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여덟번째 이야기
타닥타닥타닥. 탁.
맹렬히 쏟아지던 타이핑 소리가 멈췄다. 끝이 났다. 마지막 문장이 맺어지고 마침표가 찍혔다. 전송. 완료. 글자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제이의 어깨가 조금 움찔하더니 그의 고개가 뒤로 서서히 젖힌다.
“후우우-”
지난한 전투가 끝난 뒤의 홀가분한 한숨이 제이의 입에서 노래처럼 흘러나왔다.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갈색 동공 주변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피부는 조금 푸석해 보였다.
몇 개의 달을 지나쳤을까? 몇 개의 해를 보내버렸을까?
의자에서 일어나 팔짱을 끼고 선 자세로 제이는 한쪽 벽면을 채운 여러 명의 사진과 신문 기사 스크랩을 훑어본다. 수년 동안 모아왔던 것들이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올라오는 역겨운 얼굴들이다.
한 손을 들어 올려 제일 가운데 붙은 여자의 사진을 가리킨다. 보라색 스카프를 멋들어지게 목에 걸고 있는 짧은 머리의 여자는 조금 젊은 모습이긴 하지만, 분명히 민재다. 그 위로 최 회장과 백발 머리를 가진 진희의 모습도 보인다.
제이의 손가락이 진희의 얼굴 위에서 멈춘다. 17년 전 사고가 있었던 그날. 이 얼굴을 보았다. 똑똑히.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 중 기억해야 할 몇몇 얼굴들도 빠짐없이 매달려 있다. 같은 사람이라도 사진은 여러 번 바뀌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이목구비, 분위기 하나 빠뜨리지 않고 머릿속에 저장해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민재를 중심으로 빨간 화살표가 여기저기 뻗어나간다. 그중 가장 중요하게 표시된 화살표는 차에 올라타는 우성의 모습을 가리킨다. 최 민재를 가장 처절하게 무너지게 할 중심부. 반드시 꽂아야 할 심장은 바로 아들, 우성이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는 재림의 사진도 보인다. 재림은 다루기는 꽤 피곤했으나 그럭저럭 쓸 만한 정보원이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이용 가치를 전혀 몰랐겠지만.
흥미진진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각자의 계산법으로 얼마나 영리하게 인생을 만들어 살아가는지...
신이 온대도 그들은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거다.
감탄하고 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이성 버러지들. 씨발.. 돈이면 무슨 짓도 다할 인간쓰레기들.”
소리 없는 비웃음이 붉은 입술 위에 아슬아슬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아직 소년의 티가 남아있는 말간 외모에 썩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 숨은 분노가 얼마나 큰 것 인지 와 닿는다.
적나라하게 까발려 줄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지키고자 하는 그들만의 파라다이스...
그 보잘 것 없는 실상을.
그간 여러 개의 이름으로 몇 권의 책을 내고, 그 성공을 확인했다. 모든 게 연습이고 훈련의 일부였다. 처음부터 대중의 마음을 뒤흔드는 글을 쓴다는 건 쉽진 않았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 제이는 어렸고, 버려졌고, 가진 건 몸뚱이 하나와 수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악몽 같은 기억뿐이었다. 절망은 복수를 다짐하게 했고, 상처는 마르지 않는 글을 쓰게 했다.
칼날같이 다듬었던 글로 가장 절정인 순간에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이성’의 맨얼굴을 길바닥에 집어 던져 버릴 거다. 아아. 그 짜릿함과 전율. 그것을 상상하는 순간마다 제이의 몸속에 뜨거운 피가 휘몰아쳤다. 자신이 이렇게라도 살아있음에 감사해했다.
얼마나 기다리고 꿈꾸던 순간인가. 축제가 열리는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터지는 폭죽 소리. 경멸과 조롱, 그리고 번져 나가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모든 게 그의 계획된 시나리오 안에 있었던 것들이니깐.
그런데, 어느 날 그 여자가 툭 나타났다.
자신과 우성 그 사이에.
김복자.
