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이야기> 책이 완성되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한 달.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꽤 많은 일이 있었다. 제이는 퇴원을 했고, 복자의 집을 나갔다. 입원해 있는 동안, 그는 북촌 마을 언저리에 2층짜리 단독주택을 구했다. 고 영감의 한옥집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여서 복자의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 섭섭했다. 그러나 그녀보다 제이의 이사를 가장 서운해하는 건, 바로 복자의 어머니였다.
“아이고. 작가 총각, 우리 집에서 더 오래오래 지냈으면 좋았을 건데. 아쉽네. 아쉬워.”
거실 바닥에 마른빨래 더미를 하나씩 개는 복자 엄마. 그 옆에 복자 아버지는 빨간 사과를 과도로 자르면서 접시에 보기 좋게 하나씩 담아낸다. 복자는 그 중 가운데 것을 쏙 골라 먹으며 묻는다.
“왜? 한 달 하숙비 300만원 아쉬워서?”
“ 지지배야. 너는 꼭 말을 그렇게 못돼 쳐 먹게 해야겠냐? 물론 돈도 돈이지만, 집에 서른 넘은 딸년보다 풋풋하고 든든한 아들내미 있어서 얼마나 그동안 눈이 호강했는데~ 간다고 하니 섭섭해서 그렇지.”
“엄마 아들 김복기 잊으신 거 아니지? ”
“작가 총각, 그 인물에 그 능력에... 당연히 애인 있겠지?”
“아무튼 엄마 오지랖은...그런 게 왜 궁금하실까.”
엄마의 질문에 복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입안에 사과 반 조각을 오물거리면서도 괜스레 한 조각을 입 안에 더 집어넣는다. 개고 있던 수건을 잠시 옆으로 치우고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복자에게 묻는다.
“근데 말이다. 복자야. 그 작가 총각 혹시 너 좋아하는 거 아니냐? 저번에 사고 난 날도 너 구하려다 그렇게 다친 거고. 촉이 좀 그런데. 잉? 맞지? 사실대로 말해봐. 응?”
“아, 몰라. 몰라. 엄마 걔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려. ”
복자는 남일 말하듯 툭 내뱉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엄마 눈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다 억지로 번지는 미소를 구겨 넣는 어색한 표정이 다 보인다. 복자는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저년, 뭐 있어. 확실히. 예쁜 년. 고런 재주는 또 누굴 닮았대?”
“에이. 이 사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아직도 시집도 안 간 처녀한테 무슨. 그리고 여섯 살. 안 돼 안 돼. 말도 안 돼.”
복자 아버지가 가부좌를 튼 채로 앉아 고개를 심하게 도리질 친다. 끔벅하고 큰 눈을 감았다 뜨고, 입을 꽉 다물어 버린다.
“남자가 누구냐가 중요하지, 나이가 뭔 소용이야? 그리고 어리면 좋지. 늙은 게 좋아? 그리고 쟤가 나이만 서른하나지. 이 머리가 어리잖아. 이 머리가. 응?”
“그럼, 당신은 복기가 군대 제대해서 자기보다 여섯 살 많은 여자 데리고 오면 허락할거야?”
“이...이... 문디 자식이 아줌마랑 사귄대?? 당신한테 따로 연락 왔어? 이 자식을 그냥... ”
“봐봐봐...이거.. 알고 참...”
화장대 의자에 앉아 복자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렇게 빼어나게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나름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고 살아왔었다. 그런데 요즘따라 제 얼굴이 참 예뻐 보인다. 기분 탓인가? 동그란 눈은 반짝이고, 오뚝하지 않아 불만이던 작은 코도 나름 귀여워 보이고. 그나마 제일 봐줄 만한 도톰한 입술까지.
“어머머 나 왜 이러니?”
순간 더운 기가 얼굴 위로 확 올라오면서 발그스레한 두 뺨을 감싸 쥐었다. 제이와 입맞춤하던 장면이 눈앞에 스치고 지나간다.
“근데 걔는 외모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생겼는데, 행동은 참 예의 바르단 말이야. 매번 키스 아님 포옹만. 뭐래. 어우 미쳤다. 미쳤어.”
복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웃다가, 다시 도리질 치다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약간 섬뜩하기까지 하다.
- 징
핸드폰이 울렸다. 복자는 자기도 모르게 헤벌쭉 입꼬리가 귀까지 걸쳐지더니, 따스한 눈빛으로 발신자의 이름을 훑는다.
