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여섯번째 이야기
〔 우성: 오늘은 집에서 봐요. 괜찮죠? 복자 씨 퇴근 시간에 맞춰서 이 실장이 차로 데리러 갈 거예요. 거절하지 말아요. 내가 직접 데리러 가지 못한 것도 미안하니깐. 〕
요즈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매사 느긋하던 사람이 무언가에 쫓기듯이 바쁘고 급하게 복자를 대하는 것이다. 연락이 잦아졌고, 만나지 못하는 날에는 시시콜콜한 이유들로 전화통에 불이 났다. 분명, 누군가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복자의 심정은 살살 녹았다가도 양심에 콕콕 가책을 느꼈다가 하루에도 수 십번 왔다갔다 했다.
동시에 두 남자를 만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큰 소리쳤지만,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묘하게 흘러갔다. 지난 번 골목길에서처럼 세 사람이 한꺼번에 맞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모를 일. 나중엔 어떤 일이 터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두 남자는 여전히 당당히 걔도 만나고, 나도 만나보라고 서슴없이 복자에게 말했다. 그녀의 고민을 전해 들은 절친, 혜교는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하냐고 했다.
- 야! 가시내야. 오히려 잘 됐다. 너 늘 한 사람한테 목매다가 뒤통수 맞은 적이 어디 한 두 번이가? 니 인생에 온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둘 다 만나보고 결정해라. 한 쪽에 쏠릴 일도 없으니 냉정하게 봐 지겠네. 그러다가 둘 중에 한 명이 떨어져 나가면 인연이 아닌 거고. 이번엔 내가 미친년 됐다 생각하고 연애 함 화끈하게 해봐라!!
아니, 이게 뭐 호텔 사이트에서 가격 비교하는 것도 아니고, 뭘 냉정하게 비교하라는 건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밤이 지나 아침이 되었다. 결정을 미루고 또 미루는 건 심리적으로 엄청난 압박감을 안겨주었다.
심지어 지난밤에는 오른쪽엔 우성을, 왼쪽엔 제이를 양팔에 껴안고 누워있는 해괴한 꿈까지 꿨던 복자다. 이젠 뭐.... 막가자는 거지.
그러나 그녀도 알고, 두 남자도 알고 있고,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있다.
결국엔 둘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는 걸.
그리고 그 선택의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안 된다는 걸.
그래야 덜 아프다는 걸.
서로에게.
복자는 연신 핸드폰 화면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같은 내용을 읽고 또 읽었다.
“매번 이럴 수 없어. 오늘 딱 한 번만 더 보고, 결정하자. 그래. 이제 결정해야 해.”
그때, 탕비실 안으로 막 들어온 고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해? 김 대리? 거기서 램프의 요정이라도 나오는 거야?”
“앗! 하하. 아뇨. 뭐 커피 드릴까요? 팀장님은 에스프레소죠?”
“아, 아니. 나 유자차 마시려고.”
“유자차요? 그런 거 안 드시잖아요. 신 거 싫어하시면서.”
“흠흠. 김 대리도 나이 들어 봐. 몸에 좋은 거 찾게 된다고.”
평소와 다르게 얼버무리게 말하는 고 팀장의 모습이 낯설게 보인다. 유자청이 담긴 잔 안에 뜨거운 물을 부으니 탕비실 안에 달달하고 상큼한 유자향이 기분 좋게 퍼졌다.
“냄새 좋아요.”
“제이, 원고 작업은 어때?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네.”
고 팀장은 양손으로 하얀색 머그컵을 감싸고 입으로 호호 불며 말했다. 위로 올라온 뜨거운 김이 분홍색 뿔테 안경을 뿌옇게 덮어서 그녀의 눈빛이 가려졌다.
“열심인 것 같아요. 한집에 있어도 얼굴 보기 힘들어요. 동굴 속에 들어간 곰 같아요. ”
“어째 그 말이 내 귀엔 섭섭하단 소리로 들린다?”
무심히 툭 찔러보는 고 팀장의 말에 복자의 한 쪽 옆구리가 움찔하고 반응을 보인다.
“ 하하. 무슨 그런 말씀을. 섭섭하긴요~”
“ 그래? 뭐 아니면 말고. 그런데 제이가 이 말 들으면 섭섭하겠는데. 그럼 수고.”
