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다섯번째 이야기
새해가 시작되고 며칠이 흘렀다. 1월의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햇살은 따뜻했고, 바람은 차가웠다. 복자의 마음만큼이나 혼란스럽고 가늠할 수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와... 나 지금 119 누를 뻔했다. 홍 양, 턱 빠지는 줄 알고.”
장 기자가 30cm 유리자로 제 등을 긁다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는 홍 양을 경외에 찬 눈으로 쳐다본다.
“아~흐흐 점심 먹고 났더니 완전 졸려서리. 추운데 있다가 따뜻한데 들어와서 그런가? 커피라도 좀 마셔야겠어요. 여기, 커피 드실 분!”
“아침 점심 저녁 먹는 커피 또 마시냐? 그럴 때는 커피 보다 더 좋은 게 있지! 암~”
“아직, 저녁 건 안 마셨는데. 근데 그게 뭔데요? 막 궁금해지네요.”
“궁금하긴 뭐가 궁금하냐? 뻔하지. 외계인? 별자리? 찌라시? 토정비결?”
어느새 홍 양 가까이 다가온 새벽은 그녀의 머리 위에 장난스럽게 딱밤을 내리치며 장 기자를 향해 툴툴 거린다.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만지는 홍 양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빙고! 4번! 토정비결! 역시 이 새벽 눈치 하난 빨라.”
“그건 눈치가 빠른 게 아니고, 장 기자님의 패턴이 빤한 거 아냐?”
옆에 앉아있던 복자도 세 사람의 대화에 흥미를 보이며 의자를 돌려 앉으며 말한다.
“ 아 흐흐흐 그런가. 내가 좀 순수한 타입이긴 하지. 빤하게 보이는 거 보면. 암튼, 그건 그렇고. 짜잔~ 요거 보시랏~ 을사년 새해 대박 토정비결~ 움하하하하”
장 기자는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려 폰 화면을 세 명의 얼굴에 골고루 들이밀었다. 요란한 한자들이 뒤섞인 황토색 배경화면엔 선명하고 굵은 글자로 ‘신년 토정비결’라고 적혀있었다.
“와우. 그럼 장 기자님. 우리 것도 봐주시는 거예요?”
기대감으로 홍 양의 두 눈이 반짝이며 빛이 난다.
“고럼, 당연하지. 내가 불쌍한 너네들을 위해서 거금 5 만원을 선 결재했지. 한 달 동안은 무제한으로 볼 수 있지롱.”
“5만원? 돈이 썩어난다. 공짜도 차고 넘치는데.”
새벽이 얇은 금색 안경테를 검지 손가락으로 들어 올리면서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한다. 그 얄미운 모습에 곧바로 장 기자가 발끈하며 소리친다.
“무료랑 유료랑 급이 같냐? 우이씨! 너는 안 봐줘! 이 새벽. 딱 봐! 너만 안 봐 줄 거야!”
“아니, 그러지 말고. 장 기자님! 저부터 얼른 해 주세요. 저 너무너무 궁금해요. 연애운부터! 얼른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깍지를 낀 채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홍 양을 뒤로하고, 막 출판사 입구로 들어온 고 팀장님을 향해 장 기자가 손을 흔든다.
“야야,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홍 양아. 일단 넌 좀 기다리세요. 저기, 왕 누님 오신다. 팀장님! 고 팀장님!”
“뭐야? 왜 그래? 무슨 일 났어? 왜 여기 다 모여 있고.”
붉은색 슈트를 멋들어지게 빼입은 고 팀장이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
고 팀장님의 신년운세를?
홍 양, 복자, 새벽 모두 초롱초롱한 눈으로 팀장의 얼굴을 쳐다보자, 고 팀장은 괜히 볼을 긁적인다.
“왜 그래? 다들. 나 뭐 묻었어?”
“아, 아니, 팀장님 생일? 11월 언제였죠?”
“11월은 누구니? 9월 30일. 근데 그건 왜?”
“아, 맞다 맞다. 음력, 양력?”
“양력. 근데, 진짜 뭐야~?”
