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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Oct 09. 2024

53. 비겁해져도 괜찮아.


어디예요?     


... 병원이에요.”     


그 사람 깨어났다는 연락 받았어요     


... 맞아요.”  

   

잠깐얼굴 좀 볼 수 있을까요?     


“..... 봐요그래요어디서 볼까요?”    

 

- 5분 뒤에 병원 앞으로 도착할 거 같아요.    

 

 복자는 우성과의 전화를 끊고약 기운에 다시 잠들어 버린 제이의 얼굴을 바라본다사고 차량의 운전자는 찾지 못했지만다행히 제이는 깨어났다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사라졌고어쩌면 영원히 찾지 못할 지도 모른다그렇게 이번 일은 그냥저냥 묻혀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복자와 우성 그리고 제이와의 관계는 다르다어떻게든 결론을 내야 했다.       


 얼굴이 안 좋아요.”     


우성의 목소리는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하다거기다 반듯하고 정갈한 이목구비는 몇 번을 봐도 덤덤해 지지가 않는다그러나 정작 복자의 안색을 걱정하는 그의 얼굴이 더 어둡고 그늘져 보였다    

 

 아니에요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복자가 짤막하게 미소를 띠며 답했다무사하다는 것은 물론 제이를 말하는 것이었고우성도 생략된 대상이 누구인지 이해했다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장이 높고 사방이 유리창인 커피숍은 쾌적하고 한산한 분위기였다그러나 정작 두 사람은 무거운 공기에 짓눌리듯 갑갑해보였다둘 사이를 꽉 채운 말할 수 없는 침묵 때문이었을 것이다처음의 안부 인사 외에는 그다음 말을 자연스럽게 잇지 못하고 있었다지금 두 사람의 마음의 거리는 아득할 정도로 멀다     


 “ ......”     


복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러자 맞은편에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던 우성이 서둘러 말하며 몸을 앞으로 가깝게 기울인다   

  

 복자씨!”     

 ?”     

 아직은말하지 말아요.”     

 어떤?”     

 지금 하려는 말.”     

 “......”     

 사고가 있었고그 친구가 다쳤고그래서 복자 씨가 놀랐어요그게 우리 관계를 끝내야 하는 이유라고 보기엔.... 부족하지 않나요이 상황은 나한테 너무 불리한데.”     



말이 조금은 빨라졌다언제나 감정을 숨기고 상대에게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선 겉으로라도 여유를 부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우성은 이번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바깥에서 커피숍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복자를 봤을 때 불현듯 오늘 모든 게 끝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여자는 자리에 앉아 이십분이 지나는 시간 동안 그녀답게 웃은 적이 없었다톡톡 튀는 이야기로 편하게 수다를 떨던 그녀가 아니었다      


    

 저기요우성씨?”     

 복자씨!”     

 나도 말하게 해줘요지금 꼭 말해야 해요더는 못 미뤄요.”     



복자는 단호했다     


 맞아요우성씨가 한 말물론 그 사고가 계기는 됐어요하지만저를 구하려다 다친 사람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모든 걸 정리하려는 것만은 아니에요그 일이 없었다면 시간은 좀 더 지나갈 수 있었겠지만언젠가 결정은 했을 거예요분명히그건 우성씨도 알고 있고저도 그리고 제이도... 모두 알고 있어요.”    

 

복자의 입에서 제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우성의 눈썹 사이가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래서요?”     


차갑게 식은 커피잔을 감싼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깐... 이제 그만 봐요그게 맞아요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거그거 더 했다간나 진짜 천벌 받을 거 같아요두려워요.”    


      

어렵게 말을 끝냈다돌아오는 우성의 대답은 없었다그는 침묵했고복자도 뒤따라 숨을 삼켰다복자는 테이블 위에 구불하게 맺힌 원목 무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우성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어서다가슴이 아팠다누구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결국엔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처절하게 확인할 뿐이다여기서 더 가면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을 거다.     



 힘들죠?”     


뜻밖의 말이 부드럽고 나긋하게 복자의 귀를 두드린다     


 ?”     


복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와 정면으로 마주쳤다아뿔싸눈이 딱 마주쳤다깊고 짙은 그의 눈을 보니 멀미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 복자씨 말이에요힘들어 보여요너무.”     


 ....”     


 난 어떤 식이든 난 복자씨 의견 따라요근데헤어지잔 말은 안 들은 걸로 할게요대신복자씨 지금 복잡한 상황 정리 될 때까진 기다릴게요먼저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이번 사고엔 내 책임도 있으니깐.”     


 ....이라뇨우성씨가요?”     


 ... 그 자리에 내가 없었던 책임내가 있었더라면 나도 그 사람하고 분명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깐이 자리엔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앉아 있었겠죠제이라는 사람?”     

 

우성은 겉으로 최대한 온화한 인상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여자의 갈등이 당연한 것이고그것은 물결의 흐름처럼 잠깐만 흐르다 말거라고추위에 떠는 작은 새처럼 온몸의 털을 뾰족하게 세운 여자를 달래줘야 했다그러면서도 동시에 불안해서 미칠 것 같은 자신의 마음을 보이지 않게 꼭꼭 숨겼다


     

그 사고가 사실은 자신의 어머니가 교사한 일이라는 게 드러나는 날엔돌이킬 수 없을 거다당장이라도 그 범인을 찾아 제 손으로 목이라도 꺾어버리고 싶었지만실상을 알고 난 이후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오히려 범인의 존재를 숨기고 있다그러면서도 복자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걸 허락할 수도 없었다비겁했다.               



세상 그 어떤 것에도 비굴해보거나 고개 숙여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자신은 늘 당당하고 떳떳했었다그러나 오늘지금 이순간그는 깨달았다자신도 얼마든지 비열하고 졸렬한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지를 말이다     



이제껏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이 손 위에 떨어졌기에 알 수 없었다.     


애끓는 감정이다

놓칠까봐 두려웠다

사라질까봐 겁이 났다

그래비겁해지자

한 번아니 두 번 세 번그것보다 더 많이 비겁해지리라   


       

특별한 대화 없이 두 사람은 서로를 한동안 쳐다보았다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입 끝을 맴도는 수많은 말들 중 무얼 먼저 꺼내야 할지꺼내도 될지 그걸 몰랐을 뿐이다두 사람을 제외한 주변의 소음이 그 침묵을 비집고 들어왔다.     



   




두꺼운 유리문이 열리고 우성의 기다란 팔 아래로 복자가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먼저 갈게요.”     

 병원까지 데려다줄게요.”     

 신호등만 건너면 되는데괜찮아요.”

 “... 그래요.”     



신호를 기다리고 걷는그 5분도 안 되는 시간도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을 우성은 속 안으로 수 천번 삼켰다지금도 자신한테 벽을 쌓아 올리는 여자인데완전히 뒤돌아 도망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담백하게 인사하고 돌아서야 했다   

  

-띠띠띠     



초록불이다     


복자는 싱긋하고 아주 짧게 웃었다그리고 뒤돌아 인파 속에 묻혀 길을 건넜다우성은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모든 게 덩어리진 채 흐릿하고 느릿하게 움직였지만그 여자만은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였다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자신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그것이 우리의 정해진 다음 순서인 것처럼.    

   

깜박이던 초록불은 마지막까지 충실히 제 일을 했다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길을 옮겼고차들이 서둘러 기지개를 폈다그동안 복자는 한 번도정말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연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실제론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우성은 자신에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시 돌아오게 할 거다빨간불을 켜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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