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세번째 이야기
우성을 태운 은색 마세라티가 골목을 빠져나가자, 돌 담벼락 아래에 기대어 있던 제이가 발걸음을 옮긴다. 제이의 냄새를 맡았는지, 흥분해 날뛰는 복구가 짖는 소리와 반대쪽 방향이다.
제이는 아래쪽 모퉁이 쪽으로 걸어가 늘씬하게 서 있는 빨간색 스포츠카의 운전석 창문을 툭툭 노크한다. 안에선 아무 반응이 없다. 진하게 선팅이 된 창 위로는 제이의 하얀 얼굴만 비칠 뿐이다.
툭툭
또 한 번, 제이가 허리도 굽히지 않은 채 비스듬히 서서 손등으로 유리창을 두드린다. 마찬가지로 아무 반응이 없자, 제이는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 말한다.
“여기 오지 마라. 민우성은 네가 사는 동네에서 해결해. 저 여자 끼어넣지 마.”
할 말이 끝났는지, 제이는 차 옆을 지나 긴 다리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숨죽이고 있던 빨간색 스포츠카가 “크르르릉”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쪽으로 얼마간 후진을 하더니, 다시 급격히 방향을 바꾸어 집어삼킬 듯 앞으로 내달렸다.
그 목표점은 제이였다.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처럼 하얀 헤드라이터 불빛이 쏟아지더니, 검은색 워커 앞에 겨우 5센치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차는 멈추었다. 눈 한번 깜박이면 닿을 거리였다. 바퀴가 닿은 부분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매캐한 냄새가 주변을 채웠다.
기괴한 장면이었다.
방금까지 자신을 향해 노골적으로 들이닥친 사고의 위험 앞에서 누구든지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을 가는 건 당연한데... 제이는 조금의 움직임도,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의 얼굴엔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오늘 죽어도, 내일 죽어도 별로 다를 게 없다는 듯, 초연했다.아니면 상대의 한계점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거나.
그의 갈색 눈은 차 문을 부서뜨릴 듯 열고 나오는 재림을 무심히 쳐다본다. 차 밖에 있는 사람보다 차 안에 있던 운전자가 더 혼이 나간 것 같다. 그녀의 발걸음이 조금씩 옆으로 틀어지고, 비틀거렸다.
쫙----
곧바로 여자는 제이의 오른쪽 뺨을 휘갈겨 쳤다.
쫙----
다시 제이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하, 다 했어?”
제이가 정면으로 여자를 쳐다보았을 때, 그의 오른쪽 뺨에 얇게 그어진 손톱자국에 핏물이 고여 있었다. 곧바로 재림의 눈살이 찌푸려지더니 날카롭게 내지른다.
“이 씨발 새끼야! 너 뭐야! 너 이 새끼 뭐냐고!”
여자의 손이 다시 올라갔고, 제이는 그 손을 가볍게 낚아챘다.
“말해. 너... 김 복자 그 여자 좋아하니? 좋아하는 척이 아니라, 진짜 좋아해?”
양옆으로 완벽히 대칭을 이루는 여자의 커다랗고 까만 두 눈과 위로 향한 콧날, 도톰하고 알맞게 부푼 입술.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칭송하는 그 얼굴이 질투로 범벅되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제이는 대답이 없었지만, 살짝 일렁이는 갈색 눈을 확인한 재림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진다. 그것을 잡고 있던 제이의 손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떻게.... 니가... 니가 누굴 좋아할 수 있어. 진심으로? 너 그거 안 되는 애잖아. 감정 같은 거 너한테 장난 같은 거잖아. 도대체 뭐가, 그 여자 뭐가 널 흔들리게 했는데!! 나이도 많고, 예쁘지도 않고, 집안이 빵빵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잖아. 길거리에 차일 만큼. 그저 그런..”
“조재림.”
“말해. 나 그거 들을 때까지 여기서 한 발짝도 안 움직여. 아니, 이 차로 저 집까지 들이박을 거야.”
“넌 내가 아니라, 민 우성을 신경 써야 해. 왜 나한테 힘 빼냐.”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재림의 커다란 두 눈에 빠르게 눈물이 차오르더니 곧 얼굴선을 따라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봐. 넌 이런 새끼야. 3년 동안 널 좋아한 난, 너한테는 사람도 아니었지. 그냥 잠이나 자는 상대였지. 그래도 난 너를 .... 친구로 내 옆에 뒀어. 넌 나 말고 누구한테도 마음 같은 건 안 주는 사람이니깐. 그래서 이해했어. 그래서... 참을 수 있었다고!”
“어쩔 수 없었어. 이번엔 내 마음대로 안 됐어. 내가 누구를... ”
“그만! 그만! 더는 말하지 마. 안 들을 거야. 그만해. 더 말하면 나 이 자리에서 너 죽일 거 같으니까. 입 다물어...”
재림은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더니, 고개를 숙인 채 모든 움직임을 잠시 멈추었다. 그 앞에 제이는 나무처럼 굳은 표정으로 서 있다.
“후우우-”
재림의 분홍색 입술에서 새하얗고 기다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여자는 등을 돌려, 차가 있는 쪽으로 느리지만 정확한 걸음을 옮기려 노력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들키지 않으려 재림은 정신을 가다듬고, 가다듬었다.
잠을 자고 있는데, 묘한 기분이 든다. 수면 상태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사라지고 무언가가 얼굴에 닿는 느낌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꿈결 같지만, 분명히 꿈은 아니다.