그 예상치 못한 변수에 남자의 머릿속은 복잡하고 아득했다. 밀어내려고 했다. 자꾸만 그녀에게 닿으려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고리들을 끊어내려고 했다. 노력했다. 그런데 그 노력이란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차가웠던 제이의 시선이 한 사진 앞에서 머물며 부드럽게 변한다. 그것은 환하게 웃고 있는 복자의 모습이다. 우성의 것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고, 그 사진 주변에는 어떤 화살표도 그어져 있지 않다. 사진 위에서 서성이던 남자의 손이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을 벽에서 떼어낸다. 그리고 그 위로 짧게 입을 맞추고 쓸쓸히 웃음 짓는다.
“어디야?”
보고 싶네.
- 갑자기 웬 전화?
복자의 목소리가 아래로 축 쳐져 있다. 기분 탓인가?
“어딘데? 집에 언제 와?”
너무 보고 싶다고.
- 응. 거의 다 와가. 큰 길 지나서 모퉁이 보여.
“ 그래? 알았어.”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지금 당장 보고 싶다.
너무 보고 싶은 당신에게 오늘은 꼭 말할 것이다. 내 기억 속 오래된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 들려주고 싶다. 처음부터 나도 괴물은 아니었다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고 변명 아닌 변명도 해 보고 싶다.
그렇지만 가장 궁금한 건.
이런 괴물을,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지 당신에게 묻고 싶다.
두렵지만, 꼭 물어보고 싶다.
더 이상 외롭기 싫다. 더 이상 혼자이고 싶지 않다.
“얼굴 확인했습니다.”
- 그래. 깔끔하게.
“네.”
후미진 골목길 모퉁이, 검은색 산타페가 어둠 속 깊이 숨죽이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아, 이런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부끄러움? 수치스러움? 모멸감? 자기 비하? 열등감? 그것도 아니면, 그냥 성질 더러움? 재수 옴 붙음?
복자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이고 힘없이 앞으로 향하는 두 발을 멍하니 바라본다. 마치 제 것이 아닌 것처럼. 터벅터벅. 다행히 집으로 가는 익숙한 길이라, 앞을 보지 않아도 걷기엔 별 어려움은 없었다. 얼굴 절반을 가린 머리칼 사이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보통 때와 다르게 그녀의 어깨가 유난히 넓고 단단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발목 아래를 지나 가끔씩 바닥도 쓸어다주는 코트의 길이감이 영 어색한 것도 이상하다.
한 시간 전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여자가 김 복자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었던 로맨틱한 저녁 식사는 한 술 뜨기도 전에, 순식간에 아침드라마 ‘어머 무서운 예비 시어머니, 나를 무시하네.’편으로 끝장나버렸다. 물론, 아무렇지 않게 “어머! 전 괜찮아요. 무서운 아줌마도 나갔으니 우리 먹으려던 파스타나 먹자고요!” 라고 털털하게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복자는 그 정도의 재주는 없었다.
왜 잘되지 않았을까?
미안하고,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성에게 그냥 따뜻하게 웃어주면 될 일이었는데.
왜 그렇게 급하고, 야멸차게 그 집을 뛰쳐나왔어야 했을까?
입으로는 연신 “괜찮아요. 저, 괜찮아요. 집에 급한 일이 있다는 걸 깜박했어요.”라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면서 말이다. 몇 번이나 그의 손을 뿌리쳤는지 모르겠다. 손을 뻗어 아무렇게나 잡히는 옷을 몸 위에 걸치고는 가방을 챙기고, 정신없이 두 발을 제 신발 안에 구겨 넣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에겐 오로지 한 가지 목표뿐이었다.
지나치게 화려하지만 그만큼 숨이 막히던 그 장소를 벗어나는 것. 익숙한 장면이다. 창립기념파티. 두 번째는 오히려 덜 아팠다.
잔뜩 일그러진 남자의 표정이 가운데 선으로 모아지면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제야 복자는 자신이 입고 있는 회색 코트가 제 것이 아니라 우성의 것임을 알게 되었다.
