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두 번째 이야기
“너... 진심이야?”
“막지는 않는 거네. 진심이냐고 묻는 건, 당신도 나한테 마음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는 거지? 진심이야. 물론. 이보다 더 선명할 수 없을 정도로.”
제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뒤에서 걸어오는 우성의 모습이 보인다. 어둠 속이었지만, 그의 얼굴이 꽤 굳어있다. 제이는 움찔거리며 자신이 잡은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복자를 더욱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뒤돌아 우성과 눈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복자는 두 사람의 팽팽한 긴장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숨도 쉬기 어려웠다.
"복자 씨?”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우성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복자가 손을 빼내려 흔들었다. 제이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더니,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놓아준다.
“우성 씨. 어떻게 된 거예요? 아침에... 우리 이야기 다 끝났잖아요.”
“ 나도 복자 씨한테 내 생각 다 말했는데. 우리, 끝날 일 없을 거라고. 둘 다 좋아하라고 말했잖아요.”
초췌했던 오늘 아침의 모습과는 다르게, 지금의 우성은 원래의 말쑥한 차림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멀쩡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제정신으로 볼 수 없는 내용의 말들을 내뱉고 있었다. 무표정한 제이의 얼굴은 무슨 생각인지 알기 어려웠다.
“하. 그럴 수 없어요. 우성 씨.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닌데. 숨어서 하는 짓, 그냥 대놓고 하면 되는 거잖아. 셋이서 한집에 살자는 것도 아닌데, 못할 게 뭐가 있지.”
복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이가 그다음 말을 가로챈다. 입가에 미소까지 걸친 채로, 그는 복자를 슬쩍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우성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말했다. 우성은 잠잠한 눈으로 그 시선을 응시했다.
어이? 저기요? 지금 뭐 하시는 중이세요? 나, 여기, 안 보여요?
복자와는 상관없이, 두 남자는 그들 나름대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나보다 많아 보이진 않는데.”
우성이 어깨를 당당히 펴며 제이를 향해 묻는다.
“하, 그쪽보다 물론 많진 않죠. 스물다섯입니다.”
스물다섯이라는 대답에, 우성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가 이내 안심한 듯이 조용히 웃는다. 어린놈의 치기로, 자신의 적수가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인가. 제이의 도톰한 입술 끝이 한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렇군요. 전 서른다섯입니다.”
“그쪽 나이 물어본 적 없는데, 굳이 말씀해주신다면야 ”
“하..그런가요? 전 복자 씨와 진지한 만남을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 복자 씨한테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애가 타죠. 하지만 노력할 거고, 자신도 있습니다. 그래서 복자 씨가 나랑 그쪽을 동시에 만난대도, 전 괜찮은데. 그쪽은?”
“ 상관없죠. 나야. 그쪽은 나 말고도 이것저것 신경 쓰고 사는 분 같은데, 난 세상에 관심 끄고 사는 편이라... 이 여자 빼고는.”
제이는 왼쪽 턱 끝으로 자신과 우성 사이에 서 있는 복자를 가리킨다. 우성의 시선이 따라와 당황한 표정으로 얼어붙은 복자의 얼굴을 훑고 지난다.
이것들이 지금 제정신이야.
이거 왜 이래.
이대로는 안 된다. 진짜로.
복자는 속에서부터 올라온 깊은숨을 내뱉은 후 천천히 입을 뗐다.
“아니, 여보세요들. 지금 뭐 하세요? 네?”
그녀는 오른쪽, 왼쪽으로 한 번씩 고개를 돌려 우성과 제이를 쏘아보듯 쳐다보았다.
“여기 시장이에요? 아님 마트야? 지금 둘이 물건 골라? 하나 남았으니까 그거 반으로 나눠가자 이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래. 인정해요. 내가 두 사람 좀 좋아했어. 평소에 양다리 걸치는 거 쓰레기 짓이라 생각했는데, 감정이 무 자르듯이 정리가 안 되더라. 나도 편하지만은 않았어요.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내가 미안해요. 이쯤에서 우리 그만하자. 나도 가슴 아프지만, 그게 좋을 거 같아요. 각자 갈길 가자. 네? 그러자고요. 제발!!”
쉴 새 없이 다-다-다- 복자의 연설이 끝이 나자, 우성과 제이 두 남자 얼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그때였다. 좁은 골목으로 귀에 익은 낡은 트럭 소리가 위에서부터 탈탈거리며 들려온다.
순간적으로 우성은 복자의 오른손을, 제이는 복자의 왼손을 잡아당겨 돌담 벽 쪽으로 몰아세운다. 각자 반대편에서 끌어당기는 바람에 복자는 “악악악!! 아파!” 라고 새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찌됐든 우성, 복자, 제이 이 순서로 세 사람이 손을 잡고 벽 쪽으로 배를 맞대고 서 있게 되어 버렸다. 그 뒤로 아슬아슬하게 트럭 한 대가 지나간다.
