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세번째 이야기
“ 괜찮겠어? 긴장한 것 같은데.”
짙은 회색빛 재킷을 멋들어지게 걸친 고 팀장이 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짤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다. 이제 잠시 후에, 수십 대의 카메라 앞에 서야 한다. 입 안에 침이 마른다. 그러나 제이의 얼굴은 여유가 넘친다. 평소처럼.
지겹도록 머릿속에서 그려 놓았던 장면이다. 행복한 결말은 바라지도 않았었다. 애당초, 이 이야기 끝은 절대 모두가 만족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만약 17년 전, 찌그러진 차 안에서 모두가 죽어버렸다면 이 거대한 진실은 영원히 묻혀 버렸을 것이다.
“작가님. 이제 나가시면 됩니다.”
행사를 진행하는 스텝이 빠른 말투로 제이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의 입매가 살짝 힘주어 다물어졌다 펴졌다. 그때 울리는 문자 알림소리. 문자를 확인하던 제이의 눈매가 맥없이 허물어지면서 물결을 친다.
-가까이서 보고 있을게. 자랑스러워. 그러니까 힘 내.
복자의 문자다.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살결이, 그 특유의 달콤한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발끝 아래에서부터 무릎을 지나 가슴 언저리 부위까지 빠르게 무언가가 차올랐다. 텅 비어있던 것이 따뜻하게 채워졌다.
자신이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채워졌다. 그녀가 나를 보고 있으니까. 나를 믿어주고 있으니까.
여기저기서 터지던 카메라 플래시 소리가 잠잠해지고, 질의응답이 시작되었다.
“작가님, 첫 작품으로 소위 대박을 터뜨리셨는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 아,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책을 내는 일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제이의 대답에 장내에서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자들은 자신들이 상상했던 모습보다 훨씬 뛰어난 외모를 가진 그에게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그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커져갔다. 형식적인 질문과 정돈된 답변이 알맞게 오고 갔다. 약속한 한 시간 정도의 기자회견이 중반부를 넘어갔을 때쯤이었다.
“작가님,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그들의 이야기’ 작품 속에 배경이 되는 재벌이 이성이 아니냐고, 독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소설은 소설이지만요. 하하.”
제이의 몸이 마이크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많은 분들이 예상하신 부분이 맞습니다.”
“네?”
“그럼 이성이 맞다는 말이야?”
“오우”
“대박인데.”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 카메라 셔터가 눌러지는 소리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다음 질문을 위해 파도치듯 손들이 올라간다. 제이는 당황하지 않고, 그중 한 명을 여유 있게 지목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추가로 묻겠습니다. 17년 전, 이성 황태자의 사고 소식은 그 당시에도 많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럼, 소설 속 인물과 작가님은... 어떤 관계인거죠?”
“제 아버지십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뜨거웠던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누군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을 한꺼번에 뿌려 넣은 것처럼. 모두가 꼼짝도 하지 않고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지런하게 두드리던 자판의 움직임도 사라지고, 히터 때문에 데워진 건조한 공기의 흐름도 멈췄다.
그때, 손을 올리는 발언 기회 없이 검정색 점퍼를 입은 한 기자가 앉은 채로 입을 열었다. 얼떨결에 그는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린 것이다. 기자회견이라는 의미보다, 한 개인으로써 일어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럼, 대체 왜 이런 소설을 쓰신 거죠?”
“누군가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 같은 일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까요.”
“그렇다면, 최 민재 사장이 자신의 오빠와 그 가족을 살인 교사 한 거군요. 호사가들의 상상력이 아니라, 그게 진짜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 일어난 사실을 책으로 썼습니다.”
제이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당당하고 선명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방금 들은 놀라운 소식을 서둘러 전하기 위해 처음보다 더 활기차게 타자를 두드리고 있다. 기자들 뒤편으로 올리브색 카디건을 입은 복자가 보였다. 제이의 눈이 자연스레 그녀를 발견하고 웃음을 짓는다. 몇몇 눈치 빠른 이들이 그의 눈빛을 따라 뒤를 돌아보고, 손을 든다.
“작가님. 이렇게 미남이신데, 여자 친구 있으신가요?”
종전의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말랑한 봄바람에 서서히 녹아가고 있었다. 제이의 얼굴이 부드럽게 펴지는 걸 보니 기자는 자신의 질문이 적중했다는 감을 잡았다.
“네.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잠시 숨죽여 있던 카메라의 플래시 소리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복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면서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망설였다.
당초 계획보다 두 배의 시간이 걸려 기자회견이 끝이 났다.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기자 회견이 정리되고, 고 팀장을 비롯한 나머지 출판사 직원들은 빠르게 올라오는 인터넷 반응을 확인했다.
세상은 떠들썩하게 난리가 났는데,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무대 뒤로 내려가 의자에 앉아 두 눈을 감았다. 섣불리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복자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를 살펴보기만 할 뿐이었다.
- 징....
제이의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라 발신자 없이 전화번호만 찍혀 있었다.
“여보세요.”
- 민..우성입니다.
감겨있던 두 눈이 천천히 떠졌다.
“네.”
-통화 가능한가요?
“네. 가능합니다.”
-우선,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 사고만 아니었다면... 그 쪽 인생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겠죠.
“민우성씨가 미안해 할 일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닌... 분명 제 어머니가 맞으니까요.
“우리 모두가 가해자고, 피해자죠. 누구 하나 피해 갈 수 없으니까요.”
-그렇겠죠. 하지만 몰랐다고 해서 모든 게 정리되는 건 아니니깐, 어머니를 대신해서 ...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은.... 잊지 않겠습니다.”
-그 사고가 없었다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요? 좋은 사촌 지간이 될 수 있었을까요? 괜히 궁금해지는군요.
“아마도.”
-아마도....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군요? 복자씨랑 ....
“최선을 다할 겁니다. ”
- 부탁해요.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진심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진심인 건 압니다.”
- 훗. 그래요. 통화 즐거웠습니다. 기자회견 반응이 뜨겁군요. 언젠가 세월이 더 지나면 마주보고 이야기 할 날이 오겠죠?
“언젠가는. 그러지 않을까요?”
- 그래요. 그럼.
전화를 끊고, 제이는 입 모양으로 작게 ‘언젠가는’ 이란 말을 반복했다.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겨울의 시간이 빠르게 사라지고 모든 게 새로 피어나듯 꿈틀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포근함인데, 싫지 않았다.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복자를 향해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성의 소식이 날아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