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네번째 이야기
사방의 벽이 부드러운 크림색으로 칠해져 있고, 햇빛이 눈부시게 들어온 커다란 창문이 나란히 붙어 있다. 왼쪽 구석에는 목화가지가 투명한 유리화병 안에 정갈하게 꽂혀 있고, 그 옆에는 마호가니 나무로 짜여 있는 이층짜리 서가가 있다. 그 안에는 이십 여권 정도의 책이 줄지어 있는데 대부분이 소설책이거나 수필집들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히 정리된 여자의 손이 그 중 한 권의 책을 골라잡는다.
스푸트니크의 연인.
진희다.
“자, 오늘은 무슨 책을 읽어 볼까요? 음~ 하루키 어때요?”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침대 위에 누워있는 한 남자를 향해 묻는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다음 말을 이어간다.
“스푸트니크의 연인, 제목이 예술이지 않아요? 정말이지, 첫 눈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죠.”
이십 년 전, 서른 살의 민수는 진희에게 ‘스푸트니크의 연인’이란 제목 그 자체였다. 강렬하고 매력적이었으며 남자로선 드물게 아름다웠다. 어쩌면 그녀가 러시아에서 쏘아올린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처럼 민수 주변을 빙빙 떠돌게 된 건 당연했다.
- 난 이미 아내도 있고, 다섯 살짜리 아들도 있어요. 어른들께서 일부러 우리 둘을 여기서 만나게 한 것 같은데, 그 쪽한테는 정말 무례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남자의 말이 가관이다. 더 기가 찬 것은 아내가 있다는, 아들이 있다는 그의 말이 확실한 거절인 걸 알면서도 그렇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는 거다.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여자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 그 쪽이 아니라 제 이름은 이 진희에요. 최 민수 씨. 아들이 있다는 건 몰랐지만.... 전, 이미 이혼하셨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아무튼, 어른들 뜻 거스르기 힘들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전, 그 쪽이 마음에 드는데, 혹시 이런 제가 더 무례한가요?
불현 듯 떠오른 그들의 첫 장면으로 진희의 얼굴엔 깊은 주름과 함께 씁쓸한 미소가 스친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손을 들어 올려 귀 옆머리 쪽을 매만지다 뺨을 지나 자신의 턱을 두 번 쓰다듬는다. 때때로 외로움이 해일처럼 밀고 들어올 때마다 하게 되는 자신만의 기도방식이다. 오늘따라 여자의 머리칼이 유난히 더 새하얗게 보인다.
재벌가의 딸이지만, 자신은 그런 여자들과는 다르다 생각했었다. 머리가 영리했고, 그런 속물들과 같은 과로 엮이기엔 스스로는 급이 다른 인간이라 여겼다. 비슷비슷한 집안의 아들과 결혼해서 애 낳고 내조나 하면서 값비싼 붙박이 가구처럼 살고 싶진 않았다. 그랬기에 혼자 힘으로 의대에 당당히 진학했고, 결혼도 자신의 마음을 정말로 흔드는 남자와 하길 바랐다.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민수를 만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진희는 알게 되었다. 자신도 값비싼 붙박이 가구의 여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돈이 주는 풍족함과 안락함에서 태어나서 자란 그들이 울타리 밖을 박차고 나가는 일은 자살행위와도 같다. 그렇기에 민수는 곧 돌아올 것이고, 자신은 법적인 아내의 자리를 지키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결국은 시간 싸움이고, 진희는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으며, ‘좌절’이란 단어를 몰랐다.
피범벅이 된 민수를 뒤집어진 차 안에서 꺼낼 때까진 말이다.
진희의 아련한 눈빛이 잠자는 남자의 얼굴 위에서 잠시 머문다. 닫힌 눈꺼풀 아래로 길게 내려온 속눈썹과 우뚝한 코와 얇게 다문 입 아래로 깔끔하게 면도된 턱이 매끈해 보였다. 귀 아래로 내려온 남자의 머리칼을 진희는 손을 올려 귀 뒤로 넘기면서 말한다.
“내일은 꼭 이발을 해야겠네. 머리가 너무 길었어요. 당신.”
민재는 17년 전 있었던 교통사고로 인해 식물인간 상태다. 그는 서른 살의 기억 속에 갇힌 채로 깊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 기억 속에 법적인 이름으로 묶여진 아내, 진희의 자리는 아마 조금도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진희는 17년 전 그날부터 오늘까지 단 하루도 그와 떨어지지 않고 있다. 언젠가 깨어날지 모른다는, 단 1퍼센트의 기적을 의사가 아닌, 한 남편의 아내로써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꼭 해 줄 말이 있다.
- 미안하다고. 부끄럽지만 나를 용서해 줄 수 있느냐고.
“ 아- 이러면 안 되십니다. 회장님께서 지금은... 아.. 사장님. 사장님!!”
바깥에서 여비서가 누군가를 말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부서질 것처럼 회장실 문이 열렸다. 역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차갑게 굳어버린 민재의 얼굴 뒤로 여비서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로 회장의 눈치만 살핀다.
