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번째 이야기
핸섬한 우성의 얼굴이 하루 만에 몰라보게 상해 있었다. 눈 밑 그늘이 짙었다.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복자의 가슴이 싸해지더니,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는 푸석한 모습으로, 단추가 세 개나 풀린 셔츠 위에 회색 코트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었다. 늘 자로 잰 듯이 단정했던 남자가 이런 모습을 보이니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딴 데로 가요. 여긴, 출판사 사람들도 드나들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담배 냄새가 풍겼다. 걱정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자, 우성이 살짝 웃어보였다. 그렇게 웃지 마요. 일부러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복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담배를 피울 줄은 몰랐다. 익숙치 않은 냄새에 마음이 시큰거렸다.
그의 손을 잡아끌고 은색 suv에 올라탔다. 그때, 정면으로 출판사 쪽으로 걸어오는 고 팀장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복자의 동그래진 눈을 본 고 팀장은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마 그녀도 인터넷 기사를 보았으리라.
복자는 팀장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한적한 곳에 멈추었다. 차 안에 감도는 침묵이 어깨를 짓눌렀다.
“제가 먼저 말할게요. 우성 씨.”
우성은 한 손을 핸들에 올린채 고개를 돌려 복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들에 온 세포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늘 기사 뜬 거 봤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그 현장에 나도 있었으니깐. 다른 설명은 필요하지 않아요. 충격도 덜했고. 그리고 어차피 우리 끝까지 갈 건 아니었잖아요?”
“뭐라고요?”
잠긴 목소리 끝이 갈라져 나왔다. 그의 입술이 메말라 있었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더 이상 불편하다고 피해야 할 말은 없었다. 서로가 알고 있어도 말하지 못한 부분은 분명 존재했다. 가벼운 감정은 물론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한계가 정해진 사이라는 걸 복자는 알고 있었다. 그걸 상대가 모를 리는 없다.
“ 내 말은.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요. 이렇게 초라하게 나타나는 거 싫어요. 정말. 나한테도 안 그래도 돼요. 나도, 복잡했어요. 그동안. 어쩌다 보니 우성씨도 만나고 또 다른 사람도 만나고 그랬어요. 그게 만났다고는 해야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나도 떳떳하진 않았어요. 으앙...미..미안해요.”
복자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양다리 아닌 양다리를 걸쳤다는 자백을 내뱉은 순간, 감정에 복받쳤다. 두 사람을 동시에 좋아한다는 건, 짜릿한 모험보다는 무거운 죄책감에 더 가까웠다. 어물쩍넘겼던 감정과 행동들이 여기까지 와 있었다. 이제 다시는 안 볼 사람이니, 아니 볼 수 없는 사람일테니 볼썽 사나워도 할 말은 다하고, 미련도 깨끗이 지우고 싶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에 새하얗게 보였던 복자의 얼굴이 벌게지고, 눈물로 세수를 한 탓에 화장기가 다 지워졌다. 연신 코를 훌쩍거리다, 한계치에 다다랐는지 복자는 꽉 막힌 코를 손으로 잡고 가방을 뒤져 휴지를 찾는다.
아 씨... 콧물 한 무더기 쏟아질 것 같애.
이건 쓰나미급이다.
우성은 차 한 쪽에서 뽑아든 티슈 여러 장을 복자에게 건넸다. 겸연쩍은 손으로 티슈를 건네받은 복자는 코 주변만 살짝 누르며, 소심하게 “훙” 소리를 냈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녀석들인지 그만한 소리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또 한 번 작게 “훙”.. 역시 마찬가지다. 소량의 콧물이 감질나게 나왔다.
차 안에는 복자의 훌쩍거리는 소리와 “홍”,“홍”하는 코 푸는 소리만이 채워졌다.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조금은 진지한 목소리로 우성이 말한다.
“그냥 시원하게 풀어요. 괜찮아요.”
우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복자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몸을 바들바들 떨며 코를 풀어버렸다. “쿠쿠쿠릉릉릉릉...”
우성이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핸들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인다.
그래, 좋다. 좋아. 웃어라. 웃어.
에라, 모르겠다.
다시 한번 “쿠쿠쿠쿠쿨릉릉”
옛다. 선물이다. 웃고나 헤어지자.
코가 없어질 것처럼, 한 방울도 안에 남겨놓지 않겠다는 듯 복자는 콧속을 탈탈 비워버렸다. 뇌까지 비워버린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아까보다 더 우성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한동안 그는 그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핸들 쪽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 서서히 몸을 일으켜 다시 침착한 얼굴로 복자를 바라봤다. 그의 조용한 시선이 느껴지자 복자의 얼굴이 더욱 뜨거워졌다.
“이제 내가 말할게요. 재림이 문제는 제가 해결합니다. 왜냐하면, 난 복자씨랑 끝까지 갈 생각이니까...”
우성의 말에 복자가 퉁퉁 부은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그는 한 손을 들어 그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좋아해요. 난 자신 있으니까.”
“... 미쳤어요?”
