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아홉번째 이야기
고 팀장이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말한다.
“분위기 좋네.”
모두가 웃다가 고 팀장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자못 진지하다.
“이제 말해도 되겠지. 아버지. 이번만은 사장님이라 말고 아버지라 부를게요.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여러분들, 절대 호들갑 떨지 말아줬으면 해.”
다들 숨도 쉬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 임신했어. 이제 할아버지 되세요. 아버지. 축하드려요.”
.....
정적이 흘렀다.
다들 입을 벌리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소리 내진 못했다. 고 영감의 얼굴엔 웃음이라고 해야 하나, 충격이라고 해야 하나 오묘하고 기괴한 표정이다. 10초간 정적이 흘렀다.
장 기자가 제 손바닥으로 이마를 딱 치며 입을 열었다.
“어이쿠. 그 토정비결...”
“어머. 메마른 고목나무 꽃 핀다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자식 운 있다 그랬잖아요. 대박.”
“축하..드립니다.”
“축하할 일 맞죠? 축하드립니다. 고 팀장님.”
“그 외 세부적인 건 여기서 질문하면 안 되는 거죠?”
물꼬가 트이자, 너도나도 한마디씩을 거든다. 호들갑을 떨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결혼 까짓 안 했으면 어떤가, 나이 마흔에 떡 하니 임신을 했다는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고 팀장이 한 손을 허리에 대고, 삐딱한 자세로 서서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에
- 띵똥
초인종이 울렸다.
“뭐지? 또 올 사람 있어요?”
홍 양이 새벽 쪽을 향해 묻고, 새벽은 어깨를 으쓱거린다. 손을 마주 잡고 있던 제이와 복자도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묻는 눈으로 서로를 쳐다본다.
“내 손님이야.”
고 팀장이 짧게 답하며, 문을 연다. 그녀의 폭탄 발언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열린 문틈으로 아는 얼굴이 보인다. 전체적으로 약간 길쭉하고 맨질한 이마 아래 두 눈이 초조하게 사람들을 둘러본다.
“조 ..인성 팀장님?”
“아.. 김 대리.. 반가워요. 여기서 이렇게 또 뵙네요. 하하.”
경상도 억양이 녹아있는 어색한 표준말 발음은 여전했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보다 뭔가 더 공손해지고 조심스러워 보인다는 것뿐? 그런데, 이성 그룹의 홍보 팀장인 그가 왜 제이 집에? 그것도 고 팀장의 손님으로 이곳에?
헉
그러면 혹시 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야?
모두가 순식간에 똑같은 생각과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는지 더없이 커진 눈으로 조 인성 팀장을 쏘아보았다.
오 마 이 갓!
“사장님, 아니 아니, 장인어른. 인사드리겠습니다. 조인성이라고 합니다. 저..절..절. 받으시죠.”
잔뜩 겁먹은 얼굴로 조 팀장이 고 영감 발아래 넙죽 절을 했다. 너무 긴장했던 탓일까? 맨질하고 넓은 그의 이마가 사정없이 바닥 아래에 부딪히며 쿵 소리가 났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더 아프게 찌그러졌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가만히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괜히 짠해 보이기까지 했다. 쯧쯧. 얼마나 긴장을 했으면.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던 고 영감은 입가에 깊숙한 주름을 보이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이거 세기의 결혼이구만. 내 딸은 고현정인데, 자네는 조인성이라고. 허허. 참. 재밌네.”
“네네. 장인어른. 현정 누님 모시고 정말 잘 살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바닥에서 고개를 들어 올린 조 인성 팀장, 얼굴에 혈색이 돌며 연신 감사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고 팀장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가 씩 웃는다.
마지막 장까지 넘어간 책, 그리고 그것을 어루만지는 희고 섬세한 손길.
그리고 길게 토해내는 원망 같은 한숨.
- 벌컥.
급하게 문이 열리면서 새파래진 얼굴로 이 실장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주변의 공기 속에 냉기가 흐른다. 그의 눈이 책상 위에 놓인 책 한 권에 꽂힌다.
“저...전무님..지금 밖에 기자들이..”
“응”
우성은 굳은 얼굴로 차갑게 말문을 막아버렸다. 표정 없는 얼굴엔 생명력도 꺼져버린 것 같다. 마주한 이 실장이 대려 더 불안하고 다급해진다.
“어머닌?”
우성이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은 책상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오늘 일본에서 돌아오십니다. 오전 비행기로. 정오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실 겁니다.”
우성은 시간을 확인했다. 11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 우선. 공항으로 가지.”