그런가?
복자는 저 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집에 살지만, 제이의 얼굴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1월이 지나서부터는 더욱 그랬다. 밤새 원고를 쓰는지 그의 방은 불이 켜진 채 타자 소리로만 가득 차 있었다. 글 쓰는 작가가 제 일을 열심히 하는 건, 편집자 입장으로써 분명 기분 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이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때때로 잠이 든 복자를 보러 그녀의 방 안에 도둑처럼 혹은 귀신처럼 찾아왔다. 깊은 잠에 빠지지 않은 날, 운이 좋은 그런 날은 그를 잠깐 볼 수 있었지만.
퇴근 시간의 정점에 걸려 안국동에서 도곡동으로 이동하는 시간이 엿가락처럼 자꾸만 늘어진다. 이 실장이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복자는 그것이 여전히 불편하고 어색했다. '좋다’ 라고만 생각해도 모자란 순간에도 걱정할 거리를 찾는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하다.
“왔어요?”
열린 문 사이로 우성의 화사한 미소가 복자를 안고 어루만진다. 그의 손을 잡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선 복자의 시선을 맨 먼저 잡아 끈 건, 저녁노을과 밤의 중간에 기가 막히게 멈춘 유리창 너머의 풍경이었다. 거실이라고 불러야 하는 지도 잠시 망설여지는 널따란 공간 한 가운데 서서 복자는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와. 진짜 멋지다.”
그렇게 넋을 놓고 바라보는 복자의 왼쪽 뺨에 우성이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한다.
“조금만요. 음식, 다 되어 가니깐. 천천히 둘러보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오고 있었다. 저절로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거실 뒤쪽으로 연결된 두 개의 계단을 오르니 요리를 할 수 있는 부엌 공간과 그 옆으로 열 사람 정도는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한 가운데엔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하얀색 접시와 그릇들, 단정히 접힌 연두색 냅킨 2개, 반짝이는 은색 나이프와 포크들이 열 맞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든 걸 저 남자 혼자서 준비했다고?
저절로 복자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성은, 분명 다정한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가 될 남자다.
그녀는 한 손으로 테이블의 모서리 끝 부분을 매만지면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짙은 보랏빛으로 변하는 하늘을 배경으로 푹신한 소파위에서 뛰어 노는 남자 아이 하나와 그 앞에 앉아서 얌전하게 그림을 그리는 여자 아이 하나 더. 그리고 우성은 퇴근 후에 부엌에서 다정하게 저녁 준비를 하고, 복자는 식탁 위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른다. 소파 위에서 콩콩 뛰어다니던 남자 아이는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 못한다는 듯, 복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온다. 그러나 너무 그림에 열중한 여자 아이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계속 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 갑자기 나타난 제이의 품에 안겨 식탁에 앉는다.
“공주님~ 엄마 말 들어야지~” 제이가 그 특유의 매력적인 웃음을 지으며 복자에게 다가와 뺨에 입을 맞춘다.
그 때, 부엌 쪽에서 요란하게 들려오는 칼질 소리에 복자의 환상이 확 달아났다.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왜 셋이서 여전히 같이 살아?
혼자서 별 이상한 상상을 다하네. 미쳤다. 미쳤어.
아무도 볼 수 없는 제 머릿속이라지만 얼굴까지 화끈거릴 정도로 민망했다.
-탁탁탁탁...
도마 위 칼질 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탄다.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열중하는 우성의 단단하고 묵직한 뒷모습이 보인다. 키가 큰 그의 머리가 닿을 듯 말듯하게 놓인 선반 위엔 자잘한 소스 병들과 앙증맞은 나무 라디오 모양의 보스 스피커 사이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아는 노래다.
- 휴일 아침에 놀이공산 푸른 동산 해는 쨍쨍...
이소라다. 데이트.
이토록 달달한 선곡이라니.
복자는 조리대 맞은편의 바에 조용히 앉아 남자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칼 아래로 깔끔한 이목구비가 온화한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바라보는 복자의 마음도 덩달아 편안해졌다.
