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네번째 이야기
복자가 병원 로비에 들어섰을 때 대형 스크린화면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환자와 보호자, 의사, 간호사들 그 앞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흥미로워 보인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그 틈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넣었다.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온다.
“아...”
요즘 한창 잘 나가는 대표 베스트셀러 작가 세 명과 정신과 의사 셋의 토론 장면이었다. 화면 아래로 <대중문화 속에 녹아든 인간의 심리를 파헤친다>라는 자막이 띄워졌다.
“의사가 병원에서 환자를 고쳐야지. 쯧쯧. 요즘은 퍼뜩하면 텔레비전에 나가는 게 유행이야.”
섞여 있던 사람들 중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툴툴거렸다. 그는 흰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나온 이들 중 아는 얼굴이 있는 것 같은 눈치다. 복자도 화면에 나오는 세 명의 작가가 눈에 익었다. 당연히 그녀가 하는 일이 출판업 쪽이다 보니 이름 좀 날린다하는 작가들의 신상 프로필은 줄줄 외우고 있다. 그중 가장 반가운 얼굴은 ‘백작가’님이었다. 다행히 잘 나가는 작가들 틈에 그가 끼여 있어 ‘개미출판’의 면이 서는 기분이 들었다.
통통하게 살이 차오른 얼굴 아래로 수줍게 보이는 핑크색 보타이가 깜찍해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 한 무더기 일 텐데 사회자는 백 작가님에게 별로 발언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입만 달싹이면서 침만 묻히는 그가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론 귀여워 보였다.
붉은색 립스틱을 꼼꼼히 빠른 여자 사회자가 바로 옆자리에 앉은 깔끔한 인상의 남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고 영후 작가님, 언제나 출간하시는 작품마다 인간 내면의 심리묘사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하시는데, 매번 그 영감을 어디서 주로 얻으시나요?”
사회자의 질문이 끝나자, 화면은 미끈한 미소를 짓는 눈이 가느다랗고, 코가 뾰족한 남자의 얼굴로 채워졌다. 바로 이 사람이다.
고 영후.
그는 한국에서 현존하는 추리소설 작가 중 가장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는 자다. 한국의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별칭을 가진 그의 책은 출간할 때마다 언제나 최고의 판매부수를 자랑한다. 10만부라도 찍으면 대박이라고 하는 요즘 같은 출판 불황에도 그는 언제나 고정적으로 두터운 고정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어 늘 50만부는 기본이다. 이제 겨우 마흔 줄에 접어든 그는 타고난 천재성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자다.
3년 전, 그의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줄줄이 그의 다른 책도 영화, 드라마 제작에 들어갔다. 복자도 그의 모든 책을 읽어 보았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세밀한 인간의 심리 묘사까지... 잔인함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해서 글을 읽다가 한 번씩 속지에 인쇄된 작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곤 했었다. 혹시 이 사람 머리가 어떻게 된 사람이거나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 말이다.
복자는 서둘러 엘리베이터 안에 올라탔고, 7층을 눌렀다. 그리고 문득. 갑자기 ‘팡’하고 머릿속에서 터져버린 생각의 연기들이 피어올랐다.
고 영후 작가의 글.
왜 그동안 몰랐을까?
누구의 글과 굉장히 닮아있다.
겹쳐진 글자와 문장들이 빠르게 복자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7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복자는 얼어붙은 듯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길을 잃고 어디론가 헤매고 있었고, 잠시 후에 다시 문은 닫혔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씌여졌다가 지워졌다.
아니야 말도 안돼.
설마, 그럴 리가.
어떻게 제이 글을 의심할 수가....
연습한 거겠지. 고영후라는 작가를 좋아하겠지. 좋아하다 보니 비슷해지고 닮아진 거겠지. 그래, 그럴 거야.
“복자씨? 김 복자씨?”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아! 네? 네!”
“7층 가는 거 아니었어요? 여기 훨씬 윈데.”
“아, 네. 감사합니다.”
얼떨결에 인사를 하며 복자는 그제야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백발의 중년 여성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흰색 가운을 입고 있는 그녀는 보기 드물게 머리가 새하얀 백발이었다.
“ 아! 근데 제 이름을 어떻게...”
“ 반가워요. 난 우성이 외숙모예요.”
“ 아....아.... 안녕하세요.”