“아이고 이게 누구냐, 복자 아니냐.”
역시 .... 배추 아저씨 차가 맞았다. 눈도 밝으신지라, 이 시커먼 골목길, 뒤통수만으로도 복자를 단박에 알아채신다. 눈치도 그만큼 있어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 아~ 네... 아저씨.. 안녕하세요.”
복자는 양손이 두 남자한테 결박(?)된 채, 고개만 간신히 돌려 배추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 사이에 제이와 우성은 복자의 손을 붙잡은 상대의 손목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연신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를 굴렸다. ‘놔라. 그거 좋은 말로 할 때.’ 라고 메시지를 주고 받고 있는 중이다. 이 상황에서도 두 사람 그러고 싶니?
배추 트럭이 시속 15킬로미터로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가는 탓에 세 사람은 꽤 긴 시간을 그 자세로 굳은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따. 근디 그림이 쪼까 이상하다잉.”
배추 아저씨는 작게 찢어진 눈을 더 찌푸리며 벽에 달라붙은 세 사람의 모습을 살폈다. 180cm는 휙 넘는 장대 같은 남자 둘이 조그마한 복자를 가운데 끼고 있는 장면이 아저씨 눈엔 심상치 않게 보였기 때문이다.
“복자야.”
배추 아저씨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비밀이야기라도 하듯, 복자를 낮은 목소리로 부른다. 두 명의 남자도 귀를 쫑긋하고 집중한다. 복자는 떨리는 눈으로 간절하게 아저씨를 바라본다. 제발, 어서 가주세요. 아저씨.... 속이 터지는 복자다.
“네?”
“너... 혹시.... 사채 쓰냐잉?”
“네???”
놀라 부릅뜬 눈으로 복자 돌아보다가 고개가 270도로 꺾여 버릴 뻔했다. 복자는 간신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양옆에 서 있는 남자들. 하나는 얼굴을 벽 쪽으로, 다른 하나는 땅바닥을 바라보며 터지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려고 고생 중이다. 위에서 올려다보니, 잘생긴 우성의 코가 연신 벌렁 거리며 구멍이 커졌다 작아졌다가 춤을 춘다.
이 아저씨야... 지금 웃음이 나와? 응? 어쭈 너까지...
창피함에 진땀이 질질 흐르는 복자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제이의 널따란 어깨가 작게 들썩들썩하더니 입에선 꺼익꺼익 괴소리가 새어나온다.
배추 아저씨도 “나쁜 사람들은 아닌가보네~” 하고 중얼거린다가 재차 물으신다.
“복자야, 아저씨가 내려서 도와줘야 쓰것냥?”
“아하하,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친구예요. 우리.”
복자가 잡은 손을 흔들거리며, 활짝 웃자 양옆의 두 남자도 배추 트럭 쪽으로 고개를 돌려 웃는 얼굴을 한다.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배추 아저씨 조금씩 속도를 높인다.
“그르냐, 우리 복자가 교우 관계가 참 좋다잉. 친구 좋지잉~근디....복자야, 나는 절대-애 그리 생각 안 하는디, 누가 보믄 셋이서 사귀는 줄 알긋다잉~ 오메~ 말도 안 되제~ 우찌 그랬스까잉~ 남자 둘이 박살나지잉~ 피 터져불제잉~ 절-대 사이좋게 못 지낸다잉~ 복자야~ 아저씨가 간다잉~ 또 보재잉~”
“아하하하. 가세요.”
배추가 반쯤 담긴 트럭이 골목의 꺾이는 모퉁이를 거의 돌 때까지 세 사람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 뒤를 눈으로 좇았다.
“휴~”
“하~”
“하~”
복자는 두 남자의 손을 뿌리치면서 둘을 번갈아 보며 말한다.
“잘 들었죠? 아저씨 말씀, 둘이 박살나고 피 터진대요. 잘 가요.”
그녀는 야무지게 입술을 다물고, 신경질이 묻어나는 발걸음으로 저벅저벅 걸어 대문을 열고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곧이어 들리는 복구의 개 짖는 소리만이 그 주변을 채우고, 두 남자는 어이없고, 민망한 표정으로 잠깐 서로를 쳐다보다 둘 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한다.
“ 뭐야? 지금? 핫! 둘이 그럼... 하하핫!! 그 말도 안 되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거야?”
좀 떨어진 거리. 라이트가 꺼진 빨간색 스포츠카 안의 재림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앉아있다. 우성의 뒤를 밟아 따라온 곳이 지난번 제이를 내려다 준 동네여서 이상하다 싶었지만...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핸들을 맞잡은 그녀의 손이 부들거리며 떨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새빨갛게 정리된 손톱의 끝이 신경질적으로 여기저기를 쳐내듯 내리찍는다.
삑삑삑-빽빽-
성깔 사나운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골목 안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