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아홉번째 이야기
“...전무님. 전무님.”
우성은 깊은 생각에 사로잡혀 뒤에서 자신을 몇 번이나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 이 실장.”
“어머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바로... 근데, 기분이 좀.”
이 실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알겠습니다. 여러모로 기분이 안 좋으시겠죠.”
우성은 어머니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히 말했다.
리조트 객실동으로 들어온 우성, 적막감이 감도는 복도 위에 덩그러니 서 있다.
불과 세 시간 전에, 이 문 앞에서 자신의 가슴은 얼마나 두근거렸던가.
문을 열어 그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 여인.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묘한 감정이었다.
그걸 설렘이라고 한다면 좋다, 설렘이고.
사랑이라고 한다면 좋다, 그건 사랑인거다.
그 모든 일들이 한순간의 신기루처럼 사라져 없어졌다.
-똑똑.
문을 두드린 후, 천천히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방 한 가운데에, 민재가 팔짱을 끼고 심각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는 우성의 얼굴을 보자, 걸음을 멈추고 소파에 앉았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니?”
“무슨 말씀이세요?”
민재의 목소리만큼이나 우성의 목소리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회장님이 이상하시다. 그러니까 우리, 정신 바짝 차려야 돼. 작전을 바꿀 거다. 회장님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겠어. 안정하게 경영권을 우리 쪽으로 가져오려면 전쟁이 필요해. 일단, 주주들이랑 운영진들 중의 일부는 우리 쪽으로 돌아섰지만, 아직은 불안해. 나머지가 회장님 말에 복종하는 원로들이야. 협상이 안 돼서 골치라고.”
“어머니... 어머니!!!”
우성의 거친 고함소리에 민재는 당혹감에 휩싸인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낯설게 쳐다본다.
“어머니, 대체 왜 이러세요!! 네? 할아버지와 전쟁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몸도 불편하신 분이라고요. 아직은 사정이 있으셔서 선뜻 저한테 넘기지 못하신 것뿐일 겁니다. 그리고 정말로 할아버지 뜻이 저한테 회사를 넘겨주기 싫어하신다면, 전 그 뜻을 따를 거구요. 그게 회사를 위한 거라면!”
빠른 속도로 단숨에 토해내듯 이 모든 말을 내뱉은 우성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그는 조금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어머니의 얼굴을 그제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어머니 앞에서 오늘처럼 세게 대든 적은 우성의 기억엔 단 한 번도 없는 일이었다. 한숨을 쉬고, 조금은 진정된 투로 다시 그가 입을 연다.
“ 그러니까 너무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지 마셨으면 합니다. 제 결혼 문제도요. 부탁드립니다.”
민재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한다.
“총리님이 많이 언짢아하셨다. 오늘 니 태도. 나도 민망했어. 재림이한테 정식으로 사과해. 남자답게. 넌 신사잖니.”
“재림이랑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여러 번 말씀드렸어요.”
민재는 얼굴을 약간 찡그리더니 머리가 아픈지 손을 올려 이마를 살짝 짚는다.
“넌 결혼이 뭔지 알고 하는 말이니? 날개를 다는 일인데 왜 너는 싫다고 해? 남들은 하고 싶어 안달해. 조 총리. 총리로 안 끝나. 더 크게 올라갈 사람이야.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고. 재림이 괜찮잖아? 예쁘고, 똑똑하고. 뭣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릎 꿇을 정도로 널 좋아한다는 데, 되려 고맙지 않니? 복잔가 뭔가 하는, 이름도 괴상한 그런 여자보다는.”
우성의 눈이 두려운 것을 보기라도 한 듯 커지고 이내 그것은 모멸감으로 바뀌었다.
“ 어머니, 지금?”
“기분 나빠하지 마라. 어떤 앤지 캐보려다 기도 안 차서 ... 중간에 관뒀으니깐. 넌, 내 아들이고 이성의 주인이야. 세상을 다 가졌는데, 왜 쓸데 없는데다가 고집을 피우려고 하니? 누가 여자 만나지 말래? 만나. 니 마음대로. 누구든 상관없다. 나는. 다만, 결혼은 재림이랑 하라는 거야. 무리한 부탁도 아니잖아?”
민재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는 우성의 옆얼굴을 슬쩍 쳐다본 후,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마치 정원에 심은 나무의 가지라도 치듯 간단히 사람들을 베어 버리거나 뭉개 버렸다. 우성은 점점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의 지하철은 빠르게 종로 3가역을 지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직 졸음이 남은 피곤한 얼굴로 각자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출근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그 한 무리 속에 어두운 카키색 목도리를 칭칭 감은 복자도 벽 쪽에 몸을 기대고 있다. 매캐하고 갑갑한 아침 지하철 특유의 냄새. 복자는 두 눈을 살짝 감고 어제의 기억을 하나씩 떠올린다.
