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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Oct 15. 2024

57. 너에게 기댈 어깨가 되어 주고 싶어.

쉰 일곱번째 이야기 


 전체적으로 불이 꺼진 출판사 한 파티션에 차가운 형광등 불빛만 덩그러니 빛나고 있다복자의 자리다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복자는 멍한 눈빛으로 책상 위 원고를 바라본다    

 

...     

오늘로써 서른다섯 번째 한숨이었다          


 누가 보아도 이성 그룹의 이야기였고숨기고 덮고 할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날 것이었다너무하다 싶을 정도로의 폭로였다작정하고 쓴 것이다나도 죽고너도 죽자위선 같은 것도 없었다소위 대한민국을 쥐고 흔드는 삶이란 게고작 그런 거였다     


돈을 위해서라면자신의 안전한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족을 죽이고그 주변에서도 함께 그 사실을 은폐하는 것다른 이의 죽음도 모른 척 하는 판에링 밖으로 떨어져 나간 반쪽짜리 피붙이의 죽음 따위야그리 고민할 일도 아니다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윤리그런 거 따지는 건 나머지들이 하는 짓이고     


복자가 살고 있는 세상 저 너머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들만의 리그견고하고 우아한 성벽 안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었다그 싸움에 펜대 하나로 정면으로 맞서려고 하는 제이아니 한 때는 서준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소년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로 절뚝거리면서도 복수하겠단 집념 하나로 어른이 된 아이     


아팠다그 사람이 가여워서.  

얼마나 외러웠을까.       


원고를 읽는 내내 눈물이 흘러내렸고심장이 타들어 갈 듯 아팠다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같은 기억을같은 사람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을까아름답기는커녕 잔인하고 비열한게 전부인 것들을   

 

그건 고문이고스스로를 감옥 안에 가두는 자학이다대체 얼마나 더 망가져야 그만둘 것인가이 싸움의 끝은 뭘까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징    

  

전화가 울렸다제이다전화를 선 뜻 받기가 어려웠다그의 목소리를 들었다간곧바로 눈물이 터져 버릴 것 같아서다     


 .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벨이 더 울리고 나서야 간신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받고 싶었는데끝이 결국엔 갈라졌다 

    

 여보세요?”     


- ...어디야지금 꽤 늦었는데... 11시 넘었는데... 설마 회사는 아니지     


 ...      


적당히 회사가 아니라고둘러댈 수도 있었다그런 거짓말쯤은 거짓말도 아닌 거지지난번 불량배들과 있었던 소동 때문에 제이는 밤늦게까지 복자가 출판사에 남아있는 걸 늘 걱정했다그러나 평소 같으면 술술 나오던 그 별거 아닌 거짓말들이 목 안에서 콱 막혀 나오지 않았다단 한 마디도 꺼내기 어려웠다이상한 일이다그녀가 제대론 된 대답도 못한 채 어설프게 대답을 질질 끄니그 눈치 빠른 남자가 모를 리가 없다   

  

-회사구나어서 집으로 가좀 늦어도 괜찮으니까 내일 해     


며칠 전죽을 고비를 넘기고 지금도 병원 침대에 누워 오도 가도 못하고 누워있는 주제에도대체 누가 누굴 걱정한다는 건데눈앞이 다시 뿌옇게 변했다코가 따갑고입술 아래 근육이 춤을 추듯 마구 떨렸다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남자도 말이 없었다     


읽은 거야     


담담한 목소리였다복자는 고개만 끄덕였다그래도 그 모습이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제이의 목소리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고 팀장님한테 연락받았어놀랐지미안해.  

   

미안하다니뭐가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목은 막혔지만할 말은 해야 했다     


"  뭐가 미안해너 그렇게 말하면 나 진짜 화낸다혼자서만 모든 걸 안고 가는 게 너 얼마나 옆에 있는 사람 외롭게 만드는 일인 거 알아필요 없다는 거잖아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말이잖아그게 얼마나 옆에 사람 가슴 무너지게 만드는 일인 거 너 모르니그러면서 어떻게 작가야그런 상태로 어떻게 인간의 심리어쩌구 저쩌구 하는 책들 쓸 수 가 있어내가 앞으로 제대로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그럴 거야그러니깐 앞으로 나한테는 다 말해한 톨도 숨기지 말고탈탈 털어서기억 안 나면 쥐어짜서라도 나한테는 숨김없이알았지.”   