“참.... 가지 가지한다. 김 복자.”
그제야 온몸에 들어갔던 힘이 풀리며 엘리베이터 한쪽 벽에 쓰러지듯 기대섰다. 미안함, 안타까움, 당혹감 등등이 한데 섞인 복잡한 표정을 한 우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두 눈을 감고, 복자는 억지로 그 얼굴을 지워본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복자는 한쪽 창가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자신을 자꾸 초라하게 만드는 상황들이 싫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혼란스러운 건, 그런 상황들 앞에서 우성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가기에 급급한 자신이었다. 내가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나? 아니면 너무 가진 것이 많은 사람 앞에 서니 나도 몰랐던 숨겨진 열등감이 폭발해 버린 건가?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머릿속에 빽빽하게 들이찼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두 발을 따랐다. 아까부터 끊임없이 울리던 핸드폰을 가방 안에서 꺼내든다. 우성이었다. 전화를 받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이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잠재워질까? 그런데,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전화는 곧 끊겼고, 우성의 이름도 사라졌다.
왜 나는 그를 벌주고 있는 걸까? 그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계속 그가 나를 걱정하고, 나 때문에 애태우고, 괴롭길 바라는 이 못돼 쳐 먹은 심보를 복자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잠해진 화면위로 다시 불빛이 어리고 진동이 울렸다.
제이다. 제이.
축축이 젖어있던 복자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여우같이 두 남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주제에, 내가 어떻게 남을 원망할 수 있겠어.
- 어디야?
“ 갑자기 웬 전화?”
툭 내뱉듯이 말했지만, 제이의 목소리를 들으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 어딘데? 집에 언제 와?”
“ 응. 거의 다 왔어. 큰길 지나서 모퉁이 보여.”
- 그래? 알았어.
엥? 그게 다야?
뭔가 빠져버린 밍밍한 전화였지만, 제이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칙칙했던 복자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거기다 평소와 달리 그 목소리에 특별한 설렘이 묻어있는 기분도 들었다.
그때였다.
모퉁이를 돌아 몇 발자국을 내디딘 순간, 눈에 익숙한 어둠이 확 걷히더니 날렵한 기계음이 복자를 덮쳤다. 강렬하게 쏟아지는 헤드라이터 불빛 때문에 두 눈을 뜰 수 없었다. 두려울 정도로 밝은 어둠이었다. 할 수 없이, 두 귀로만 상황을 파악해야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지만, 그 소리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 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절대 좁은 골목길에선 들을 일이 없는 거친 엔진소리가 미친 듯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 자체로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러 장면의 그림이 느리게 눈앞을 지나쳤다. 누군가 복자를 전봇대 뒤로 밀쳐내며, 그녀와 자동차 사이로 끼어들었다. 바닥에 주저앉았는지, 벽에 부딪친 건 지, 아니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던 건지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몸에 붙어있던 감각기관들이 한꺼번에 모조리 사라진 것 같았다. 멍했다.
퍽!!!!
무언가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귓속을 파고들어왔다. 죽음의 소리였다. 복자는 자신이 내지른 비명 소리를 제 귀로 듣지도 못한 채 얼이 빠진 얼굴로 바닥 위에 쓰러진 남자 쪽으로 천천히 기어갔다. 두 팔이, 두 무릎이, 어깨 전체가 사정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바닥 위에 모로 누워있는 남자의 옆모습이 눈에 익다.
아... 아는 얼굴이다.
너무나 잘 아는, 내가 좋아하는 얼굴.
“아니...아니야... 아니지... 일..일어나봐.”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인지, 넘치는 눈물에서 흘러나오는 말인지, 아니면 막혀버린 목구멍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지.... 알 수 없는 흐느낌들이 줄줄 새어 나왔다. 두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감쌌고, 그 아래로 흥건히 묻어져 나오는 핏물에 결국 복자는 폭발하고 말았다.
“ 사..사람이... 여기.... 제발!!! 사..사람 살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