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여섯번째 이야기
“너 제정신이냐?”
“아버지! 전 이미 아내가 있고, 제 아들도 있습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회사는 어쩔 거야? 어? 니가 내 아들로써 도리를 하나도 하지 않는다면, 내 회사의 한 귀퉁이도 가져갈 수 없다!”
“하, 아들 도리가 저랑 아무 상관 없는, 아버지가 데려다 놓은 여자랑 살려고 제 부인이랑 아들을 버리는 겁니까? 그게 아들 도리라면. 네-네- 좋습니다. 좋아요! 이제 저도 더 이상은 안합니다. 아버지는 평생 거래밖에 모르시죠. 자식 인생도 계산길 두드리시는 대단한 분시니깐요.”
“뭐야? 이 자식이. 별것도 아닌 여자 문제로 머저리같이 살 거냐? 내가 그 꼴을 그대로 볼 거 같아?”
“아버지. 제가 아버지라고 부를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겁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말씀드릴게요. 수정이는 별거 아닌 여자가 아니고, 제 아들 서준이의 엄마고, 제 하나뿐인 아냅니다. 아버지의 며느리가 될 수도 있었지만. 이젠 저도 아버지 아들이 아니니 그럴 일은 이제 다시는 없겠군요. 회사는 걱정마시죠. 언제나 호시탐탐 제가 꺼져주길 바라는 민재가 있으니까요. 그 아이는 늘 딸 도리를 다하고 살잖습니까? 불쌍하게도. 아버지와 꼭 닮았죠.”
“ 저...저.... 미친 자식이....”
최 회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서질 듯 문이 열렸고 그 뒤로 도자기 한 점이 날아와 박혔다. 산산이 조각나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복도에 서 있던 진희가 놀란 눈으로 민수를 바라본다. 방 안에선 노기가 서린 최 회장의 고함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고, 민수의 입술에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진희씨도 이제 그만하세요. 이 집 안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자기 인생을 살아야죠.”
눈물을 간신히 참고 있던 진희가 애써 고개를 돌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알고 있을까? 어른들의 뜻대로 이곳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민수. 당신 때문에 이 치욕스러움과 부끄러움을 견디고 있다는 걸.
이 집안을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불쌍하고 자존심 따윈 없는 여자로 보더라도, 그런 거 자신은 상관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사람은 바로 단 한 사람 민수. 당신이라는 걸.
여자의 감춰진 마음도 모르는, 그리고 전혀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민수는 그렇게 차갑게 돌아섰다. 긴 복도 위를 당당히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게 진희는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이게 마지막이다.
그에 대한 마음을, 혹시나 하는 기대를 접고 깨끗이 지워버리자.
몇 번이나 자신에게 했던 약속을 진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내도록. 그 약속을.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는 민수의 뒷모습을 좇았다. 시작도 없었기에 끝도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것이 아쉬웠다. 그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아주 낮고 짧게 들려왔다.
“그래. 지금이야. 이제 곧 출발해. 따라 붙어. 은색차야.”
스산하고 재빠른 말투였다. 진희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서 있는 민재를 발견했다.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민재가 기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웃음이 묻어있는 조롱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순간, 진희의 머릿속으로 방금 전에 민수가 했던 말이 빠르게 지나갔다.
- 회사는 걱정 마시죠. 언제나 호시탐탐 제가 꺼져주길 바라는 민재가 있으니까요. 그 아이는 늘 딸로써 도리를 다 하고 살잖습니까? 불쌍하게도.
눈과 입이 더할 수 없이 커진 진희, 온 몸이 떨릴 정도로 전율이 인다.
“대체.... 당신 무슨 짓 하려는 거야?”
낮지만 분노에 찬 목소리로 진희가 말했다.
“글쎄.... 결과는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운이 좋다면 당신과 나, 각자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민재는 새하얗게 질린 진희의 얼굴을 마주보며 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
“당신 미쳤어? 민수씬... 당신 오빠라고!”
“오빠라고, 그래서? 우리 그냥 각자 인생에나 신경 쓰자고.”
민재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되받아친다. 넌 대체 얼마나 삐뚤어진 사람인 거야? 진희는 민재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이렇게 시간만 낭비할 순 없었다.
막아야 한다. 막아야 해.
민재는 분명 민수를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려고 한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진희의 다리가 사정없이 후들거렸다.
간신히 난간을 붙잡고 크게 숨을 쉬었다 뱉었다.
“괜한 참견 하지 말지? 제대로 못 막을 거면 당신 인생도 꼬이는 거니깐.”
