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한번째 이야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한눈에 보아도 시선을 잡아끄는 외모를 가진 사내가 내린다. 그와 스치면서 네이비색 패딩코트를 걸친 중년의 남성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헐레벌떡 올라탄다. 분명, 똥줄 타는 표정으로 달려오던 그가 자신도 모르게 열림 버튼을 누른 채로 앞서 내린 사내의 뒷모습을 홀린 듯 쳐다본다.
“오호라~ 보통 마스크가 아니야. 모델인가? 지금이라도 내려서 번호를 물어봐? 아니지. 아니지. 지금 이럴 시간이 없지. 내 이 조재림을 그냥... 미친년. 미친년. 완전 미친년.”
그는 조 재림의 기획사 대표이자, 불과 2년 전까진 재림의 매니저였다. 지금은 그 고난에서 벗어났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녀의 하수인이자, 집사이자 밥이다. 어쩌겠는가. 그녀가 벌어들이는 돈이 이 기획사의 가장 큰 수입원인 것을.
새벽 불시에 인터넷에 빵 터진 스캔들 기사에 아연실색해 그녀의 빌라로 지금 쳐들어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광고 회사, 드라마 제작자, 영화 제작자, 또 다른 광고 예정 관계자들, 기획사 공동 투자자들... 으~ 골머리야. 지금도 쉬지 않고 덜덜거리는 전화기를 주머니 속에 꾹 누르고 있다.
4층, 5층, 6층, 7층- 땡.
남자는 씩씩거리며 거칠게 재림의 벨을 누른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세상 편한 표정을 한 재림의 예쁘장한 얼굴이 쏙 나타났다. 지는 이 난리 통에도 아무 걱정도 없네. 독한 것.
“야!야! 재림아!! 너 진짜... 나한테 왜 이러냐? 응? 정말? 말 좀 해봐라.”
“뭐가요? 나 결혼한다는 게, 아침부터 발발거리며 뛰어와서 날 뛸 일이야?”
“아이고- 아이고- 어무이, 어무이, 할무이.... 후”
대표는 속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열기에 입고 있던 패딩을 소파 위로 벗어 던졌다. 그리고 가슴 한쪽을 자신의 주먹으로 치면서 우글부글하는 화를 삭이느라 애를 썼다. 싸움이 꽤 길어질 것 같다. 만만치 않은 상대를 대할수록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야 한다.
“재림아. 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는 귀띔이라도 해 줘야 하지 않니? 그래야 내가 대처를 하지. 한 달 뒤에 들어갈 드라마는 어쩔 거고, 거기다 계약된 광고 중에는 스캔들 터지면 난리 나는 거 여럿 있는데. 어? 거기다가 그 뭐냐? 내년에 박 감독 영화 시나리오에도 니 이름 오르내리고 있는데. 그거 잡으려고 내가 그 감독한테 얼마나 알랑거렸는데, 내가 팔순 노모한테 그랬음 효자상은 이미 받고도 남았다!!”
맞은편에 앉아 느긋한 자세로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재림.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떠들어대는 대표의 얼굴을 바라본다.
“후- 그래그래. 알지. 너도 연애하고 결혼해야지. 남자도 보통 사람 아니더라. 그래. 잘 골랐어. 훌륭해. 역시 조재림이야.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는 정말 아니다. 재림아.”
“드라마는 준비 다 끝난 거니까 할게요. 영화는 거론만 된 거지 결정은 아니잖아. 그럼 문제없고, 그쪽에서 지랄하는 광고 건은 위약금 내 쪽에서 100프로 지불할게요. 됐죠? 그럼? 그렇게 일단락되고 결혼하면, 나 이쪽 일 정리할거야. 그렇게 알아!”
“뭐..뭐???”
척수 끝을 타고 올라온 묵직한 뻐근함에 뒷목이 뻣뻣해지려는 찰나, 대표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더니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핏줄이 단단히 선 목소리로 고함을 친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그래, 일단 알겠다. 어.어. 지금 같이 있으니깐, 내가 물어볼게. 어쩌긴 어째? 이 개자식아! 최대한 막아야지. 어떻게 막기는... 이 빙신 새끼가? 기자 코앞에 가서 그 놈 손모가지를 꺾든, 아니면 니가 발가벗고 그 앞에서 춤이라도 추든 간에 붙잡아. 최대한 그럼 시간이라도 끌어. 우리 쪽에서 해명이라도 하게! 알겠어? 끊어!!”