참..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복자는 머리칼이 아니라 머릿속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가운 왼쪽엔 ‘이진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불편하고 갑갑한 상황이 어서 끝나주기를 바라며 복자는 내려가는 숫자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것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한 번에 열댓 명씩 넘게 타던 병원 엘리베이터 안에 지금은 복자와 진희 두 사람뿐이다. 하필이면.
“703호 환자. 상태 많이 좋아져서 다행이에요. 걱정 많이 했죠?”
담당의가 아니면서도 703호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고, 복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을 우성의 외숙모라고 소개하는 백발의 중년 여자. 이건 또 무슨 경우지? 복자는 얼떨결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간신히 꺼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두 남자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신의 처지를 들킨 것 같아 괜히 속이 조마조마했다.
“ 7층이네요. 잘 가요.”
내리면서 복자는 뒤돌아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반짝이는 은색 빛의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있는 여자의 흰 머리칼은 묘하게 어울렸다. 굳이 짙은 색으로 염색하지 않고 백발을 그대로 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남들과는 다른, 무리 속에 섞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들어가지 않으려는 탁월한 고독함. 일단은 그렇게만 생각하기로 했다.
혹시 잠들어 있는 걸 방해할까봐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었다. 제이의 얼굴이 복자 쪽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예쁘다. 저렇게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구나. 괜히 복자의 마음 한쪽이 시큰해진다. 우성도, 고 영후라는 이상야릇한 작가도, 엘리베이터 속 백발 여자도 한꺼번에 모두 지워졌다. 지금 이 공간에 있는 우리만 생각하는 것만도 벅찼다.
“깼네?”
“응. 바람 쐬고 왔어? 여기 답답하지?”
“응? 아니... 우성 씨 잠깐 만나고 왔어. 얘기하고 왔어.”
“아... 창문 좀 열어줄래?"
복자는 우성을 만나고 왔다는 말을 숨기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었다. 제이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고,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다. 손가락 두 마디가 들어갈 정도의 틈으로 창문을 열었다. 그 틈으로 차갑지만 신선한 1월의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TV 켜 줄까?”
“그래.”
제이는 한쪽 팔을 머리 뒤로 받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늘한 바람이 복자의 어깨선에 닿은 머리칼을 기분 좋게 만졌다 사라졌다. 화면이 켜지고, 1층 로비에서 보았던 토론 장면이 이어서 나왔다. 다시 고영후 작가의 얼굴이 클로즈업됐다.
복자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누워있는 제이의 표정을 살핀다. 오후의 햇살 때문에 더 투명해진 갈색 눈이 아무 감흥 없이 텔레비전 화면을 따라 움직인다. 어떤 변화도 없었다. 평온하고 차분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복자의 시선을 느꼈는지 갈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여자 쪽으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도톰한 입술이 입꼬리를 올리며 양끝으로 펴진다. 남자는 침대에 누운 채로 곁에 서 있는 복자의 가까운 손을 꼬옥 잡아 쥔다. 따뜻했다. 그 손이.
“저 사람 알아? 고 ..영후라고?”
“응. 알지.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잖아.”
“응.”
“뭐야. 흐. 나도 책은 읽는다고.”
“응. 그렇겠지.”
복자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에둘러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엉뚱했던, 그를 의심했던 자신의 생각을 감춰야 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대체. 뭐가 궁금한 건데? 뭘 확인하고 싶은 건데?
그때였다.
복자의 손을 맞잡고 있던 제이의 팔이 자신 쪽으로 그녀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녀의 뺨이 제이의 오른쪽 어깨 근처에 머물렀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복자의 양 뺨을 감싸듯 들어올렸다. 두 사람은 입술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응. 그래. 맞아. 고장 난 라디오처럼. 무슨 걱정 있는 거야?”
남자의 숨결이 복자의 얼굴에 닿았다. 그게 보드랍고 따뜻했다. 복자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천천히 도리질 치며 속삭였다.
“아니. 걱정 안 해. 아무것도.”
진심이다. 걱정 같은 거 하지 않기로 그가 깨어난 순간, 신과 약속했었다.
“그래. 착하네.”
제이는 고개를 숙인 그녀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그 아래 콧방울로, 더 내려가 여자의 입술 위로 안도의 숨결을 불어 넣었다.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고. 그동안 지치고 힘들었을 두 사람은 위로의 포옹과 입맞춤을 오랫동안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