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곱번째 이야기
“지금이라도 그럼 도망가죠? 셋 세어 줄게요.”
“아니, 그냥 난 물려버리고 싶은데.”
우성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약간 아래로 숙여 복자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남자의 코끝이 복자의 코에까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온몸에서 진동하던 소스 냄새가 어느새 멀어지고, 시원하면서도 묵직한 남자의 향이 숨결처럼 퍼졌다. 향도 향이지만, 두 팔로 단단히 복자를 껴안고 있는 우성의 체온이 따뜻했다.
그의 입술이 스스럼없이 복자를 향해 다가왔고, 두 입술은 하나로 포개어졌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복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술이 닿자마자, 저절로 제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그 속도가 빨랐는지, 느릿했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분명 ‘거부’의 뜻이었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복자 자신도, 그녀를 안고 있는 우성도 순간 얼어붙었다. 당황스럽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되지 않았다.
“흐흠.”
우성이 헛기침을 하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먼저 지어 주었다. 고맙게도 말이다. 우성의 목을 감싸고 있던 복자의 두 손에 저절로 들어갔던 긴장이 약간 풀어진다.
“저한테서 너무 냄새가 ... 나서요.”
복자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그맣게 말한다. 정말? 복자 스스로도 그 이유 때문인지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우성은 그녀의 말에 미소로만 답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그녀를 욕실과 연결된 방 안으로 옮겨 놓았다. 가운데 길게 놓인 의자 위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그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복자 씨가 입을 만한 옷 찾아서 여기 둘게요. 씻고 나와요. 맘 편히. 나는 여기서 아주 멀~리 있는 부엌 쪽에 있을 거고, 몰래 훔쳐보는 용감한 짓은 안 할 테니깐. 안심하고요.”
그의 자상함에 녹아내리지 않을 여자의 마음은 없을 거다. 복자도 입가에서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라왔다. 그제야 우성의 마음 한 구석에 불어오던 시린 찬바람이 멈추더니 따뜻한 햇살이 비쳤다. 거짓말 같은 일이다. 한 사람의 표정 하나, 말투 하나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니.
우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고 동그란 복자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쓸쓸함에 남자는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공간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했다. 여자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으니깐.
남자는 선 채로 고개를 조금 숙여 앉아 있는 여자의 머리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넓고 호화스러운 욕실이었다. 앞뒤가 부드럽게 구부러진 유럽 중세풍의 욕조와 세면대, 멀찍이 떨어진 변기가 아니었다면, 이곳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한 참 고민했을 것이다.
은은한 빛깔로 반짝이는 거울 앞에서 홀로 물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거냐고.
까맣고 동그란 두 눈이 그녀를 또렷이 쳐다보고 있다. 별다른 대답이 없다.
말해봐. 아까 왜 그랬냐고.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거울 속 여자의 모습이 잠시 일렁이더니 뿌옇게 흩어졌다. 답답하기만 하다. 툭 하고 눈물방울이 세면대 위로 떨어져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이는데 아래에서 위로 시큼한 소스 냄새가 콧잔등을 탁치고 올라온다.
욱-
눈물이 쏙 들어갈 만큼 끔찍한 냄새였다. 특별히 신경 써서 입고 온 흰색 니트 여기저기에 꼼꼼하게 스며든 소스는 낭자한 피가 굳은 것처럼 탁한 갈색 얼룩을 띠고 있었다.
“아이씨. 쪽팔려.”
우울한 감성도 잠시, 복자는 신경질적으로 입고 있던 니트를 벗어 던졌다.
깔끔하게 정리된 부엌 안으로 근사하게 세팅된 요리들이 하나 둘 테이블 위로 옮겨졌다. 우성의 얼굴은 더없이 차분했지만, 그의 관자놀이에 작게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원래 만들기로 했던 볼로네제 라구 파스타는 양송이버섯 파스타로 변경되었다. 파스타 안에 넣어야 할 토마토소스가 엉뚱한 걸 적셔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와인 냉장고에서 이베리코 항정살 스테이크에 어울릴 만한 레드 와인 한 병을 꺼내 들었다.
" 음~ 뭔가 빠졌는데...”
우성은 아리송한 얼굴로 한 손엔 와인 병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론 아래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아!” 하고 기분 좋은 탄성을 지르며 거실 안쪽에 서 있는 장식장 문을 열어 촛대를 꺼내 들었다. 무엇 하나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 멋진 것, 귀한 것들을 모두 끌어 모아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놀라고 신기해하고 행복해하는 그 얼굴이 떠오르자, 우성의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사실, 그녀의 그런 반응을 보기 전까진 모든 게 그저 그런 것들뿐이었다.
작게 불타오르는 촛불까지, 완벽한 저녁 식사의 준비가 모두 끝났다.
