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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Oct 11. 2024

55. 뜨거운 고백

쉰 다섯번째 이야기 

 

어느 시인이 말했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쳤지만지금은 안다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이라는 걸그리고 가장 쓸쓸한 고백이라는 걸     



     

 깊은 밤이었다

사방이 짙은 까마귀 색깔이었다두 눈을 꼭 감은 채 몸을 모로 누운 채제이의 품속에 갇힌 것처럼 안겨 있었다누군가 그녀의 머리칼을 간지럽혔고그 위로 뜨거운 숨이 연속적으로 불었다 사라졌다잠결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온기를 느끼는 일은 꽤 감동적인 일이다     


 으으응... 잠이 안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복자가 웅얼거리듯 말했다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길이 잠시 멈추었다돌아오는 대답 소리가 없었다복자의 눈이 슬며시 떠졌다달빛이 쏟아지던 병실 안은 푸르스름한 공기로 채워져 있었다     


 내가 같이 누워서 불편해?”     


복자의 물음에 머리 위를 쓰다듬는 따뜻한 손길이 대답처럼 돌아왔다그러다 제이는 고개를 좀 더 복자의 어깨 쪽으로 숙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크크... 간지러워.”     


뒤쪽에 닿은 솜털이 바짝 섰다복자가 못 견디겠다는 듯 웃었다그 웃음소리가 새벽의 공기를 가로질렀다가 조용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여전히 그는 말이 없었다그러다제이의 얼굴이 맞닿은 자리에서 뜨겁고 축축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울고 있었다.     

흐느낌은 없었지만분명히 뜨거운 눈물 줄기가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뒤돌아 그의 얼굴을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다.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졌다.     


굳은 채로복자는 두 눈만 깜박이며 등 뒤로 와 닿는 뜨거움을 온전히 느꼈다쏟아지던 달빛의 양이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때쯤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오늘이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야이보다 더 행복한 날은 다시는 없을 거야.”      

    

가슴이 시큰거렸다그의 말 중에 어디 하나 나쁜 말이 없는데복자의 눈에 이유 없이 눈물이 차올랐다여전히 그녀의 뒤쪽으로 와 닿는 뜨거움 때문인지 몰라도 그가 한없이 쓸쓸하고 가엽게 느껴졌다복자는 자신의 허리를 두르고 있던 제이의 손을 끌어올려 양손등에 모두 입을 맞추었다그리고 달래듯 말했다진심을 다해서.     


 더 행복할거야넌 살았고빨리 회복되고 있고책도 곧 나올 거고우린 다시 집으로 돌아갈 거고그러니까 이보다 더더 행복할 날은 많아.”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뒤에서 제이가 싱긋이 웃는 게 느껴졌다그 미소는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너무 예뻐서 눈물이 날 정도로그러나 문득돌이켜보면 그때 복자는 그에게 물어보았어야 했다  

   

갑자기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넌 대체 어떤 사람이냐고왜 그렇게 떠날 것처럼나를 보내줄 것처럼 말하느냐고

     

정작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하고복자는 희망에 가득 찬 잠깐의 위로만 던질 수밖에 없었다

     

 “ 그래맞아우리더더 행복하자.”     


복자의 귓가로 조금은 밝아진 그의 목소리가 숨결처럼 흘러들어왔다그 숨결은 두 사람을 잠시 껴안았다 달빛과 함께 사라졌다지키지 못할 약속처럼 그 무게가 너무 가벼웠다 

    

         




 지난 며칠 동안 폭풍같이 지나갔던 일련의 일들이 마무리되고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그날 오전복자는 고 팀장의 호출로 그녀의 사무실 안에 앉아 있다    

 

...     


고 팀장의 새빨간 손톱이 일정한 속도로 책상을 두드린다마주 앉은 복자는 팀장의 입술만을 바라본다무슨 일인지 현정은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 김 대리몸 이제 정말 괜찮아?”     


 ... 팀장님그 말 벌써 세 번째인 거 아시죠무슨 일인데요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 내가 그랬나미안책이 다 나왔어그날 사고가 있었던 날그 밤에 나한테 최종 메일이 왔거든자기 그동안 병원에 있어서 먼저 말 못했어.”     


 잘 나왔어요?”      


제이라는 말에 복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나간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 팀장이 살짝 내려간 분홍색 뿔테 안경을 손으로 올리며 한숨을 삼킨다   

  

 “ 혹시.... 별로라서 그런 거예요저도 담당자니깐 읽어볼 수 있죠?”     

 

 “ 으응당연하지김 대리도 읽어봐야지담당이니깐그리고 작품은 잘 빠졌어흠잡을 것 없이.”     


 “ 그래요얼른 보고 싶네요.”     