“이 비서, 괜찮아. 들어가 보게. 자네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전보다 살이 빠져 보이는 최 회장이 피곤한 기색을 가리며 옆에 서 있는 진희에게 말한다. 진희는 준비해 온 혈압 측정기를 정리하며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민재를 쳐다본 후 고개를 숙이고 말한다.
“아버님. 혈압이 안 좋아요. 전번에도 위험하셨잖아요.”
“알아. 내 잘 알지. 걱정하지 말고 어서 병원으로 돌아가.”
그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진희를 다독였다. 준비해온 의료기구들을 가방 안에 정리한 후, 진희는 대리석 바닥 한 가운데를 가로 질러 나갔다. 문 옆에 선 민재가 한쪽 입술 끝을 올리며 비웃듯이 말한다.
“니가 나랑 다른 게 뭔데?”
걸음을 멈춘 진희. 고개를 돌려 내리꽂는 시선으로 민재를 바라보며 말한다.
“다르지. 난 죄지은 걸 알지만, 넌 아직 모르잖아. 그건 큰 차이야.”
민재의 눈동자 속에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크게 뒤흔들리다 멈췄다. 그리고 문밖으로 나가는 진희의 등 뒤로 칼을 꽂는다.
“하! 반송장 껴안고 사는 주제에... 잘난 척 하지 마.”
민재는 뒤 돌아 검은색 의자 안으로 몸을 깊숙이 가누고 있는 석양 낀 노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 뒤로 서울의 스카이 빌딩 숲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그 그림의 한 가운데 민재는 젊고 유능한 자신의 아들, 우성을 그려본다. 모자람 없이 완벽하고 고급스러운 도시의 그림이 그제야 완성된다.
우성은 민재의 현재이고, 미래이자, 인생의 모든 것이다.
“아버지를 뵙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어떻게 가족의 정이 돈독해질 수가 있겠어요? 아버지.”
그녀의 두 눈엔 싸움의 의지가 활활 불타오르는데, 입술만은 위로 기괴하게 올라가 있었다. 최 회장은 여전히 덤덤한 표정이다.
“창립기념 파티 이후론 처음이구나. 그간,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만나기가 어려웠단다.”
책상 앞까지 걸어온 민재는 두 팔을 짚고 몸을 기댄 채 아까와는 달리 웃음기가 싹 빠진 목소리로 묻는다.
“아버지. 왜 마음을 바꾸셨어요? 기념 파티 때. 왜 우성이를 후계자로 발표하지 않으셨죠?”
민재의 말이 끝나자 최 회장의 두 눈꺼풀이 무겁게 아래로 닫힌다. 깊은 한숨이 두 번 쉬어 나올 동안 두 사람 모두 말없이 침묵의 시간을 견뎠다.
“우성이는 많은 걸 누리면서 컸어. 능력도 있고. 모자람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너도 잘 알잖니? 니 아들인데. 뭐가 그렇게 조급해하고 불안한 거냐.”
“아버지가 날 불안하게 만들죠. 늘. 항상. 결정적인 순간엔, 나를 버리니깐. 이십 년 전에도 그러시더니, 이틀 전에도 그러시더라고요. 변함이 없으세요. 아버진.”
“민수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넌 딸이고, 민수는 아들이었잖니. 날 형편없는 고지식한 노인네라고 해도 좋아. 그렇게 말한대도 나는 할 말 없다.”
“네! 네! 그렇죠. 드디어 인정하기 시작하시네요. 회사도 싫고, 가족도 싫다고 다 내팽개치고 나간 아들한테는 그렇게 목매시더니, 아버지 하라는 대로 평생을 살아온 저는 늘 스페어타이어 취급하셨잖아요!! 아니에요?”
그녀의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떨리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머리끝에 닿은 흥분을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힌다. 두 눈을 감고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채 최 회장은 딸의 들끓는 감정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 생각했다.
“...전 그렇다고 쳐도, 제 아들한테까지 그렇게 취급하시면... 저, 아버지... 용서 못해요. 이건, 부탁이 아니고 경고예요.”
이를 갈 듯이 말 하나하나를 잘게 씹다가 토해내는 민재. 그녀는 아직 뜨거움이 남아있는 시선을 간신히 거둔 채 뒤돌아 나간다. 그때, 최 회장이 툭 한 마디를 내뱉는다.
“ 우성이 목 조르지 말거라. 그냥 제가 좋다는 여자랑 결혼시켜!”
“ 하-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하하하. 개가 웃을 일이네요. 자식까지 낳고 사는 사람들 억지로 갈라놓고, 다른 여자랑 법적으로 결혼까지 시키신 분이 누구죠? 네?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데요. 오빠를 보세요. 오빠를.”
“그래. 그게 나다. 그랬던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봐 둬. 넌, 나처럼 되지 말란 뜻이다.”
“하. 전 아버지랑은 다르죠. 제 아들은 특별해요. 오빠랑 비교할 수가 없죠.”
모욕적인 말이라도 들은 듯, 발발 떠는 딸의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최 회장은 무겁게 일을 열었다.
“다...그랬어. 나도 그랬고. 내 자식은 아주 특별할 줄로만 알았지. 그런데, 민재야. 세상에 특별한 사람은 없어.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우성이는 더 도망가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