“ 차 대기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성이 뒤쪽 옷걸이에 걸려 있던 짙은 감색 정장 쟈켓을 걸치고, 가운데 단추를 잠갔다.
안에는 흰색 와이셔츠 아래 이성적인 블루 넥타이가 칼날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절제된 그의 움직임들이 연결된 하나의 그림처럼 보였다. 단정한 이목구비에 내려앉은 그늘이 더욱 그를 신비롭게 보이게 하였지만, 이번 위기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도 긴장하고 있었다.
태풍이 몰아치자, 우성 안에 숨었던 제왕적인 면모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그의 참모습이었다. 검은색 세단 뒤에 비친 우성의 옆얼굴이 이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나누고 싶은 평범한 일상의 행복은 이제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고.
삼촌의 인생을 앗아간 17년 전 사고가 바로 자신의 어머니, 민재의 작품이라고?
어머니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이어지는 다음 질문의 답은 뻔했다. 너무나 확실한 답이 뒤따라 나온다. 바로 자신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식인 ‘우성’을 내세워 어머니 본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다. 이성 그룹을 통째로 온전히 먹기 위해선 민수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을 테니깐. 어떤 의미에선 우성, 그도 공범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알고, 모르고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게 드러난 이 상황은 우성에게 충격이기 전에 위기였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게 바닥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주먹 쥔 우성의 손아귀로 핏줄이 서더니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에 반해 그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침참했다.
공항 안은 이미 엄청난 규모의 기자단들의 취재 열기로 뜨거웠다. 입국 게이트 쪽을 에워싼 수 십대의 카메라들은 재벌의 민낯을 여과 없이 담아내기 위해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이 얼마나 우습고 재미있는 구경거린가?
나라 안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도 결국엔 고개 숙이게 만드는 강력한 ‘이성그룹’의 충격적인 친 남매간의 살인 교사.
동생이 오빠를 밀어내려고 꾸며낸 교통사고. 17년 전 이성 그룹의 후계자였던 민수의 끔찍한 사고와 그 이후 식물인간이 된 사건은 세간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덤프트럭 운전사의 음주운전으로 이성의 황태자 인생이 하루 아침에 시궁창에 처박힌 당대의 사건은 처음의 파장과 달리 어느 날,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잠잠해졌다.
사람들은 원래 패배자의 말로에 대해선 늘 그렇듯 불쌍해하다가 곧 잊어 버렸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살인 교사의 연장선에 있었던 거라면. 사건을 은폐하고 모든 걸 덮어버리기 위해 뿌려진 돈의 무게만큼 민재의 영역이 확고해진 거라면. 우성의 목 안으로 뜨겁고 울컥한 것이 빠르게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게이트 문이 열리고, 드디어 민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 열린다... 최 사장이다!”
“ 얼른 잡아. 얼른 잡아.”
“ 최 민재 사장님. 화제의 신간<그들의 이야기>읽어 보셨습니까?”
“ 친오빠를 살해했다는 내용이 맞습니까?”
“ 조금이라도 답변해주십쇼. 최 민재 사장님.”
“ 그동안 이성 그룹의 후계 승계를 위해 전방위적으로 주가를 조작하셨다는 게 맞으십니까?”
“ 이번 사건이 가져올 이성 그룹의 위기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
구름떼처럼 몰려든 취재진들은 길을 막아서고 한가운데로 민재를 몰아붙였다. 그녀의 주변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과 비서진들의 얼굴과 몸이 심하게 일그러지고 뭉개졌다. 그 난리통 속에서도 기품이 흘러넘치는 여유가 느껴지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바로 최 민재. 그녀는 조금도 휘거나 구부러지지 않았다. 고개를 꼿꼿이 들어 앞을 응시하며 미소짓고 있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준비된 검은색 세단 안으로 간신히 몸을 피한 민재, 바로 옆에 앉은 우성을 잠깐 쳐다보더니 팔짱을 끼고 눈을 감는다. 그나마 남아있던 미소의 흔적도 완전히 사라졌다.
“바로 회사로 가지. 회의 소집하고.”
“네. 사장님.”
조수석에 앉은 비서가 짧게 답하며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낸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차는 영종 대교 위를 지나고 있었고, 우성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신경 꺼. 별스럽게 공항까지 왜 나와? 별일 아니야. 기자들 달라붙는 거 하루 이틀이야? 그깟 책 한 권에 흔들릴 것 같으면 이성이 아니지.”
“그깟 책 한 권.... 이라고 생각하세요? 지.금.도.?”
민재의 얼굴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려 우성의 눈과 마주친다. 시뻘겋게 핏발이 달아오른 두 눈엔 절망만이 담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