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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Oct 08. 2024

52. 정면으로 부딪치다.

쉰 두번째 이야기 

        

 삼청 터널을 빠져나온 은색의 마세라티가 S자 형태로 구부러진 산길을 힘 있게 오른다널따란 주차장 안으로 들어온 차가 멈추고그 안에서 깔끔한 회색 슈트를 입은 우성이 내렸다간결하고 짜임새 있는 이목구비 위로 겨울의 햇살이 떨어진다눈이 부신지그가 가늘게 뜬 눈으로 바로 앞에 운치 있게 드리워진 한옥의 자태를 바라본다그의 어깨 위로 긴장감이 흐른다     


삼청각 매니저의 안내로 별당 안으로 우성이 막 들어서자 방 안을 채운 웃음소리가 멈췄다.     


 민 전무자네 왔는가.”     


재림의 아버지인 조 총리가 반갑게 우성을 맞이하고맞은편에 앉아 있던 민재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대충 예상을 하고 있던 터라 우성의 표정에도 여유가 보인다     


 .”     


우성은 양쪽에 적당하게 눈인사를 하고 민재의 옆자리에 앉았다   

  

 허허재림이가 늦을 아이가 아닌데미안합니다최 사장님허허허허.”     


조 총리는 그 어울리지 않는 너털웃음을 호탕하게 터뜨렸다그 소리가 고풍스러운 창호를 뚫고 복도 밖으로 경망스럽게 새어 나갔다자신의 딸에게 틈을 내주지 않던 이성그룹의 후계자가 드디어 무릎을 꿇고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니 그의 마음이 흡족할 수밖에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자란 좋은 팔자 덕에 저 젊은 놈의 빳빳한 고개가 얼마나 눈에 거슬렀는지 모른다그러나 자신이 대선 후보로 자리를 굳히니 그 어미가 속이 타들어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    

 

조 총리는 민재가 자신과 같은 과의 인간이라는 걸 확신한다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인생을 알차게 사는 몇 안 되는 훌륭한 인물이라는 걸바로자신처럼 말이다.제 딸의 인생을 위해서도 이보다 더 좋은 거래는 없었다  

   

 무슨 그런 소리를여자들이 워낙에 준비할 게 많지 않습니까.”     


민재의 말이 끝나자마자 밖에서 안으로 문이 열리며 재림이 들어왔다그녀의 얼굴이 그 어느 때 보다 반짝이고 있었다최대한 화려한 색을 빼버리고 위아래로 연한 크림색의 캐시미어 투피스를 입은 재림은 평소보다 차분해 보였다의상과 메이크업에 맞추어 그녀의 행동도 조심스러워서 보였다오늘 그녀는 조숙하고 다소곳한 상류층 아가씨 역을 택했나보다     


오늘 이 자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적극적으로 우성을 밀어붙이는 방법이 별로 효과가 없음을 깨달은 그녀는 어른들의 부추김에 못이기는 척 몸을 맡기기로 했다자리에 앉은 재림은 맞은편의 우성을 향해 짧게 눈인사를 건넸다마주한 우성의 표정이 묘하다꽉 찬 것도 아니고 텅 비어버린 것도 아닌종잡을 수 없었다.     


문 밖에서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음식 들어가겠습니다.”

     

조 총리가 앞에 놓인 찻잔을 옆으로 살짝 치우면서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문이 열리고 종업원은 테이블 위에 그릇들을 내려놓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종업원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우성이 입을 열었다젓가락을 움직이던 민재의 손이 살짝 움찔하더니 자연스럽게 아들 쪽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타이른다    

 

 민 전무이제 막 식사하려고 하는데끝나고 하면 어떨까?”     


 식사 다하고 하면더 불편을 드릴 것 같아서요조 총리님괜찮으시죠?”     


쉽게 물러날 태세가 아니다민재의 입이 미세하게 떨렸고손에 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조 총리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옆에 앉은 재림이 짧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아래로 떨군다설마 했지만방에 들어설 때부터 묘하게 흐르던 기운을 알 거 같았다그건 바로 차갑게 식은 분노였었다    

      

 감사합니다총리님우선이번에 큰 자리에 나가신 게 된 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그만큼의 역량이 있으신 분이니 꼭 달성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어허허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뜻밖의 말이 우성의 입에서 술술 나오자 조 총리는 아리송해졌다자신을 치켜세우는 말을 지금이 순간에 꺼내는 그의 속내를 읽을 수가 없어서다.   

     

 그래서 제가 도와드릴 수는 없어도 그 앞을 가로막고 싶지는 않습니다총리님.”     


지금부터 시작인 건가민재의 주먹 쥔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고방 안의 공기는 팽팽해졌다우성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우선 총리님과 관련된 지극히 사적인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 하고 재미있어하는 정보들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팩트 작업을 모두 거친 것들로 증거도 충분하고요총리님께서 기억하시는 것보다 제께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보내드릴 수 있고요아마어머님도 그러시겠죠?”     