“신년 운세 보는 거래요. 그냥 재미로 보세요. 팀장님도.”
복자의 말에 고 팀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장 기자를 바라본다. ‘어디 한번 떠들어보시지’ 하는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장 기자의 결과를 기다린다. 폰 화면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장 기자는 쪽 찢어진 작은 눈으로 폰 화면을 한참을 응시했다. 다들 장난으로 보는 운세라고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모두들 숨을 참고 결과를 기다린다.
로딩이 드디어 끝났는지 그가 힘찬 목소리로 팀장의 신년 운세 결과를 읽어 나가는데.
“메마른 고목 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하니, 그대는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온몸을 다 던져 불살라라. 그러면 애정운은 물론, 자식운까지 들어와 식구가 늘어나는 형국이니. 와! 팀장님! 대애애애박~”
“와! 정말요. 정말 꺅~~”
“팀장님, 축하드립니다. 올해 저희 국수 먹나보네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놓치지 마세요. 팀장님.”
네 사람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고 팀장은 잠시 멍한 얼굴로 눈만 껌벅이다 곧바로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아야 됐어. 됐고. 난 이제 고만 보고, 딴 사람 봐봐. 딴 사람. 그래 김 대리 꺼보자!”
그녀의 살짝 붉어진 두 뺨을 보니 장 기자의 토정비결이 아예 헛다리를 짚은 것 아닌 것 같다. 이에 기세가 등등해진 장 기자가 한 손으로 아래턱에 붙은 수염이라도 쓰다듬는 동작을 시늉하며 말한다.
“자, 김복자 대리. 아이쿠. 이제 서른 둘이구만. ”
“하하하. 왜 이러세요. 88년생 아저씨~”
“어헛! 양력 생일이나 어서 말해보시게.”
“2월 14일.”
장 기자의 질문에 맞은편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새벽이 무심한 얼굴로 대답한다. 복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새벽을 쳐다본다. 분위기가 야릇하게 돌아가자, 새벽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말한다.
“아니, 발렌타인이잖아. 왜? 외우기 쉽잖아. 왜 다들 나를 그런 눈으로 봐?”
“각설하고. 일단. 김 대리 신년 운세부터 먼저 보고 나서 이야기하자고. 자,보자. 어이쿠야. 다사다난하구만. 김 대리. 이 사주는 작년 말부터 올해까지 연결되어서 하늘에 천둥이 쳤다, 꽃비가 내렸다, 다시 장대비가 쏟아붓는 형국이다. 저 멀리 광야에서 귀인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데, 그 모습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입이 귀에 걸리고, 얼굴에 꽃이 피지만, 좋은 일엔 꼭 화가 끼이는 법. 순식간에 날아드는 화살에 급살 맞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이게 뭔 말이야? 김 대리, 감이 와?”
하나가 아니라 둘? 그건 뭐 그럴 지도.
얼굴엔 꽃은 피는데, 화살이 날아와?
이거 좋은 거야? 나쁜 거야?
괜히 사주 같은 거 본 것 같아 찜찜해하는 복자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장 기자가 머쓱하게 한 손을 올려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한다.
“음 뭐 결론은. 올 한해가 심심하진 않겠네. 좋겠어.”
심심하지 않으면 좋은 거야? 뭔 결론이 그렇게 나?
화장실에서 큰 일보고 안 닦고 나온 것 같은, 이 어정쩡한 기분이라니.
씨 괜히 봤다.
“.... 다음 뉴스 전해드리겠습니다. 조 기상 경제부 총리가 내달 20일 대선출마 입장을 밝힌다고 합니다. 그동안 조 총리는 언론에 언급된 여러 대선 후보 중 가장....”
관리실 안으로 들어오는 재림을 발견한 종업원이 서둘러 자신의 스마트 폰 뉴스 영상을 끈다. 서둘러 재림에게 가운을 건네고,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기분을 맞춘다.
“오 재림씨 피부 너무 좋다. 역시 사람이 관리도 중요하지만, 타고난 게 제일이야.”
“그래요?”