“여보세요.”
- 응, 나. 집 앞에 왔어.
“어, 지금 나가께.”
- 근데 들어가서 인사라도 드려야 하지 않을까? 이 앞까지 왔는데. 아저씨 아줌마한테...
“아? 아니. 오늘은 그냥 조용히 지나가자. 인사는 담에, 담에.”
옅은 회백색으로 감싼 북악산 너머로 해가 지기 시작했다. 붉은빛이 그 주변으로 퍼지면서 오묘한 색깔로 하늘은 뒤덮었다. 노을이 지는 풍경은 늘 사람의 마음을 넋 놓고 감탄하게 만든다.
“와, 전망 죽인다. 너무 좋은데. 조용하고 아늑하고.”
복자의 얼굴도 노을빛에 묻어나 적당히 불그스름하게 번졌다. 그녀의 뒤로 살며시 다가온 제이가 두 팔을 벌려 복자의 어깨를 껴안는다. 남자의 턱이 여자의 머리 정수리 한가운데에 닿일 듯 말 듯 하다. 복자는 자신의 가슴 위쪽에 걸쳐진 남자의 손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속삭이듯 말한다.
“글도 많이 쓸 수 있겠다. 그런데. 너? 이렇게 쉽게 집 구할 수 있으면서 왜 굳이 나한테 작업실 구해달라고 했던 거야?”
복자는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한 채로 뒤돌아 제이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너 정말 쌩 양아치 같았는데.
사실은 하나도 억울하진 않지만, 괜히 못마땅했다는 얼굴로 그를 쏘아보다가, 대책 없이 제이의 잘생긴 얼굴에 표정 관리가 힘들어진다. 그의 갈색 눈이 투명한 적갈색 빛으로 반짝이고 도톰하고 볼록한 혈색 좋은 입술이 씨익 위로 올라가 하트 모양을 만드는데.... 복자의 가슴이 벌렁거리더니 저절로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삼켜진다. 뭐야... 침은 왜 삼켜.... 주책이야. 정말. 침 삼키는 소리가 너무 커서 민망할 지경이었다.
피식- 웃으면서 제이가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왔다. 커다란 두 손으로 복자의 두 뺨을 감싸면서 속삭였다.
“좋으니까 그랬지. 당연한 거 아냐?”
복자의 콧구멍이 저도 모르게 벌렁했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좋은 걸 어떻게 숨기나. 말도 어쩜....
복자의 입술이 양옆으로 벌어지려고 할 찰나에 제이의 입술이 그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왔다. 부드러우면서도 격렬하고, 강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복자의 온몸의 털들이 바짝 올라 환호성을 질렀다. 제이는 살짝 고개를 틀어 복자의 입술을 살짝 놓았다가 다시 포근하게 덮었다.
쿵쿵쿵-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만이 귓가를 가득 채웠다. 그 탓에 2층 테라스 입구에서 이쪽을 기가 차듯 보고 있는 고 팀장을 발견하지 못했다.
“ 흠흠!!흠흠 어험! 야 엔간히 해라. 내 목에서 피 나오려고 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벌게진 얼굴로 화들짝 놀라는 복자와 달리, 제이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이 남자... 뻔뻔한 거 좀 보소.
“적당히 좀 하자. 밑에 사람들 다 왔어. 얼른 내려와. 집주인이 인사는 해야지.”
툭 내뱉듯 말하고 고 팀장은 뒤돌아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도 손을 잡은 채, 그녀의 뒤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제이의 출판 기념 자리로 고 영감님과 개미 출판 식구들이 모여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집을 둘러보고 있던 장 기자가 먼저 감탄하듯 말했다.
“와, 집 너무 좋은데요.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네.”
“그죠? 밖에 정원도 너무 예쁘고. 작가님 취향이 보기보다 은근 소녀 소녀 하신 것 같아요~”
두 눈을 반짝거리며 홍 양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제이를 쳐다본다. 그러자 갑자기 제이가 잡고 있던 복자의 손을 들어 올려 작게 입 맞추며 말한다.
“제 취향보다는 여자 친구 취향에 맞아야 할 텐데요.”
뭐야 뭐야. 미쳤나봐.
복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제대로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제이는 대체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복자와 주변 사람들을 씨익 둘러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머지 사람들도 잠시 멍해 있다가 고 영감님의 “허허허허”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다들 제정신을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