우성은 고개를 돌려 민재의 옆얼굴을 바라본다그녀는 정면을 응시한 채로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그에 반해 조 총리는 거칠게 숨을 들이시면서 불편한 내색을 드러냈다 

    

 자네그게 무슨 말인가?”    

 

 저희가 형식적인 부부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총리님께선 득보다 실이 많으실 겁니다제가 총리님의 관한 정보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우성의 입술 끝이 묘하게 위로 올라가면서그의 시선이 재림에게 멈췄다재림의 큼지막한 두 눈 아래가 붉어지고 있었다     


 워낙 자유분방하지 않습니까오랜 세월 알고 지낸 동생인데그만한 눈치는 저도 있습니다.”       

   

그 안에 담긴 온갖 뜻이 모욕적인데도 불구하고그 말을 내뱉는 우성은 오히려 기품이 넘쳐 보였다비열한 표정 하나 묻어나지 않은 채로그는 냉정하면서도 느긋한 말투와 자세로 방 안의 공기를 장악했다금방이라도 질식할 것처럼 새파랗게 얼굴색이 변한 조 총리와 재림과는 달리옆에 앉은 민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아드님이 화가 많이 나셨군요그런데 왜 이렇게 어리석게 구는 건지이해가 안 되네결국엔 네가 마실 물에 그렇게 침을 뱉어야겠니?”     


 그런가요제가 어리석은 걸까요어머니가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되시는 건 아니고요?”      


 어헛.....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조 총리가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그 뒤를 재림이 따른다     


    




검은색 탁자 위로 하얀 원고 더미가 툭 하고 무게감 있게 떨어진다   

  

 뭔가?”     


의자에 기대 있던 최 회장이 자세를 곧추세우며 묻는다     


 폭탄.”     


고 영감의 짤막한 답변에 최 회장의 눈이 휘둥그레 커진다불길한 예감을 감지한 그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몰아치듯 고 영감의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막을 텐가?”  

  

 내가무슨 자격으로어찌됐든 내 손주를 두 번이나 죽일 순 없지 않겠나?”     


최 회장은 부드러운 손길로 조심스럽게 원고 표지를 쓰다듬었다위에는 그들의 이야기라는 글자가 힘 있게 적혀 있었다     


 이젠 흘러가는 일들을 억지로 막지 않을 걸세그러다 너무 많은 걸 잃지 않았나그 아이가 흐르는 대로 나도 따라야지.”   

  

 모든 걸 다 적었네그 안에이 안의 내용이 세상에 다 공개된다면회사도 회사지만.... 자네 딸최 사장이 무사하진 않을 거야.”     


고 영감의 말이 끝나자방 안의 침통한 기운이 더 깊게 드리워졌다그러나 최 회장은 고개를 두 번 정도 끄덕이더니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것조차 흘러가는 일이라면어쩔 수 없지 않겠나서준이가 하고 싶은 데로 도와주게그 녀석이 정면으로 주먹을 날린다면그대로 맞아야지 어쩌겠나그게 내가 편안히 눈 감을 수 있는 마지막 길인데.”     





    

 우성은 목까지 올라온 흰색 와이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정도 풀어냈다그가 잠시 눈을 감고 천장 쪽으로 고개를 드니우뚝한 콧날이 그 주변 공기를 가른다이제 겨우 하나의 벽을 건넌 것인데 그는 꽤 지쳤다그 어머니와 맞서 싸우는 일은 자신을 향해 칼을 찔러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몸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컸다자신의 존재를 부정해야 하는 일만큼 외로운 일은 없을 거다    

 

20층으로 올라가던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성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보고 싶네보고 싶어.”     


머릿속에 맴도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그래복자가 보고 싶었다지난밤병원에서 깨어난 직후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이 지워지지가 않는다그 차가움에 심장이 멎을 뻔 했다.     


미안하지만당신 말고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나를 그냥 보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우성은 모른 척했다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모르는 척이해하지 못하는 척 행동할 것이다비겁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그 대단한 어머니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들에 정면으로 부딪힐 수 있는 자신이지만그녀에게만은 그럴 수가 없다     


20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비서 두 명이 일어나 우성에게 인사를 한다그 중 한명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와 버튼을 누른 채로 그가 안에서 걸어 나오길 기다린다그러나 우성은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가만히 서 있다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으로 떨어져 있지만딱히 그것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다비서들은 우성이 평소와 달라 보여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시만요.”     



무언가 그의 머릿속을 빠르게 관통하고 사라진 것처럼석상처럼 굳어있던 우성이 재빠르게 움직여 1층 버튼을 눌렀다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비서의 얼굴이 닫힌 틈 사이로 보였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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