진희의 등 뒤로 따가운 민재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2층과 연결된 층계 계단과 거실 바닥 사이 공간에 오목하게 설치된 의자에 앉아 있던 고 영감이 있었다. 친구인 최 회장을 만나러 왔다가 고성이 오가는 소란스러움에 자리를 피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민재와 진희, 두 사람 모두 고 영감의 존재를 당시엔 눈치채지 못했다.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을 은색차가 미련 없이 그곳을 빠져나온다. 뒷좌석에 앉은 서준은 그게 못내 아쉬운지 입술을 앞으로 삐죽이 내밀었다.
“우리 아들, 많이 아쉽구나. 어쩌지?”
조수석에 앉은 수정이 뒤돌아보며 따뜻한 목소리로 아이의 기분을 풀어준다.
“몰라. 그냥 차에만 타고 있으라 그러고. 답답해. 잉.”
아이는 입을 쌜쭉거리며 품 안의 갈색 곰 인형을 더욱 세게 자신의 품으로 끌어 안았다. 그 모습을 백미러로 살핀 민수는 아까의 불편한 감정을 털어버리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여기보다 더 멋진 곳으로 갈 건데. 서준이가 엄청 좋아할 만한 곳.”
자신의 아버지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왔을 텐데도 전혀 내색하지 않는 민수의 얼굴을 옆에서 수정이 측은하고, 고맙게 바라본다.
“정말? 어디? 어디야? 아빠?”
“응, 가보면 알지. 기대해. 최 서준! 분명, 여기보다 훨씬 좋아할 테니깐.”
“칫.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아직 실망한 기색이 얼굴에 남아있는 남자 아이는 조그맣게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창밖의 아름다운 정원은 완전히 멀어져 뒤돌아 앉아 보아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꽤 떨어진 거리에서 아주 크고 멋진 파란색 차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 파란 차 뒤에 검은색 차가 쫓아오고 있었지만, 서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뒷좌석에 앉아 곰 인형을 안고 새로운 풍경을 내다본다. 커다란 아몬드 모양의 갈색 눈동자 위로 울창한 벚나무들이 줄지어 있다. 꽃잎이 눈처럼 흩날린다.
“엄마, 지금 겨울이야? 봄이야?”
수정이 뒤돌아 상냥하게 답한다. 아이와 그녀의 갈색 눈이 서로 닮았다.
“물론 봄이지. 벚꽃이 폈잖아. 서준아.”
“그런데 꽃눈이 내리네. 그러니깐 지금은 봄이 겨울이랑은 헤어질 준비가 안 된 거야. 그렇지?”
수정과 민수의 눈이 아주 잠시 마주치더니,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어디 뭐 행복이 대단한 것인가. 모든 게 차고 넘치던 풍족한 삶이 사라진대도 상관없었다. 그건 허울 좋은 껍데기였을 뿐.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그만큼 더 사랑하는 내 아들이 있는 지금이 진짜 사람다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때라는 걸 민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졌던 그 모든 것들을 다 벗어버린 오늘의 결정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아들, 그리고 수정아.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야. 이보다 더 행복했던 적은 없었어. 고마워.”
민수는 백미러에 비친 서준을 바라보면서 옆에 있는 수정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조그맣지만 온기로 가득 찬 손이었다. 그녀처럼. 수정은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민수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고개를 돌려 서준을 쳐다보았다.
“우리 아들, 너무 멋지다.”
그녀는 벚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때였다. 보석처럼 환하게 빛나던 아이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수정의 뒤로 거대한 트럭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럭은 너무 컸고, 너무 가까웠고 급기야 차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때부터 모든 게 느린 그림이 되었다. 잔인할 정도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장면들이 뚜렷하고 생생했다. 유리 조각이 벚꽃처럼 뿔뿔이 흩날렸고, 벚꽃보다 붉은 색이었다. 웃고 있던 하얀 수정의 얼굴이 그대로 툭 떨어져 정면으로 서준의 머리 위로 부딪혔다. 사방에서, 정확히 어디라고 말할 수 없게 분수처럼 피가 샘솟았고, 모든 게 그렇게 끝이 난 줄 알았다.
차라리 그게 끝이었다면.
수많은 욕망이 있었고, 거꾸로 뒤집힌 사랑이 있었으며, 사고를 가장한 살인이 있었다. 그 모든 게 하나로 뒤엉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시간이 흘러 굳어진 사실이 되었다. 갈색 눈을 가진 볼이 분홍빛이었던 아이는 괴물이 되었고, 그 괴물은 흘러간 시간 동안 과거의 기억 속을 맴돌며 조금도 자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