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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Oct 23. 2024

62. 서로의 경계가 허물고 하나가 될 때

예순 두 번째 이야기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닥쳤을 때우리는 두 가지로 반응한다직진하거나 멈추거나 

    

 제이의 집에 도착했을 땐 꽤 주변이 어둑해 있었다차에서 내려 그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내내 복자의 머리속에는 오늘 같이 있을래오늘 같이 있을래?’ 라는 말만 가득 차 있었다 

    

그다음부터 연이어 이어지는 우스운 생각들... 내가 오늘 입은 속옷 색깔이 뭐더라아래위로 같은 색깔이던가겨울철이나 털 관리에 부지런하지 못했는데... 어쩌란 말인가잠깐 집에 갔다 오겠다 그래야 하나뭐라고 하면서잠옷이라도 가지고 오겠다고... 가관이다가관너 도대체 왜 그러니진짜  

   

 왜 그래?”     


제이가 살짝 웃으며 복자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묻는다혼자만의 만리장성을 쌓았다 무너뜨리길 반복하던 복자의 얼굴이 놀란 듯 굳어졌다마치 제 생각을 들킨 것 같다아 민망해마주 잡고 있는 손도 축축해졌다     


 으응?”     


복자는 왜 그러냐는 듯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인다그렇지만 어깨를 끌어올린 그 모습이 영 어색하다제이가 픽 하고 묘한 웃음을 지으며복자를 소파에 앉힌다그리고 한쪽 무릎을 굽히고복자의 가슴 높이께로 얼굴을 두고 묻는다.   

 

 괜찮은 거 맞지?”     


갈색 눈이 세심하게 복자의 얼굴을 훑듯이 지나친다그 눈빛은 어떤 비밀도 숨길 수 없을 만큼 투명하고 예민했다그제야 굳은 어깨를 풀 듯복자가 길게 하고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괜찮은 것 같아.”     


두 뺨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그 위로 제이의 하얀 손가락이 스치듯 지나다 춤을 추듯 눈썹 위로 올라간다제 자리에 기다랗게 누워있는 옅은 눈썹을 제이는 천천히 쓰다듬었다마치 하나의 의식처럼그러자복자의 온몸에 흐르는 피가온몸에 퍼져나간 신경들이 그 눈썹으로 몰려간 것만 같았다제 눈썹인데 제께 아닌 것처럼소름이 돋을 것처럼 짜릿하면서배꼽 주변으로 수십 마리의 나비들이 펄럭거리며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예쁘다당신.”     


그렇게 그는 쐐기를 박았다담백한 목소리로언제나처럼 그의 말과 행동이 받아들이는 당사자한테는 얼마만큼의 영향을 주는지 모르는 무심함으로    

 

복자의 눈이 미세하게 떨리며 그를 마주본다두 눈이 맞닿아 부드럽게 서로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그동안의 숱한 오해와 상처와 미숙함을 용서하듯이 말이다   

  

그래어느 하나도 쉬운 건 없었지만 결국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있게 된 거야그래너와 나이렇게 우리 둘이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해중요한 건 바로 지금이야이 순간다시는 안 오는 거라고그러니깐 놓치고 후회하지 말자서른 평생 후회만 하다헛다리만 짚은 게 어디 한두 번이냐이보다 확실하고 선명했던 적은 없었다좋아한다그런 풋풋하고 희미한 감정이 아니다분명히 이건 새빨갛고 뜨겁고 뚜렷하다    

 

복자의 손이 제이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를 기분 좋게 빠져나갔다     


 너도 그래예뻐.”     


그녀의 말이 끝나고남자는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던 여자의 손을 잡았다그리고 그 손목에 손등에 연이어 입을 맞추었다복자는 가만히 시선을 움직여 그의 움직임을 하나하나를 지켜보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하얀 얼굴

그 안에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순간에 뜬금없이 복자의 입에서 작게 큭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참을 수 없게 행복했기 때문에더는 숨길 수가 없었다그러나 제이의 의식은 멈출 줄 몰랐다손등과 가느다란 손목을 지나 그의 입술은 그의 가슴 높이에 있는 복자의 두 무릎 위로 떨어졌다바람에 따라 흘러온 한 장의 꽃잎처럼 가볍고 간지러웠다     


그 생경한 간지러움에 두 다리를 복자는 자신의 안쪽으로 잡아당겼다눈썹으로 옮겨 갔던 모든 신경들이 이번에는 무릎 아래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그러자 아래쪽에 있던 제이가 고개를 들어 올려 복자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덮었다     


깊고 진한 입맞춤이었다  

   

그는 두 팔로 소파 뒤를 잡은 채로 자신의 품 안으로 그녀를 가두어 두었다내 안에 들어온 당신을 이제 더 이상 다른 누구한테도 보내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 같았다     