기사 딸린 고급차, 파티장, 한정판 디자이너 드레스, 프라다 구두, 예술품 같은 음식들....
그리고 가장 말이 되지 않았던 건, 바로 민 우성이란 남자였다.
그 모든 게 한 여름밤의 꿈이다.
처음부터 몸에 맞지 않는 것들이라 불편하고 어색했다.
매력적이고 아름답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젠,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아무리 인생의 숨어있는 반전이 있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반전이란 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때였다.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여자가 서로 핸드폰을 보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머머, 이거 뭐야? 조 재림 결혼하나봐?”
“대박. 야! 재벌 3세래. 이성그룹! 우와~ 완전 잘 생겼는데. 이 남자.”
그러더니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급히 핸드폰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대충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워듣기만 해도, 복자는 대강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도 참지 못하고 인터넷 기사 화면을 터치해 본다.
활짝 웃고 있는 재림과 그녀를 내려다보는 우성의 얼굴.
그리고 입맞춤하는 두 사람.
두 장의 사진 아래로, 인기배우 조 재림과 대기업 재벌 3세 M씨의 결혼이 임박했다는 기사가 이어져 나왔다. 다른 포털 사이트에도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번지듯이 퍼져 있었다.
그래! 빵- 누군가 복자의 머리를 향해 총을 쏴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확인 사살.
니 현실을 직시하라고.
그날 여러 명이 찍어대던 사진을 이 실장 혼자서 막아내긴 역부족이었던 가보다. 불쌍한 이 실장님. 오지랖은... 김 복자.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해 줄 처지냐.
그나마 어제 실제 현장을 눈앞에서 봐서 그런지 그다지 충격이 크진 않았다. 다만, 그들이 퍽이나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걸, 또 그걸 세상 사람들이 인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우성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받아들일 수밖에.
안국역에서 내려 다시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무수한 사람들과 섞여서 지하철 계단을 올랐다. 회색빛의 수십 개의 계단을 숨이 차게 올라 지상 위를 밟았을 때 바로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전광판에도 우성과 재림에 관한 기사가 떠 있었다.
두세 번 보니 이제 뭐 대려 담담하다. 잠깐이지만 자신이 어떤 남자와 연애, 아니 연애 비슷한 걸 했는지 새삼 놀랍다. 이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대단한 남자였구나. 당신.
길을 걷다 울리는 전화벨 소리. 혜교다.
아, 봤구나. 기사.
“여보세...”
복자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흥분하여 달아오른 혜교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뚫고 나온다. 귀가 찌릿할 정도다.
- 야!야! 이게 뭐꼬? 응? 이게? 이 남자, 그 남자 맞쩨? 그 크.크크리스마슷 날? 느그 집 앞에 왔던 그 ...금마? 민 우썽이!!!
“그래. 맞아.”
복자는 간단히 대답하며, 출판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 우와. 하. 하. 뭐 이런 지랄 같은 경우가 다 있노? 그럼, 느그 집 앞.에서 와서 살랑살랑거리면서도 딴 데서는 이 조재림인지, 장조림인지 하는 년 만나고 다닌 기가?
“그렇다고만은 볼 수 없는데... 어쨌든 그렇게 됐어.”
출판사에 거의 다다르고 이제 하나 남은 모퉁이만 돌면 되었다. 이렇게 피곤하고 지친 출근길은 학교를 그만두고선, 처음인 것 같았다. 복자는 한 손에 핸드폰을 쥐고 끊임없이 쏟아내는 혜교의 일장 연설을 들으며 다른 한 손으론 바람결에 아무 때나 나부끼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오늘따라 패딩코트 주머니 안에 머리를 묶을 고무줄도 들어있지 않다.
-야! 차라리 잘 됐다.
“뭐가?”
-어차피 니도 두 남자 때매 머리 아팠던 거 아이가? 둘 다 좋대매? 이제 고민할 필요 없네. 그 작가랑 잘해봐라.
“후. 간단하네."
혜교의 명쾌(?)한 해법을 듣고 복자도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렇게 모퉁이를 돌아 출판사 앞에 닿았을 때 복자는 얼어버린 듯 길 위에 우뚝 섰다.
“미안, 먼저 끊을게.”
대충 전화를 끊어버리고 복자, 출판사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우성을 발견한다. 핸섬한 얼굴이 하루 만에 몰라보게 상해 있었다. 눈 밑 그늘이 짙었다.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복자의 가슴이 싸해지더니, 눈가가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