아들이네. 맞네. 민 우성. 이제 더 이상 엄마 치마폭에 쌓여 있고 싶지 않다. 어쩐지 되도 안한 계집애 끼고 다닌다 했더니, 그게 다 작전인거구나. 내 시선을 딴 곳으로 몰려고.”
“대체 무슨 소리세요? 그게? 제정신이세요?”
“제정신일 리가 없잖아!!! 내가 어떻게 지금 제정신일 수 있겠어?
“대체 뭐가 어머닐, 이렇게 만든 겁니까? 예? 자기 피붙이까지 죽여가면서 어머니가 얻으려고 한 게 뭔데요? 대체?
“내가 살아있다는 거.”
“네?”
“내가 살아있다는 거. 다른 사람들이 날 무시하지 못하게. 내 존재가 오빠의 다음이 아니라, 바로 나, 이 최 민재가 진정한 이성의 주인이라는 거.”
“어머닌...정말이지... 제 정신이 아니시네요... ”
“이제야 네 본심이 슬슬 나오는구나.”
“지금... 어머니 인생에 뭐가 남았죠? 대체 뭐가 남았냐고요! 어머닌, 살인자라고요! 살인자!!!”
“아직 오빠는 살아있어. 숨이 붙어 있다고.”
“그 차 안에 삼촌만 타고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서..서준이, 그 아이와 그 아이 엄마가..”
“ 넌, 사람 목숨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니?”
“.....”
우성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절망에 휩싸인 텅 빈 눈으로 눈앞의 자신의 어머니란 여자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대체 ....
자신을 가로막고 서 있는 거대한 벽.
그 벽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우성.
앞도 뒤도 모두 막혀 달아날 곳도 없었다.
“이거 민 우성한테 너무 실망인데. 그렇게 순진하고 여려서 뭘 하겠니? 사람의 가치는 등급이 매겨져 있다는 거 모르니? 그런 것들은 그날, 죽어도 아무 문제 없었던 것들이야. 살아남아서 오늘 같은 불상사가 만들어진 거지. 그런 것들을 이성 안에 끌어들이려고 했던 니 삼촌도 마땅한 벌을 받은 거라고!!”
“... 대체....어디까지...”
우성은 술에 취한 듯, 귀신에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점점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는 민재를 바라본다. 그녀의 왼손에 쥐어진 술병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진회색 카펫 아래로 술 방울이 균일하게 떨어졌다.
두 사람은 손을 뻗으면 얼굴이 닿을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민재는 술병을 입안에 대고 신경질적으로 술을 부어 마셨다.
“이러지 마세요.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어머니.”
“어머니, 이러지 마세요, 정신을 차리세요, 놀고 있네. 내가 지금 제정신이면 그것들 다 죽었어. 쓰레기 같은 것들. 너도 마찬가지야. 그 알량한 양심나부랭이에 제 어미까지 팔아먹는 놈이. 퉷!”
비틀거리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민재가 우성의 얼굴 위로 침을 뱉어내고, 쓰러지듯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우성은 반사적으로 민재의 몸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씨발 새끼. 이거 놔!!! 어디서 지랄이야?”
“어머니... 몇 년만 여행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다녀오시면 회사도 어느 정도 안정될 거고. 서준이 문제는 할아버지랑 의논해서 제가 잘 정...”
- 쫙!
매서운 민재의 손바닥이 곧바로 우성의 오른쪽 뺨을 내리쳤다. 그의 고개가 왼쪽으로 기울어져 깊은 그늘이 드리웠다.
“건방진 새끼. 네가 뭐라고 나를 쓰레기 취급해! 어디 오라가라 명령질이야!!! ”
그녀는 조금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이번에는 술병을 통째로 테라스가 있는 유리창 쪽으로 집어 던졌다. 와장창 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잠시 후 전체 유리창 한 부분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마치 많은 양의 물살이 위에서 아래로 쏟아붓듯이.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뻥 뚫린 부분을 통과해 테라스 쪽으로 나갔다.
처음부터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녀는 술에 취해 있었고, 그 전부터 잔뜩 화가 나 있었고, 제 세상이 빼앗기는 자멸감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불안하게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위태롭게 행동했다.
죽으려고 했던 것인가?
그건 모르겠다.
적어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아들을 대신 밀어버리는 행동 따위는 의도된 게 아니었다.
실랑이가 있었다.
우성은 민재를 안전하게 테라스 안쪽으로 잡아 세우려고 했고, 그녀는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오는지 건장한 청년의 힘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괴력으로 그와 맞서고 있었다. 우성의 머리를 수차례 때렸다. 그의 손과 팔도 물어 뜯었다. 자신을 가로막는 그 어떤 것도 용서할 수 없었기에.
그런데 한순간에 삐-익 하고 이상 신호가 머릿속을 뚫고 지나갔다. 귓속을 찌르는 것 같은 찰나의 통증이 느껴지더니 몸이 안쪽으로 쏠렸다. 우성이 그녀를 거실 방향으로 순간 밀어버린 것이다. 투닥거리던 두 사람의 체중을 감당하지 못한 테라스 한 귀퉁이의 유리벽이 어이없게 밖으로 뚫렸다. 그러면서 뒤쪽에 서 있던 우성이 그대로 넘어갔다.
그 뒤에는 아무런 보호막도 없는데 말이다.
“ 우.....우...우성아.”
18층이었다.
아무 일도 없이 그가 바닥에 주저앉길 바라기엔 무리한 높이다.
기적을 바라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한계점을 넘는 중력의 충격이 우성의 몸 어딘가를 치고 나갔을 거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 오묘한 빛을 발하던 노을은 사라지고 하늘 전체가 짙은 파랑으로 뒤덮여 있었다. 바다가 품고 있는 색 같았다. 불어오던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더 맹렬히 올라와 민재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린다. 네 발로 바닥을 짚은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에 그제야 잔인한 현실이 밀려 들어왔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그녀의 얼굴 위를 적셨다.
“ 우성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