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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Oct 04. 2024

50. 다시 제 자리로.

쉰 번째 이야기 


 인적이 드문 시골길이었고, 2차선 도로 양 끝에는 흐드러진 벚꽃나무가 줄지어 있었다여기가 어디쯤인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아주 낯선 곳은 아니었다제이는 그 길 한복판에 서서 심하게 찌그러진 상태로 뒤집어진 차 한 대를 쳐다본다원래의 차가 어떤 모습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가까운 거리에 방향을 틀어 도로 반대편에 육중한 무게감으로 널브러진 덤프트럭도 보였다     



- 살아 있지는 못하겠군.    



그래제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뒤집힌 차 안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온전치는 못할거다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덤덤하게 타인의 죽음을 점치는 말투와는 달리 제이의 발걸음은 서둘러 차 쪽으로 향한다이상하게 제 가슴이 떨렸다     


남자아이가 있었다     


반파된 차체에서 뒷좌석에 앉은 아이는 용케 밖으로 튕겨나가지 않고 매달려 있었다약했지만 숨도 붙어 있었다피로 범벅된 아이의 얼굴은 제이의 가슴 한쪽을 암담하게 만들었다눈가가 뜨거워지는 데 아이는 눈물도 흘리지 않은 채 멍한 얼굴로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갈색 눈이었다제이의 눈과 닮은 갈색 눈 


    

끽이이익     



차가 급하게 달려와 멈추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보았다차에서 내린 젊은 여자는 전속력을 다해 제이가 있는 곳까지 뛰어왔다검은 머리칼이 어깨 너머까지 내려온 인상이 고운 여자였다여자는 제이를 보지 못한 건지볼 수가 없는 건지 무심히 지나쳐 운전석 쪽으로 가 남자를 끌어 내렸다운전석차 문은 어딘가로 날아가고 없어져서 여자는 별로 어렵지 않게 운전석의 남자를 밖으로 끌어 내렸다의식을 잃은 남자를 만지는 여자의 손이 서툴지 않았다미세하게 떨리고는 있었지만손놀림이 능숙했다.


      

- 저기요저기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 말하자면제이와 같은 방향 쪽에 있는 남자아이와 여자의 눈이 마주친 것이다여자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고아이는 자신의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나 살아 있어요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예상 밖의 반응이 나왔다고운 인상에 선한 눈매를 가진 그 여자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자신의 품에 안긴 남자의 얼굴만 꼬옥 안아 올렸다     


 이거 아니잖아요이봐요!!    


제이가 여자 쪽을 향해 말했다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자신보다 키가 큰 남자를 천천히 부축해 끌면서 이동했다저렇게 가버리는 건 아니겠지불안한 마음에 제이는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저기요저기요이봐요뒤에 남자애가 타고 있어요아직 살아있다고요내 소리 안 들려요!!      


제이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아직아이가 살아있다고     


그는 두 손으로 이가 꽉 물린 차 문을 열어 젖혔다그런데차 문이 제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이거 왜이래?  

   

눈앞에서 두 손을 구부렸다가 다시 펴보았다된다되잖아근데 왜 문이 안 잡히는 거야다시 한번 여자 쪽을 쳐다보았다여자가 몰고 온 차가 떠나려고 했다.       


내가 안 보이는 건가무시하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 아예 내가 보이지 않았던 건가아니면꿈인가그것도 아니라면혹시 내가 정말로 죽은 건가     

     

모든 장면이 스쳐간다

소리도.

바람도.

시간도.

모든 것이 암흑 속으로 숨는다     




....     


                         

일정한 기계음이 가까이에서 들려왔다몸 곳곳에서 불편한 통증이 느껴진다제이가 힘겹게 두 눈을 뜬다그의 눈 속에 비친 세상은 뿌옇고 흐리다그 안에 한 여자가 제이의 얼굴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갈색 눈이 초점을 제대로 잡으려고 살짝 찌푸려진다     


이 얼굴을 본 적이 있던가     


제이가 자신의 기억을 되짚는 동안검은 뿔테 너머의 여자의 눈이 빠른 속도로 붉게 변하더니문 쪽으로 뒤돌아섰다뒷모습이 하얗게 보인다     

아직누군지 모르는데... 제이의 마음이 급해졌다의식이 희미해지는 중에도 가장 간절한 이름을 불러본다     


 ....?”     