복자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며 입안으로 마른침을 삼켰다제이가 수술에서 제대로 깨어나지 않았다면 자신에게 이렇게 평범한 일상은 없었을 것이다오른쪽 두 번째 서랍이 열리고 묵직한 원고 더미가 책상 위로 올라왔다기다린 것이 막상 눈앞에 보이니 더 조급해지는지 복자가 손을 뻗어 그것을 집는다이젠어쩔 수 없다는 듯 고 팀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만복자는 눈치채지 못했다 

    

첫 표지는 하얀 A4 용지에 굵은 폰트로 그들의 이야기라고만 적혀 있었다복자는 조심스럽게 그 부분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작은 소리로 제목을 읽었다.   

  

 그들의 이야기...”     


 “ 김 대리?”     


 “ ...”     


 저기있잖아그거 읽어보기 전에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어.”     


팀장의 말에 원고 위에 머물던 복자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그 어느 때보다 현정의 표정이 심각해 보여서 복자는 저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 나 스물세 살 때집에 갑자기 남자아이가 하나 들어왔었어어찌나 하얗고 예쁘장한지 인형 같더라고난 첨에 여자앤 줄 알았다니깐그런데고 녀석이 인물값을 톡톡히 하더라고어찌나 가시가 돋쳐 있던지깨진 유리병도 그것보단 덜 조심스러울 거야. 2년 지나서야 말을 하더라고난 사실 벙어린 줄 알았어그리고 좀 더 지나서 글을 쓰더라근데그 글이 ... 놀라웠어문장을 써내려가는 데 난 정말귀신 들린 앤 줄 알았다니깐남들이 겪지 못한 어마어마한 고통이 그 아이의 머릿속에 무슨 짓을 한 건지아니면 타고난 건지 모르겠지만아버진기적이라고 하셨어김 대리도 알겠지만영감님 천재적인 작가들한테 무조건무조건적으로 항복이시잖아좋은 책 만들어서 그 책 파는 걸 낙으로 아셨던 분이라 영감님 바로 그 아이 책을 만드셨지그 땐 그 꼬맹이 책은 팔려는 목적은 아니었어그런데 가까운 지인 분한테 장난스럽게 보여주고 그러다가 일이 크게 돼 버렸고결국 서점가에 뿌려졌지.”     


 “ 그래서.. 그 때 처음 소개할 때신인이지만 꽤 유명하다고 했던 말이...?”     


 맞아.”     


 그럼다른 필명이 있다는 말이세요설마그 사람은 아니죠.... 영후?”     


 어떻게.. 그걸... 안거야맞아그 고 영후.”     


 “ 세상에.....”     


복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현정이 초조하게 안경을 잡았다가 이내 벗고 메마른 눈을 비볐다    

 

 그건 필명 정도가 아니잖아요완전 사기예요사기!!! 고 영후라는 사람은 뻔뻔하게 자기 작품처럼 하고 다니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대체 제이가 원하는 게 뭐예요?”   

  

복자의 눈이 더 없이 커졌다아무리 이 상황을 침착하게 받아들이려고 해도쉽지 않았다왜 자기가 쓴 글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서또 그 사람은 얼마나 뻔뻔하게 그 혜택을 다 누리고 있는가자신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왜 이번엔 고 영후란 사람을 이용하지 않는 거죠?”     


 ... 그게 문제야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해제이가.”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이 책 때문인가요?”  

   

현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 그럼이게 단순히 소설이 아니라...”    

 

 “ 나도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싶어.”


  

아까까지만 해도 미소가 번져있던 복자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금방이라도 읽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던 제이의 원고였다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너무나 두렵고 겁났다     


 “ ... 그러고 보니... 나는 그 사람 진짜 이름도 모르네요정말 나 돈 거 아닐까요한 두 살짜리 애도 아니면서그래놓곤좋아한다 어쩐다 들뜨기만 해서는...” 

    

지금 당장 설명되지 않은 복잡한 감정이 두 눈에 눈물로 번져 흘렀다철없게 느껴졌던 자신의 지난 모습이 한탄스럽다     


 그 사람이 가진 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사랑에 빠진다면그게 정말 진정한 사랑 아닐까?”     


 그래도 좋아한다면 상대에 대해 이렇게까지 모를 순 없죠그건 변명일 뿐이에요.”  

   

 상대가 의도적으로 자기를 숨겨버리면 이쪽에선 어쩔 수 없지속아줄 수밖에물론아는 만큼 이해할 수 있겠지만 사랑이란 게 머리로 하는 건 아니잖아이해하는 거랑 사랑하는 거랑은 난 다르다고 생각해순서가 뒤바뀌었을 진 몰라도 결과는 김 대리 마음 먹기에 달렸어이제부터 알아가는 거라고그런 의미로이 원고는 그 남자야물론전부는 아니지만.”     


고 팀장은 테이블에 놓인 원고를 복자 쪽으로 살며시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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