한 손에 쥔 전화기를 부셔버릴 것처럼 힘줄이 선명히 손목 위로 올라왔다. 그는 다시 소파에 앉으며 머리를 두 다리 사이로 잠시 숙이고 길게 호흡을 세 번 들이쉬고 내뱉었다. 대체 무슨 전화길래 그러는 것인지 궁금해진 재림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묻는다.
“무슨 일이야?”
“둘이 서로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 한 시간 전에, 그 민우성이란 사람이 메이저급 기자 세 명 사무실에 불러서 절대 아니라는 인터뷰 했고, 회사 쪽으로 방금 그 기자들이 연락왔댄다. 조 재림씨 혼자 왜 그러시냐고? 그동안 우리 쪽에서 묻고 묻었던 다른 스캔들까지 그 기자들이 모조리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 어떻게 알았는지...대체... 그리고 이 사람이 자기는 이미 딴 사람..”
재림은 고개를 바닥 쪽으로 푹 숙인 채 두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잡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기괴하던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시커먼 아우라가 그 주변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아.... 이거 장난 아닌데.. 얘. 또또..정신 줄 놓았다.
재림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본 그는 지금 곧 일어날 상황이 얼마나 위험하고 끔찍할지 이미 본능적으로 직감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오른발로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패딩을 들어올리며, 두 손을 앞으로 휘저으며 달래는 투로 말한다.
“야...야... 재림아.. 일단은 이렇게 하자. 두 사람 단순히 친한 지인이고, 새벽 기사는 오보고, 헤프닝이라고. 내가 너 면 안 깎이게 잘 해명할 테니깐. 너 저번처럼 홧김에 술 먹고 운전하지 말고. 알았지? 그럼...”
“으으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이럴 수 없어! 민우성. 니가 감히!!”
재림은 고개를 들어 올려, 짐승같이 울부짖으면서 가까이 있는 커피잔을 집어 들고 던져버렸다. 대리석 바닥에 산산조각이 난 커피잔 옆으로 화병, 리모컨, 트로피들이 차례로 박살이 났다. 간발의 차이로 날아오는 뾰족하게 위로 솟아오른 트로피 조각을 피한 남자는 혼비백산 된 얼굴로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현관을 빠져나왔다. 제대로 맞았다면 제 발로 걸어 나오진 못했을 거다.
놀란 마음에 숨 쉬는 것도 잊었던 것인지, 남자는 현관문 밖에서야 겨우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미친년, 또라이, 개 또라이. 저 환자. 저걸 누가 말려? 저 물건을. 아이고. 내가 미쳤지. 미쳤어. 인물이랑 잘난 집안 빽 좀 써먹으려다가...”
남자는 연신 주먹으로 제 머리통을 쥐어박으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간다.
복자는 멍한 표정인 채로,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컴퓨터 워드 화면을 쳐다본다. 그녀의 책상 옆으로 따끈한 커피 한 잔이 비집고 들어온다. ‘뭐지?’하는 표정으로 돌아보는데, 무표정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새벽이 있다.
“아, 고마워.”
복자의 목소리가 탈수기에서 금방 나온 빨랫감마냥 기운이 쏙 빠져있다. 할 말이 있어보이던 새벽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복자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우성에 대해 경고했었고, 어떤 의도였든지 간에 결과는 그가 말한 그대로다. 그러고 보니, 다른 직원들도 은근슬쩍 복자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 다들 기사를 봤으리라. 암암리에 복자와 이성그룹 민 우성 전무랑 그렇고 그럴 수도 있는 가능성을 자기들끼리 염두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러고 있지 말자. 여기는 직장이다.
복자는 커피 한 모금을 후루룩 마시고, 오늘 안에 마쳐야 할 업무들 확인해 본다. 오전 10시가 훨씬 넘어있었다. 그리고 세 시간 후에 우성과 재림의 관계를 부인하는 양측의 합이 맞는 인터뷰 기사가 다시 도배가 되었다. 단순한 지인이며, 이성 그룹 창립기념 파티에서 일어난 해프닝 정도였다는 것이다. 홍 양은 그러면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복자에게 그 기사를 보라고 자신 있게 들이밀었지만, 복자는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아.그래. 그러네.”
라는 어정쩡한 대답만 겨우 내뱉었을 뿐이다. 전혀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의 연애사를 건너 들은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밤새 한숨도 못 잔 우성의 푸석한 얼굴이 떠올랐다.
둘 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복자는 자꾸만 우성에게, 그리고 우성은 복자에게 미안해 질 거라는 불편한 그들의 미래가 선명히 보였다. 그녀는 그가 살고 있는 세계가 너무나 멀고 아득하다는 걸 이번 일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 툭.툭.툭.툭.”