       

숨도 제대로 쉬지 않았다속사포처럼 마구 내뱉은 말이었다입에서 나오는 말인지가슴에서 나오는 말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고정확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그러나 분명한 건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말꼭 해야 하는 말은 맞았다발개진 얼굴로 숨을 들이켰다      

    

-....... 후흐흐 하하하     


한동안 말없이 반대편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터졌다뭐야왜 이런 반응이 나와복자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폰에 바짝 들이밀며 눈을 부라린다분명히 뒤로 넘어갈 듯 웃어제끼는 소리가 맞았다  

   

 “... 뭐야왜 웃어?”      


하하하 흫흐 하하...   

   

그렇게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제이의 어색한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고마워김복자당신이란 사람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만들어나를 바보로 만들어     


목소리에 떨림이 없어 복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제이의 두 눈가는 이미 눈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눈물 줄기가 흘러내리는 만큼그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무언가로 가득 찬 충만한 느낌이었다외롭지도고독하지도쓸쓸하지도 않았다세상에 단 한 사람으로 그 모든 공간이 빈틈없이 꽉 채워지다니...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병실 복도를 서성이는 고 영감제이의 병실에 있다가 꽁냥꽁냥한 통화에 방해가 될까봐 살짝 자리를 피해 줄 겸바람도 쐴 겸 밖으로 나왔다창가 쪽으로 가서 위로 향한 손잡이를 올려 널찍한 창문을 열었다고 영감은 아이처럼 까치발을 들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차갑고 신선한 바람이 얼굴 위로 스치고 지났고그는 고개를 들어 밤의 풍경을 올려다보고 즉시 탄성을 내질렀다.  

   

 “ 이야~”     


달과 금성과 화성이 나란히 한 줄에 걸린 완벽한 그림이 밤하늘에 새겨져 있었다검푸른 바다 위에 세 개의 보석이 줄을 맞춰 반짝이는 장면은한 마디로 걸작이었다.    

 

 감사한 일이야감사한 일고맙습니다.”     


그의 입가 주름이 흐뭇하고 기분 좋게 미소를 따라 그어졌다     


 17년 전아이를 부서진 차 속에서 구해내던 날 고 영감은 절실히 누군가에게 기도를 했었다이 아이가 지금의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살지 않도록 말이다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이면서도 현재 속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아 훨훨 자유로워지기를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난 감정으로 서로를 어루만지고 기댈 수 있는 진정한 자신의 편을 만나기를얼마나 바라고 바랐던 일이었던가그 기도가 이뤄지길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청년이 되어버린 그 아이는 피투성이 여덟 살짜리 사내아이와 드디어 헤어질 준비가 되었다.          

  

고 영감의 메마른 눈가가 촉촉해졌다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차가운 도시의 바람이 훔치고 사라졌다밤의 걸작을 충분히 감상한 고 영감이 창문을 닫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의 얼굴에 남아있던 옅은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복도 끝에 진희가 서 있었다흰색 가운 대신 갈색 코트를 걸치고 있는 진희는 고 영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흠 흠... 그럼.”     


마른 헛기침을 하며 고 영감이 진희가 서 있는 옆으로 지나치던 순간다급하게 진희의 목소리가 그를 잡는다.     


 죄송합니다그리고 감..감사합니다.”     

 ....”     


고 영감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진희의 시선은 바닥으로 떨어져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듯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17년 전그 날서준이를 구해주셔서요.”     

 ... 당연한 얘기요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거요.”     

 저 빼고요저 빼곤전부 그랬겠죠고 사장님 아니었다면 저도 살인자가 됐겠죠뭐 크게 다르진... 않지만.”     


진희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입술 아래가 심하게 흔들리며 두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뜨거운 눈물 줄기가 연신 흘러내렸다고 영감은 은색으로 빛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쓸쓸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 박사당신도 이제 과거에서 그만 나와요벗어나 이제감옥에서 나오라고.”   

   

 아뇨아뇨절대 그럴 수 없어요절대로그나마 민수씨가 살아있는 건제가 그 감옥 속에 갇혀있기 때문일거예요그마저도 안 한다면어떻게... 제가 살 수 있겠어요?”     


 “ 먼저그 아이한테 용서를 빌어요안 받아 줄 수도 있겠지만일단 그것부터 먼저 해요.”     


그제야 진희의 눈이 고 영감과 마주쳤다눈물로 범벅이 된 눈이 정말그래도 되냐고 묻는 것 같았다말은 오가지 않았지만분명 그런 뜻이었다고 영감은 처음으로 그녀를 향해 눈가에 옅은 미소를 보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긍정의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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