입맞춤이 멈추고제이가 아직 눈을 뜨지 못한 복자를 가만 내려다본다그 눈빛이 녹아내릴 만큼 뜨겁다그리고 복자를 가볍게 안아서 들어 올린다여자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랗게 그를 쳐다보지만제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다가 그녀의 이마 위에 입술을 갖다 댄다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온 제이는 복자를 푸른 빛깔의 침대위에 조심스레 눕혔다푹신하면서 시원한 촉감이 맘에 들었다그는 복자의 옆에 모로 누워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떨리는 눈빛을 보냈다불이 꺼진 방 안에는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달빛만으로 서로의 윤곽을 알아챌 수 있었다복자는 누운 채로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다 고개를 들어 그의 입에 제 입술을 맞추었다그러자 남자의 입술이 덮치듯 그 안으로 깊고 빠르게 파고 들어왔다     


주위의 공기가 엷어지고옷에 감싸진 피부 전체가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 같았다심장박동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두 사람을 가로 막고 있던 마지막 장벽이 허물어졌다경계가 허물어지고하나가 되어 녹아 들어갔다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고두 사람은 서로를 팔과 다리로 꽉 부둥켜안았다옷이 벗겨진 맨살의 감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보드랍고 따뜻했다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들이 침대 아래로 흩어졌고달빛만이 조용히 그들을 지켜주고 있었다         

                

창문 커튼 사이로 청명하면서도차가운 바람이 얇게 불어왔다그 바람에 잠이 설핏 깬 건지복자가 슬며시 두 눈을 떴다그녀의 맨 어깨 위로 흘러내린 이불을 다시 덮어주던 제이와 눈이 마주쳤다남자는 안개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깼어괜찮아더 자.”    

 

제이는 상의에 하얀 반팔 티를 입은 채로 앉아 잠든 복자를 지켜보고 있었다그의 머리 뒤로 아까보다 더 푸르스름해진 달빛을 느끼며 복자가 작게 물었다.  

   

 안자잠이 안와?”    

 

제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복자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 쪽으로 가져갔다대답이 없자재차 묻는다.  


   

 ?”    

 너무 행복해행복해서 잠이 안 와.”     

 그래그럼 안 잘래나도.”     



복자가 제이의 시선을 놓치지 않은 채 침대 벽으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푸르게 내려앉은 새벽의 달빛이 둥글게 이어진 그녀의 어깨 위를 유혹적으로 비춘다제이가 그녀가 있는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앉는다두 사람의 거리가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지고남자는 여자의 하얀 어깨 위로 스치듯 입을 맞추었다     



 ... 사랑하니?”     

 .”     


복자는 자신을 향한 당당한 제이의 시선을 가만히 느낀다어린 아이처럼 맑은 눈이었다.       


 난 너보다 여섯 살이나 많아.”      

 난 많은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야.”     

 뭐야그게?”     

 진실게임 아니었어?”     

 웃을 일이 아니야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고네 이야기야.”     

 그래우리의 이야기지난 중요한 것만 집중해난 당신이면 돼다른 건 다 개소리고염병이야.”     



너는 어쩜 그런 말을 그렇게 간지러운 목소리로

그래서 어김없이 다시 반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에게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지 잠시 고민되었지만그것 말곤 특별히 어울릴 만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그 아름다움이 복자의 가슴을 기분 좋게 옥죄였다견딜만한 구속이었다아니사실은 평생을 기다려왔던 감정인지도 몰랐다정처 없이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맸던 지난날과의 작별막연히 바랐던 일인데 실상 그게 이루어지니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갈 곳을 잃고 헤매는 그녀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도 제 빛을 지나치게 발하는 반짝이는 뭔가에 닿았다.  

   

 뭐야?”     


반지였다   

  

 내 마음     

 그니깐 뭐냐고?”     


복자의 목소리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남자가 침대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앉더니 복자의 왼손을 자시의 쪽으로 살짝 잡아당겼다그리고 그 손바닥 위로 반지를 살포시 올려놓았다     


 당신 생일날까지 기다린다고 너무 힘들었어. 1분도 참기 힘들었거든. 1분도 이제 낭비하고 싶지 않아생일 축하해그리고 앞으로의 시간 나랑 함께 해 줘영원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인데머릿속을 꽉 채운 표현들이 빽빽이 들어선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눈가가 뜨거워졌다겨우 크게 한숨을 내 쉰 복자는 한 손으로 얼굴의 아랫부분을 절반쯤 감쌌다끝내는 굵은 눈물방울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아슬아슬한 차이로 제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복자를 자신의 품 안으로 감싸 안았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그녀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슬픔의 눈물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남자의 얼굴엔 미소가 묻어 있다     


 당신은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야해피 발렌타인.”     



제이의 녹아들 것 같은 목소리에 복자는 반지를 손에 꼭 잡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의 기운을 몰아내고 그렇게 14일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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