마치 꿈에서 말하듯 몽롱한 목소리였다여자의 어깨가 또 한 번 움찔했지만여자는 뒤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방을 나가버렸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처럼 희미해지면서 다시 제이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     


그의 입에서 짧게 탄성과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본 적이 있다그 얼굴아까 피 묻은 남자를 부서진 차 밖으로 끌고 나가던 젊은 여자의 그 선한 눈매기억난다그 여자다     


이 진희.            


17년 전 사고가 있었던 그날차디차게 도망치듯 돌아섰던 그 여자민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 차 안에서 모두 죽기를 바랐을 수도오히려 그 사고 자체를 여자는 감사해했을 수도그렇기에 이 진희는 제이의 기억 속에서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잠시 스치듯 찾아온 그의 의식이 다시 멀어지고 있었다.     



   

 ...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진희는 복도 벽 쪽에 머리를 기댔다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벌렁거리고몸 안의 피가 싹 빠져버린 기분이다 

    

 괜찮으세요선생님?”   

  

vip병실 복도를 지나던 간호사가 그녀에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진희는 간신히 한 손을 들어 올리며 손끝을 흔든다. “...” 성의 없는 답변 같겠지만그게 지금으로썬 최선이었다다른 사람이 지금 자신을 어떻게 보든 간에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정리되지 않은 채 엉켜버린 17년 전 그 날의 망령들이 다시 진희의 목을 조르는 이 판국에     


죽은 거 아니었어?

그 아이?

분명히 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살아있었던 걸까?    

 

그 말도 안 되는 추측이 맞는 거라면저기 누워있는 남자민수 씨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저 남자가... 그럼 서준이?     


     

  

머리를 간질이는 손길이 느껴진다기분 좋은 냄새가 난다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누군가 내 입술을 살짝 만졌다가 사라졌다멀어지는 손길이 아쉬워서 그 손이 사라진 방향 쪽으로 한 손을 올려 들었다손바닥 안으로 작은 손이 들어와 깍지를 낀다.     


 

.. 멀어지는 게 아니었구나.

마음이 놓인다     

이 손이 그 여자였으면그 여자이길그 여자여야만 했다          

어서 눈을 뜨고 그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그리고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아직 내 상태를 확인할 순 없지만 어쨌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묻고 싶은 게하고 싶은 말이 수두룩했지만 목 안에 맴돌기만 했다     



      

 삼일이나 지났는데저 녀석... .”     


 수술도 잘 됐다고 하니깐너무 걱정하지마세요아버지.”     


 “ 아니어쩌다 이런 일이...”  

   

고 영감의 눈가 주름이 더욱 깊게 파였다그 걱정스러운 시선이 두 눈을 감은 제이의 얼굴을 지나 그의 손을 꽉 맞잡고 있는 복자의 손에 닿았다그녀는 정신을 차린 이후부터 제이가 누워있는 침대 곁을 떠나질 않았다고 영감은 잠이 든 복자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옆에 있는 딸에게 넌지시 묻는다     



 "두 사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나는 잘됐으면 좋겠구나김 대리가 저 아이를 가엽게 여겨줬으면... 따뜻한 사람이 필요한 아이잖니? ”   

  

고 영감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다시 제이의 얼굴을 훑듯이 스쳤다그는 소망이 담긴 말투로 넌지시 동의를 물었지만현정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와 복자...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주변 사람들 눈에 선명히 보이는 것도 막상 당사자들이 깨닫기엔 시간이 더 걸리는 법이니깐감정이란 그런 거니깐사고 이후 제이의 곁에 조금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복자의 진심은 어쩌면 사고에 대한 죄책감일 수도 있으리라  

   

미안하기 때문에 사랑할 순 없지 않는가.

애처롭고 짠한 마음 때문에 사랑할 수도 없지 않은가.     

제이는 상처가 깊은 사람이다     



미안한 감정으로 시작된 사랑은 그에게 더 깊은 고통을 예고할 뿐이다오랜 세월 제이의 성장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현정은 더욱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또한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복자가 제이를 선택한다고 한 대도 그녀가 제이와 우성의 관계를 온전히 받아들일 순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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