재림은 그런 말은 너무 들어서 지겹다는 듯, 시큰둥한 투로 마지못해 대답한다. 그러고는 어깨에 걸친 갈색 무스탕 외투를 벗으려고 하자 종업원이 쏜살같이 달려와 뒤에서 그것을 받아든다. 재림도 그 행동에 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외투와 가방을 여자에게 넘긴다.
“어머님은 지난주에 숍에 관리받으시러 오셨는데, 조 총리님은 요즘 영 바쁘신가봐요. 아니지, 후보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호호호”
여자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아부라고 하기도 안쓰러워 보였다.
“... 뉴스 보셨나 봐요? 아버지 일이라 저는 잘 몰라요.”
“ 응, 응 하긴 그렇겠다. 자기도 요즘 드라마다, CF다, 뭐다 좀 바빠야지. 거기다 스캔들까지 읍!! 어머어머 내가 무슨 소리를. ”
관리사는 자기도 모르게 모토를 단 것처럼 재잘거리는 입을 손으로 급하게 막으며 멋쩍게 웃었다. 재림은 뒷말을 못 들은 척 건조한 표정으로 가운을 들고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던 찰나에,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관리사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누구세요? 어머! 최 사장님!” 이라며 뒤로 넘어갈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반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검은색 숄을 멋들어지게 걸친 민재였다.
“응, 여기 재림이 피부 받으러 들어왔다고 해서, 왔다가 잠깐 얼굴이라도 보려고.”
“아줌마 여기 어떻게 오늘 예약하신 날이었어요?”
금세 탈의실 밖으로 튀어나온 재림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민재에게 서둘러 다가간다. 아까의 무덤덤한 표정과 말투와는 사뭇 다르다. 완전히 다른 인격으로 갈아 끼우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너 피부 맛사지 받아야지. 나는 그냥 인사만 하러 온 거야.”
“아뇨. 다 받아서 막 나가려고 했어요. 차 한 잔 어때요?”
“그래? 나야 좋지. 언제든지 재림이가 원한다면.”
두 사람은 마치 사이좋은 모녀처럼 팔짱을 낀 채 관리실 외부 통로와 연결된 카페테리아에 도착했다. 구부러진 나선형 형태로 디자인된 기하학적인 유리창 너머로 평일의 청담동 시내가 평온하게 펼쳐져 있었다.
“재림아, 살이 더 빠진 것 같다. 날씬해서 보기 좋다만. 우성이 때문에 맘 써서 그런 거 아니니?”
“아뇨. 뭐 제가 급했죠. 원래 우성이 오빠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밀어붙인 게 제 잘못이죠.”
재림은 내심 힘들지만, 이제는 많이 좋아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리며 카푸치노 한 모금을 조심스럽게 마신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던 민재가 한 손을 뻗어 재림의 손을 포개어 잡는다. 그러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안심하라는 듯 눈빛을 보낸다.
“내 아들은 내가 잘 알아. 넌 우성이하고 평소처럼 지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깐.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네. 그런데 오빠가 관심 있어 하는 사람이 있는 거 같아서.”
재림은 시선을 힘없이 아래로 내리며 풀이 죽은 투로 말끝을 흐린다. 그러자, 재림의 손을 잡은 민재의 손에 더욱 강하게 힘이 들어간다.
“훗, 남자들 원래 단순해서 한 눈을 팔다가도 곧 돌아오게 되어 있어. 장애물이 있으면 치우면 되는 거고, 격이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짝 이뤄서 사는 게 행복 아니겠니? 그게 인생의 정답이고. 정답이 있는데 왜 먼 길을 돌아가려고 그래? 재림이 넌, 너무 얘가 여려서 탈이다. 앞으로 그래가지고 어디 이성그룹 안주인 노릇 하겠어.”
“아이 참, 벌써 이성그룹 안주인이라고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부담스럽죠. 호호호”
“호호호 그러니 이런, 내가 너무 앞서 나간 건가.”
오후 2시의 햇살이 두 사람의 반질거리는 얼굴 위를 부드럽게 훑고 지나친다. 마음속에 숨은 각자의 복잡한 셈법까진 비출 수 없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