파르르 떨리다가 서서히 눈을 뜨는 복자, 아직 주변은 적막하고 어두운 밤의 한가운데다. 조금은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두 눈을 발견한 복자는 화들짝 놀란다.
“헉, 뭐야?”
“나야.”
의자를 한쪽 벽에 밀어붙인 채로 그가 가만히 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한다.
“거기서 뭐해?”
그제야 복자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상반신을 일으켜 침대 벽에 기대어 앉는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탁상 옆 스탠드 불을 켜려고 하자, 제이가 두 손을 앞으로 펼치며 말한다.
“아니, 잠시만 이대로...”
창문 위로 비치는 어슴푸레한 달빛이 제이의 얼굴을 반쯤만 밝혔다. 나머지는 어둠에 깊숙이 감쳐져 있어서 보이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고요하고 편안해 보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어둠에 익숙해지자, 방 안의 정적과 함께 그림처럼 앉아있는 제이가 더 깊고 또렷이 보였다. 그 그림 속 남자는 마치 수줍음이 많은 작은 아이 같았다. 복자는 겨울밤만이 주는 아늑함 때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을까?
오늘이 처음인 걸까?
“오늘이 두 번째야. 글 쓰다가 머리가 좀 아파서 ... 잠시 온 거야.”
내가 소리 내서 말했나.
복자의 어깨가 깜짝 놀라 안으로 살짝 움츠러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앉았다.
“왜...글이 잘 안 돼?”
복자는 두 무릎을 올려 손으로 가운데를 감싸 안는 자세를 만들었다. 작은 몸이 포근한 이불 아래 동그랗게 구부러지니 더욱 작게 보였다.
“아니. 너무 잘 쓰여.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끔찍했지. 축축하게 온 몸이 젖어서 햇빛에 좀 말리려고.”
제이는 등을 벽에 기댄 자세로 앉아 나른하지만 따뜻한 목소리로 답했다. 쉽게 이해하지 못할 그의 말들도 밤이 주는 말랑한 분위기 때문인지, 물에 퍼진 잉크처럼 그녀의 마음속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내가 햇빛이야? 이거 너무 시적인데. 크”
낯간지러운 말에 반응하기가 영 쑥스러운지 복자는 연신 코를 찡긋거리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보고,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제이가 몸을 일으켜 복자에게로 천천히 걸어온다. 긴 다리가 두 걸음 스치니, 곧장 여자의 얼굴에 손이 닿을 거리다.
달빛이 만들어내는 하얀 사각형 안으로 제이의 몸이 가릴 것 없이 다 들어찼다. 그는 커다란 손을 뻗어 복자의 머리 위로 살포시 그것을 얹어 놓았다. 두 사람 사이로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뿌연 안개가 연하게 지나친다. 몽롱한 기운이 방안을 감돈다.
복자의 머리칼 위로 따뜻하게 내려앉은 제이의 손길이 스쳤다 지나치기를 노래하듯 반복했다. 온 몸의 피가 머리 위로 쏠린 것처럼, 그녀의 모든 감각이 팡팡 터지는 불꽃처럼 부산하게 반짝였다.
“당신은, 내가 지켜 줄 거야.”
“..... 뭐?”
복자는 부드럽게 닿다 사라지는 찌르르한 감각에 넋 놓고 있다가 그의 뜬금없는 말에 뒤늦게 반응한다. 뭘 지켜 준다는 건지, 나를? 왜?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제이를 올려다보는 복자의 눈, 그 표정이 우스우면서도 사랑스럽다는 듯 제이의 입에 미소가 걸린다.
“말 그대로. 같은 말 두 번은 안 해. 다른 사람 인생 같은 거엔 관심 없었는데, 이젠 아예 걷잡을 수가 없네. 귀찮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내가 그동안 꽤 외로웠나봐.”
제이가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깊숙이 숨겨둔 부분을 달빛 밖으로 꺼내 놓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이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에 그녀에게 꼭 말해 주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거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당당하게 그녀의 앞에 밀치고 들어오는 우성 때문인지,
앞으로 무슨 일을 벌일 것처럼 폭주하는 재림 때문인지,
아니면, 하루씩 커가는 자신의 마음 때문인지.
“니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셋이서 사귀는 일은 못해. 그건 말도 안 돼. 나 평범하게 초중고 졸업했고, 꼬박꼬박 세금 내면서 읍!”
두 눈을 감은 제이, 종알대는 복자의 입술 위로 자신을 맞춘다. 입술과 입술 위로 보드랍고 적당히 촉촉한 감촉과 오고 가는 얕은 숨결만 존재했다. 동그랗게 커졌던 여자의 눈도 스르륵 눈꺼풀이 닫힌다.
하나의 짧은 접촉으로 연결된 두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껴안으려 달빛은 온 힘을 다한다. 밤의 공기가 새벽을 향해 달려가고, 창문 뒤로 하얀 달은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사실처럼, 아침이 오고 결국엔 두 사람을 감추는 어둠도 사라질 것이다.
제이는 두 손을 들어 올려 조심스레 여자의 양쪽 뺨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뜨고 여자의 이마 위로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댄다. 아래로 얌전히 내려앉은 여자의 기다랗고 풍성한 속눈썹을 바라보며 속삭인다.
“그래. 지금처럼. 그만큼만 날 좋아해줘. 너무 많이도 말고 적게도 말고. 나머지 부분은 내가 다 채울 거니까.”
남자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다고 복자는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