저녁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출판사를 나오는 복자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어? 너?”
“안녕?”
커다란 검은색 우산 아래 제이가 서 있다. 검은색 코트가 위에서 아래로 단정하게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고, 새하얀 그의 얼굴엔 여유가 묻어 있었다. 늘 예리하게 날이 선 듯한 평소의 모습과는 달라 보였다.
“여긴 어떻게...”
복자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그의 우산이 우중충한 하늘을 가렸다. 복자의 눈앞에 울컥하고 움직이는 제이의 목젖이 눈에 띠었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어색해졌다.
어젯밤 차 안에서 툭 내뱉던 그의 목소리가 또렷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 난, 당신 좋아해.
맥박처럼 일정하게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뚫고 나른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레 우동 좋아해?”
“카레 우동?”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카레 우동이라는 단어와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묘하게 뒤엉켰다. 복잡하고 어려웠던 하루의 기억들이 깊고 진하고 독특한 향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복자는 갑자기 저도 모르게 입 속에 침이 고이더니 공복감이 느껴졌다. 이런저런 핑계로 점심도 거른 상태였다는 게 생각났다. 자연스럽게 식사 중에 사람들이 인터넷 기사에 대해 그녀에게 질문할 순간들이 거북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
제이가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맞은편 담벼락에 세워 둔 파나메라 쪽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는 복자의 손을 살짝 힘주어 잡고 있었다. 하루종일 너덜거리고 삐걱거렸던 복자의 마음이 볼록하게 부풀어 올랐다.
차는 한남동 안으로 들어가 복잡하고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지나, ‘휘’라는 작고 깔끔한 흰색 건물 앞에 섰다. 맞은편에는 한남동 노인 회관이라는 팻말이 달린 이층 양옥집이 있었다. 가게 안은 좁았지만 따뜻한 분위기였다. 다섯 개 정도의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다른 손님들로 빈자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복자와 우성은 맞은편 노인회관이 정면으로 보이는 유리창 쪽에 붙은 바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의 어깨가 자연스럽게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밤의 유리창은 바깥 풍경을 지워버리고, 그 사이로 겨울의 빗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제이는 매운맛을, 복자는 보통 맛으로 카레 우동을 시켰다. 음식은 맛이 좋았다. 다음에 또 기억을 더듬어 오고 싶을 정도였다. 평일의 늦은 저녁인데도 좁은 가게 길목으로 손님들은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그 때문인지, 배도 고파서였는지 복자의 젓가락이 빨라졌다. 제이는 말없이 복자의 빈 물 컵에 물을 따라 주었고, 그녀가 젓가락을 놓자, 냅킨으로 그녀의 입을 닦아 주었다.
뭐야?
마음속으로 뜨악하고 놀랐지만, 딱히 입 밖으론 나오지 않았다. 놀란 두 눈만 껌벅이는 복자의 얼굴을 스윽 쳐다보더니, 계산을 하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가게 밖을 나섰다. 그들이 나간 자리엔 대학생으로 보이는 커플이 뛰어와 자리를 잡았다.
마치 여섯 살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우습고 이상하고 낯간지러운데 싫지만은 않았다. 누구나 마음속에 보호받고 싶은 어린애가 산다는 데... 복자는 오늘 힘들었던 하루를 엉뚱하게(?) 다른 사람에게 위로받는 것 같았다. 고맙고, 미안했다.
둘 다 특별한 말 없이 집 앞까지 도착했다. 제이는 대문이 보이는 모퉁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차를 대고, 이젠 당연한 수순처럼 차에서 내리자마자 복자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따뜻하고 부드러웠지만, 복자의 목소리는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떨렸다.
“왜... 그래? 너.”
“이제 한 달도 안 남았어. 나 여기 사는 거. 글도 다 써가고.”
“그래서?”
“시간이 아까워. 당신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당신이 막지만 않는다면, 난, 내 마음대로 당신 좋아해주고 싶어.”
“... 진심이야?”
“막지는 않는 거네. 진심이냐고 묻는 건, 당신도 나한테 마음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는 거지? 진심이야. 물론. 이보다 더 선명할 수 없을 정도로.”
제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뒤에서 걸어오는 우성의 모습이 보인다. 어둠 속이었지만, 그의 얼굴이 꽤 굳어 있다. 제이는 움찔거리며 자신이 잡은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복자를 더욱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뒤돌아 우성과 눈을 정면으로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