쿵쿵쿵쿵.
우성의 심장이 불현 듯 요란스럽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방 쪽에서 촉촉하게 젖은 머리를 어깨까지 내린 말간 얼굴의 복자가 걸어 나왔다. 자신이 가진 옷 중에서 제일 품이 작은 상의인데도 그녀에게는 꽤 헐렁했다.
“바지는 짧은 거라 좀 맞는 거 같은데, 소매는 어떻게 안 되네요.~흐”
복자는 길쭉하게 튀어나온 소매를 흔들어 보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 모습이 마냥 어린 아이 같아서 우성은 자신도 모르게 큭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여자를... 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
우성은 여자가 서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 두 팔을 벌려 자신의 품 안으로 쏙 넣었다. 여자는 그 안으로 딱 알맞게 들어와 있었다. 복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시간을 가만히 흘려보냈다. 복잡한 생각은 잠시만 접어두기로 했다. 아까처럼 그를 밀어내고 싶진 않았다. 함께 있는 매순간마다 ‘이게 맞는 건가? 아니면 틀린 건가?’라고 생각하고 주춤거리는 바보 같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 띠리리리릭
달콤한 시간이 와장창 깨지는 것을 알리는 분명한 신호음이 들려왔다. 다시 딱딱하게 굳어진 복자를 느낀 우성이 걱정스럽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안았던 팔을 천천히 풀어낸다.
“걱정하지 말아요. 괜찮아요.”
그는 최대한 부드럽고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앞으로 벌어질 불편함을 충분히 예상했다. 아무 때나 저 문을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니깐.
현관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온 민재.
그녀는 몇 발걸음을 뗀 후에 아들의 방과 거실 입구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민재의 눈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황망히 바라보는 복자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다 헐렁한 상의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반바지를 입은 여자의 몸을 빠르게 훑고 지났다.
“어머니. 어쩐 일이세요?”
우성의 덤덤한 목소리가 위태로운 분위기를 뚫고 민재에게 닿았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행동인지 우성은 복자 앞으로 제 몸을 더욱 바짝 붙였다.
민재의 왼쪽 눈썹이 일순간에 위로 날카롭게 향하다 내려왔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니시구나.
복자의 입이 힘들게 떨어졌다. 처음으로 우성의 어머니와 만나게 된 때가 하필이면, 축축하게 젖은 머리에다가 그것도 모자라 아들의 옷을 아무렇게나 걸친 채로.
‘전 정말 오빠가 좋은 걸요~아잉’ 할 만한 풋풋한 나이도 아닌데다가. 구구절절 소스통이 어쩌구저쩌구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완벽하게 세팅된 식탁을 둘러 보았다.
우성의 실력이리라. 푹 빠졌구나. 완전히.
그녀의 입에서 보이지 않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몇 분이 더 흘렀다. 무거운 시간이었다. 입을 굳게 다문 민재는 식탁을 지나 몇 걸음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어지는 침묵은 꾸지람보다 더한 압박이었다.
우성이 복자의 손을 잡은 채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소개할게요. 여긴 김 복자 씨라고,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우성아.”
처음으로 민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차분하다 못해 싸늘했다. 시선 또한 아들 쪽으로만 향해 있었다. 그 외의 사람은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이만 가보마. 전할 얘기는 다음에 하자.”
그게 다였다. 차라리 ‘저 여자는 뭐야?’, ‘아가씨, 뭐하는 사람이야? 우리 아들이랑 무슨 관계야?’, ‘너네 둘이 사귀니? 난 반대다.’ 차라리 이렇게 말이라도 해줬다면 덜 비참했을까? 덜 모욕적이었을까?
우성이 복자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은 후, 눈을 마주치고 ‘잠깐만요.’이란 눈빛을 다정히 보낸다. 그녀는 얼굴에 드린 그늘을 급하게 걷어내고 우성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우성은 복자의 손을 풀어주며 장난스럽게 손등에 짧게 입맞춤을 했다. 남자의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묻어났다.
현관쪽으로 나가는 민재의 뒤를 우성이 따랐다.
“어머니”
문 앞에 선 민재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빛엔 별다른 감정이 읽혀지지 않았다. 익숙한 눈이다. 늘 화가 나시면 어머닌 저런 표정을 짓는다. 감정이 소거된 건조한 눈빛. 우성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에 천천히 입을 연다.
“갑자기 들이닥치신 건, 어머니세요. 저 사람 잘못이 아닙니다. 예의를 갖춰 주세요. 저한텐 중요한 사람입니다.”
아들의 목소리에 배인 단호함을 모를 리 없지만, 민재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번 주 토요일 스케줄 비워둬.”
끝까지. 마지막까지 민재는 복자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고, 문을 열고 그대로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