희고 동그란 양파가 현란한 칼질에 가차 없이 자잘한 조각들로 변했다. 매운 기가 위로 확 솟구쳤다. 복자가 입을 연다.
“와, 칼질 장난 아닌데요. 쉐프님인데.”
“평소보다 오늘 실력은 영 별룬데. 누가 보고 있어서 그런가? 긴장이 돼서.”
우성은 복자를 잠시 쳐다보고, 다시 칼질에 열중한다. 복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가, 이내 다시 기대에 찬 눈으로 우성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따라간다. 우성은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양파를 썰고, 이번엔 당근. 감자를 씻어내고 3분의 1만 칼집을 넣더니 뒤집다가 딱 멈춰버린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복자와 정면으로 눈을 딱 마주친다.
“후, 이러면 안 될 거 같은데...”
우성은 갑자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다시 올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어머?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감자가 썩었나.”
"자꾸 그렇게 복자 씨가 빤히 쳐다보면 파스타 속에서 내 손가락을 같이 만날 거 같아서요.”
“우웩.”
복자의 두 눈이 저절로 찌푸려지면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성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달궈진 팬 위에 넉넉히 올리브 오일을 뿌렸다.
주변에서 구경만 하기가 미안해진 복자가 두 팔을 걷어 올리며 말한다.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어요?”
달궈진 팬 위로 스테이크를 올리려고 하던 우성이 그런 복자를 쳐다보며 씨익 웃는다.
아~ 제발, 그렇게 좀 웃지 마.
심장이 콧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으니깐.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한 복자가 우성의 등 뒤로 홱 피하며, 주방 안을 빠르게 둘러본다.
“샐러드 씻을까요?”
“그래 줄래요?”
긴장하지 말자, 긴장하지 말아. 릴렉스. 후우~
복자는 다행히 신경을 다른 곳으로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은 안도감에 작게 한숨을 쉬며, 서둘러 볼에 담긴 샐러드들을 씻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이 손 위로 떨어지니, 두근거리던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다 씻은 샐러드의 물기를 빼고, 담을 그릇을 찾으러 주변을 돌아보려던 순간이었다. 유리 볼 근처에 불안하게 놓여 있던 토마토소스 그릇이 흔들거리다 뒤집어지면서 대리석 바닥으로 와장창 깨져 버렸다.
오- 마이 갓.
잘 하고 싶고, 예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은데 언제나 우성 앞에선 이 지경으로 꼬이고 만다.
“으악!!”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요!”
하필이면 이런 날 허연 옷을.... 후회해도 이미 일은 저질러졌다. 시뻘건 소스 국물이 복자의 아이보리색 니트 위로 피처럼 뒤덮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뭉글거리는 소스 국물이 옷 안으로 삭 하고 스며드는 축축한 기분이 느껴졌다. 이건 뭐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처참하다.
그녀의 발 주변으로 유리 조각이 파편처럼 흩어져 한 발만 잘못 움직였다가는 정말 바닥이 피범벅이 될 것 같았다. 새하얀 부엌 바닥이 금세 살인 현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머리가 멍해 있는데 복자의 몸이 붕 떠올랐다. 우성은 긴 팔을 죽 뻗어서 복자를 그대로 안아올린 것이다.
“어어!! 어.”
몇 만 볼트의 전기가 찌릿하게 통한 것처럼, 우성의 단단한 가슴팍이 그녀의 온몸으로 예민하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공주님 안기 시전에 복자의 얼굴에 벌겋게 변했다.
“ 미... 미안해요. 완전 부산행이네요.”
“ 크. 그럼 복자 씨 이제 곧 좀비로 변합니까?”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우성은 복자를 자신의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방 안은 적당히 어두웠고, 은은한 할로겐 조명 불빛만 어디선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냥 도망가시는 게 어때요. 셋 세어 줄게요.”
“아니, 그냥 난 물려버리고 싶은데.”
우성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약간 아래로 숙여 복자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남자의 코끝이 복자의 코에까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진동하던 소스 냄새가 멀어지고, 시원하면서도 묵직한 남자의 향이 숨결처럼 퍼졌다. 향도 향이지만, 두 팔로 단단히 복자를 껴안고 있는 우성의 상냥하고 따뜻한 체온은 복자의 흔들리는 마음을 지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