복자는 자신도 모르게 툭 하고 말했다가, 저 혼자 다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 아아니... 우성씨. 그건 아니죠. 아니에요.”
“드디어 소원을 이뤘네. 조재림.”
빛바랜 청색 셔츠를 무심히 걸친 제이가 창가를 바라보며 말한다. 남향인 창에는 부드러운 오전의 햇살이 거실 안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꽤 떨어진 거리에서 재림은 에스프레소 머신에 캡슐을 끼운다. 그녀는 조금 흐트러진 머리에, 무릎 선까지 떨어지는 기다란 셔츠만을 걸치고 있다.
“이제 뭐 시작이지.”
“언론에 다 뿌리고, 몰아치면 그 쪽에서도 뭐 어쩌겠어. 부모님 반응은?”
갓 뽑아낸 에스프레소 한 잔을 제이에게 건네며, 재림은 맞은편 소파 깊숙이 몸을 뉘인다.
“아버지야 워낙 체면 중요시하는 분이니깐, 여자가 너무 들이댄다고 겉으론 탐탁지 않아 하시지만, 속으론 엄청 좋아하시지. 내년에 큰 선거 나가실 때, 득 좀 보시겠다는 거지. 권력은 순간이지만, 돈은 끝이 없잖아? 엄마야 아버지 말만 따르는 사람이니깐 뭐 패스.”
“일은?”
“결혼 날만 잡으면 바로 은퇴하려고. 미련 없어. 아무리 가꾸고 관리하고 뭐 해도 나이 드는 거 어쩔 수 있겠어? 텔레비전 화면으로 해마다 늘어나는 내 주름살 확인하고 싶지 않아. 격 떨어지는 사람들 앞에서 머리 빈 것처럼 헤실거리면서 웃어대는 일도 피곤해. 그냥 남편 조용히 내조하고, 아이들이나 키우면서 그림처럼 살래.”
“훗, 니가? 내조나 하면서, 그림처럼?”
제이는 별 심한 농담을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재림이 어떤 여자인지 정확하게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타고난 좋은 팔자에, 거기다 멋진 외모에, 온갖 것을 누리고 즐기면서 세상의 중심은 무조건 자신이어야 하는 지독히 이기적인 인간.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제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양보, 인간적인 배려, 따뜻함.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하는 지도 모르는 부류다.
그의 비아냥대는 반응에도 재림은 전혀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그다음 말을 잇는다.
“물론. 지루하겠지. 그럴 때마다 가끔 널 만나서 이렇게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그렇게 편하게 지내면 안 되나? 우리 옛날엔 잠도 자는 사이였잖아. 이만큼 좋고 편한 친구 사이도 없잖아? 안 그래?”
재림은 그렇게 말하면서 바닥에 놓인 두 발을 소파 위로 올려 길게 옆으로 누웠다. 셔츠 아래쪽 단추가 저절로 벌어진 것인지 그 틈 사이로 드러난 맨다리가 유혹적으로 보인다. 남자를 향한 의도가 담긴 움직임이 노골적이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갈색 눈은 조금의 미동도 없다. 그는 오로지 커피 마시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처럼 에스프레소 두 모금을 연속적으로 마시기만 할 뿐이다. 재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몸을 반쯤 일으키며 자연스럽게 벌려진 셔츠의 단추를 잠근다.
“할아버진 만났어? 오래 전에 헤어져서 못 만났다는 그 분.”
“응. 만났어.”
“그래? 어땠어?”
“울더라. 날 보자마자..... 변하셨더라고. 많이 약해졌어. 예전엔 그렇게 무섭고 강해보였는데.”
“우울했나봐. 이런.”
어느샌가 제이의 앞에 선 재림, 허리를 구부리며 그의 날렵한 턱선을 나긋하게 쓰다듬는다. 여자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건가? 그 나긋한 손길이 의미하는 농염함을 모를 리 없는 제이가 한 손으로 그 손을 맞잡고 여자의 손목을 자신 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긴다.
그러면 그렇지. 니가 날 거부할 리가 없지. 여자의 입가 한쪽이 싱긋이 올라가며 자신감에 찬 미소가 번진다. 여자는 현란한 손동작으로 남자의 불록하게 솟아오른 목젖을 시작으로 그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묻는다.
“그럼, 할아버진 이젠 만났고. 그다음 만나야 한다는 마녀는?”
제이의 우뚝한 콧날은 여자의 입김이 닿는 부위까지 가까이 다가갔다. 볼록하게 솟아오른 여자의 가슴께로 남자의 가슴이 닿을 듯 말듯하자, 여자는 일부러 허리를 살짝 들어 올린다. 분홍빛으로 물기를 머금은 재림의 입술의 입구가 살짝 벌어져 따뜻한 숨기운이 들락거렸다.
"아니. 아직. 그치만 그 마녀의 아들은 만났지.”
제이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어지듯 올라갔지만, 그의 눈빛은 싸늘했다. 말이 끝나자, 남자는 중요한 볼일을 모두 마친 사람처럼 여자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