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일곱번째 이야기
전체적으로 불이 꺼진 출판사 한 파티션에 차가운 형광등 불빛만 덩그러니 빛나고 있다. 복자의 자리다. 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복자는 멍한 눈빛으로 책상 위 원고를 바라본다.
후...
오늘로써 서른다섯 번째 한숨이었다.
누가 보아도 이성 그룹의 이야기였고, 숨기고 덮고 할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날 것이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의 폭로였다. 작정하고 쓴 것이다. 나도 죽고, 너도 죽자. 위선 같은 것도 없었다. 소위 대한민국을 쥐고 흔드는 삶이란 게. 고작 그런 거였다.
돈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안전한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족을 죽이고, 그 주변에서도 함께 그 사실을 은폐하는 것. 다른 이의 죽음도 모른 척 하는 판에, 링 밖으로 떨어져 나간 반쪽짜리 피붙이의 죽음 따위야. 그리 고민할 일도 아니다.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 윤리. 그런 거 따지는 건 나머지들이 하는 짓이고.
복자가 살고 있는 세상 저 너머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들만의 리그. 견고하고 우아한 성벽 안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싸움에 펜대 하나로 정면으로 맞서려고 하는 제이, 아니 한 때는 서준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소년.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로 절뚝거리면서도 복수하겠단 집념 하나로 어른이 된 아이.
아팠다. 그 사람이 가여워서.
얼마나 외러웠을까.
원고를 읽는 내내 눈물이 흘러내렸고, 심장이 타들어 갈 듯 아팠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같은 기억을, 같은 사람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을까. 아름답기는커녕 잔인하고 비열한게 전부인 것들을.
그건 고문이고, 스스로를 감옥 안에 가두는 자학이다. 대체 얼마나 더 망가져야 그만둘 것인가. 이 싸움의 끝은 뭘까.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징
전화가 울렸다. 제이다. 전화를 선 뜻 받기가 어려웠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간, 곧바로 눈물이 터져 버릴 것 같아서다.
음, 음.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벨이 더 울리고 나서야 간신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받고 싶었는데. 끝이 결국엔 갈라졌다.
“응? 여보세요?”
- ...어디야? 지금 꽤 늦었는데... 11시 넘었는데... 설마 회사는 아니지?
“아... 어. 흐”
적당히 회사가 아니라고, 둘러댈 수도 있었다. 그런 거짓말쯤은 거짓말도 아닌 거지. 지난번 불량배들과 있었던 소동 때문에 제이는 밤늦게까지 복자가 출판사에 남아있는 걸 늘 걱정했다. 그러나 평소 같으면 술술 나오던 그 별거 아닌 거짓말들이 목 안에서 콱 막혀 나오지 않았다. 단 한 마디도 꺼내기 어려웠다. 이상한 일이다. 그녀가 제대론 된 대답도 못한 채 어설프게 대답을 질질 끄니, 그 눈치 빠른 남자가 모를 리가 없다.
-회사구나. 어서 집으로 가. 좀 늦어도 괜찮으니까 내일 해.
며칠 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지금도 병원 침대에 누워 오도 가도 못하고 누워있는 주제에. 도대체 누가 누굴 걱정한다는 건데. 눈앞이 다시 뿌옇게 변했다. 코가 따갑고, 입술 아래 근육이 춤을 추듯 마구 떨렸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남자도 말이 없었다.
- 읽은 거야?
담담한 목소리였다. 복자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그 모습이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제이의 목소리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 고 팀장님한테 연락받았어. 놀랐지? 미안해.
미안하다니. 뭐가.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목은 막혔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 뭐가 미안해? 너 그렇게 말하면 나 진짜 화낸다. 혼자서만 모든 걸 안고 가는 게 너 얼마나 옆에 있는 사람 외롭게 만드는 일인 거 알아? 필요 없다는 거잖아.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말이잖아. 그게 얼마나 옆에 사람 가슴 무너지게 만드는 일인 거 너 모르니? 그러면서 어떻게 작가야? 그런 상태로 어떻게 인간의 심리, 어쩌구 저쩌구 하는 책들 쓸 수 가 있어? 넌! 내가 앞으로 제대로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그럴 거야. 그러니깐 앞으로 나한테는 다 말해. 한 톨도 숨기지 말고. 탈탈 털어서. 기억 안 나면 쥐어짜서라도 나한테는 숨김없이. 알았지.”
숨도 제대로 쉬지 않았다. 속사포처럼 마구 내뱉은 말이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인지, 가슴에서 나오는 말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고, 정확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말, 꼭 해야 하는 말은 맞았다. 발개진 얼굴로 숨을 들이켰다.
-....... 후흐흐 하하하
한동안 말없이 반대편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뭐야? 왜 이런 반응이 나와? 복자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폰에 바짝 들이밀며 눈을 부라린다. 분명히 뒤로 넘어갈 듯 웃어제끼는 소리가 맞았다.
“... 뭐야? 왜 웃어?”
- 하하하 흫흐 하하...
그렇게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제이의 어색한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 고마워. 김복자. 당신이란 사람,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만들어. 늘. 나를 바보로 만들어.
목소리에 떨림이 없어 복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제이의 두 눈가는 이미 눈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눈물 줄기가 흘러내리는 만큼, 그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무언가로 가득 찬 충만한 느낌이었다. 외롭지도, 고독하지도, 쓸쓸하지도 않았다. 세상에 단 한 사람으로 그 모든 공간이 빈틈없이 꽉 채워지다니...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병실 복도를 서성이는 고 영감. 제이의 병실에 있다가 꽁냥꽁냥한 통화에 방해가 될까봐 살짝 자리를 피해 줄 겸, 바람도 쐴 겸 밖으로 나왔다. 창가 쪽으로 가서 위로 향한 손잡이를 올려 널찍한 창문을 열었다. 고 영감은 아이처럼 까치발을 들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차갑고 신선한 바람이 얼굴 위로 스치고 지났고, 그는 고개를 들어 밤의 풍경을 올려다보고 즉시 탄성을 내질렀다.
“ 이야~”
달과 금성과 화성이 나란히 한 줄에 걸린 완벽한 그림이 밤하늘에 새겨져 있었다. 검푸른 바다 위에 세 개의 보석이 줄을 맞춰 반짝이는 장면은, 한 마디로 걸작이었다.
“감사한 일이야. 감사한 일. 고맙습니다.”
그의 입가 주름이 흐뭇하고 기분 좋게 미소를 따라 그어졌다.
17년 전, 아이를 부서진 차 속에서 구해내던 날 고 영감은 절실히 누군가에게 기도를 했었다. 이 아이가 지금의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살지 않도록 말이다.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이면서도 현재 속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아 훨훨 자유로워지기를.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난 감정으로 서로를 어루만지고 기댈 수 있는 진정한 자신의 편을 만나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랐던 일이었던가. 그 기도가 이뤄지길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청년이 되어버린 그 아이는 피투성이 여덟 살짜리 사내아이와 드디어 헤어질 준비가 되었다.
고 영감의 메마른 눈가가 촉촉해졌다.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차가운 도시의 바람이 훔치고 사라졌다. 밤의 걸작을 충분히 감상한 고 영감이 창문을 닫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의 얼굴에 남아있던 옅은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복도 끝에 진희가 서 있었다. 흰색 가운 대신 갈색 코트를 걸치고 있는 진희는 고 영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흠 흠... 그럼.”
마른 헛기침을 하며 고 영감이 진희가 서 있는 옆으로 지나치던 순간, 다급하게 진희의 목소리가 그를 잡는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감사합니다.”
“무..슨..”
고 영감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희의 시선은 바닥으로 떨어져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듯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17년 전, 그 날. 서준이를 구해주셔서요.”
“하... 당연한 얘기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거요.”
“네. 저 빼고요. 저 빼곤, 전부 그랬겠죠. 고 사장님 아니었다면 저도 살인자가 됐겠죠. 뭐 크게 다르진... 않지만.”
진희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입술 아래가 심하게 흔들리며 두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뜨거운 눈물 줄기가 연신 흘러내렸다. 고 영감은 은색으로 빛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쓸쓸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 박사. 당신도 이제 과거에서 그만 나와요. 벗어나 이제. 감옥에서 나오라고.”
“아뇨. 아뇨. 절대 그럴 수 없어요. 절대로. 그나마 민수씨가 살아있는 건, 제가 그 감옥 속에 갇혀있기 때문일거예요. 그마저도 안 한다면, 어떻게... 제가 살 수 있겠어요?”
“ 먼저, 그 아이한테 용서를 빌어요. 안 받아 줄 수도 있겠지만. 일단 그것부터 먼저 해요.”
그제야 진희의 눈이 고 영감과 마주쳤다. 눈물로 범벅이 된 눈이 정말, 그래도 되냐고 묻는 것 같았다.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분명 그런 뜻이었다. 고 영감은 처음으로 그녀를 향해 눈가에 옅은 미소를 보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