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한번째 이야기
이 실장의 보고가 끝이 나자 우성이 등을 돌려 바깥을 향해 섰다. 복잡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서인지. 그는 굳은 얼굴로 말없이 20층 사무실 밖 아래를 내려다본다. 푸르스름한 스모그가 끼어있는 도심의 풍경이 답답한 그의 가슴을 더욱 조였다.
보고를 마친 이 실장은 오늘따라 그런 우성을 보기가 더욱 힘이 들었다. 차라리 화를 냈더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다시 정확하게 조사해보라고 소리라도 질러주었으면. 그의 마음이 이렇게 불편하지는 않을 텐데.
그가 복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나 잘 아는 이로써 방금 전에 그가 말한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복자와 우성의 만남이 쉽진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민재 그러니깐 우성의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었다. 이쪽에서 떠도는 최 사장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긴 했지만, 풍문으로 아는 것과 직접 대면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복자의 존재는 그녀에게 있어 아들의 발 밑에 붙은 하찮은 바퀴벌레와 다르지 않았다.
우성이 고개를 돌려 입을 뗀다. 건조한 목소리였다.
“이 실장님.”
“네. 전무님. 말씀하시죠.”
이 실장이 답했다. 그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 싶었다.
“일단 이 일은 제가 처리할 테니. 더 이상 캐내진 마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전무님. 아... 그리고 말씀드릴 일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이 실장의 말에 우성이 이 실장을 향해 몸을 돌아섰다.
“저희 말고도 다른 쪽에서도 김복자씨 사고에 대해 알아내려고 했었습니다.”
“다른 쪽? 누굽니까? 기자?”
“아... 확실친 않지만. 회장님이십니다.”
“.. 회장님이요? 할아버지가 왜... ”
“그건 아직... 아직 자세한 사항은 아니지만, 회장님이 요근래에 최 사장님을 계속 지켜보고 계신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아...그래요.”
분명,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경계하고 있다. 우성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말을 머릿속에 어지럽게 풀어놓았다. 가족이라... 핏줄이라... 그런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곳이 바로 그가 사는 세상이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우성은 늘 궁금했다. 그 질문의 종착점은 항상 어머니였다. 따뜻하진 않았지만, 어머닌 다른 방식으로 정성을 들여 자신을 키웠다. 사실은, 그랬을 거라 믿고 싶은 스스로의 위안이 더 크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나눈 기억은 별로 없지만, 그런 것들은 어머니 외에도 해줄 수 있는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자랐기 때문에 서운하진 않았다.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어머니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회사의 주인이 되지 못한 것에 늘 괴로워하셨다. 아내로써, 딸로써, 그리고 어머니로써의 삶 같은 건, 원치 않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우두머리가 되길 원했고, 그걸 막아서는 이들은 그 누구라도 그녀의 적이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더욱 난폭해지고 교활해지고 잔인해졌으리라.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제거하는 데 익숙했을 거다.
우성은 그런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하고, 또 이해하려고 애썼다. 남들이 제 어머니에 대해 그 어떤 끔찍한 평가를 한 대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 외삼촌을 식물인간으로 만든 게 혹, 그 여동생의 계획된 범죄라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었지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자신은 생각했다. 사방이 적인 어머니의 삶이 고독해질까봐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 하나뿐인 아들인, 자신이라도 그런 어머니의 든든한 편이 되고 싶었다. 끝까지 그녀를 믿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이 덜 외로워질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러나 이건 아니다. 더 이상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
단지 자기 아들에게서 떼어 놓기 위한 경고였는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도가 있었는지...
만약 일이 잘못됐더라면 자신은 어떻게 살았겠는가.
- 우성아... 내 말은... 저 아가씨를 위해서야. 넌, 너네 엄마를 몰라.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이번엔 운 좋게 여기서 끝났지만, 다음번엔 저 아가씨가 수술대 위로 올라갈 수도 있어. 그것도 운이 좋은 경우겠지만.
외숙모의 말이 떠올랐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퍼진 소독약 냄새가 났다. 작게 사각거리며 움직이는 인기척이 들리고, 그 소리가 아주 조심스럽다. 그 조심스러움이 고마워서 가슴이 따끈해진다. 의자에서 잠시 일어났다가 다시 앉는 소리가 난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후- 작게 한숨을 쉰다.
탁. 몇 장 넘기다가 표지를 덮어버렸다. 그러더니 침대 쪽에 몸을 기대어 손을 뻗어 간질이듯 제이의 손을 스쳤다 만졌다 다시 떠난다. 웃음이 난다. 눈을 번쩍 뜨고 싶지만, 조금 더 이 상황을 즐기고 싶다.
누군가가 나를 작은 아기처럼 보살펴주는, 아늑하고, 나른한 이 기분.
그렇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제이가 제 손에 들어온 여자의 손을 힘주어 잡는다. 갑자기 들어간 힘에 여자의 손이 놀라 움찔했지만, 억지로 빼내려 하진 않았다.
“깼..어?”
반쯤 보이던 여자의 하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제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 얼굴이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이 얼굴만은 새하얗게 빛나서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갈색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아래로 기분 좋게 휘어진다. 놀란 표정으로 얼어있던 복자의 얼굴이 그제야 살겠다는 표정으로 핏기가 돈다. 그러더니 눈앞에 보이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마주 잡더니 동그란 두 눈에 물기가 어린다. 두터운 성벽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여자의 몸 속 어디에선가부터 엄청난 양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튀어 나왔다.
다행스러움. 걱정. 불안. 분노. 미안함. 고마움. 안타까움. 애타는 마음. 정의 내릴 수 없는 그 모든 감정들이.
내가 이 사람을 좋아했구나.
생각보다 더 많이 내가 이 사람을 좋아했었구나, 아니 좋아하는 구나.
어쩌면 사랑하는구나.
내 마음을 내가 알아버렸을 때 느끼는 그 통쾌한 전율과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그러나 그녀의 입 밖으론 뜻밖에 거친 단어들이 볼 폼 없이 튀어나와 버린다.
“미... 및...미친 새끼야!! 너 다음번에 또 그러면 너 진짜 죽여 버릴...꺼야!!”
말투는 거친데, 금방이라도 울음이라도 쏟을 것처럼 그 목소리가 떨린다.
“그래그래.. 알았어.”
제이는 복자의 허리를 자신 쪽으로 감싸듯 안았다. 두 팔이 뻐근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통증보다 지금 이 여자를 안지 않으면 더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자를 껴안고 우는 아이를 달래듯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안 미... 하나도 난 안 미안해......너한테 안 미안하다고...”
복자의 몸이 반쯤 기울어 제이의 품에 안기고, 두 뺨에 놓인 손이 자연스레 그의 목둘레를 감싸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쉬지 않고 계속 투덜댔다. 마음속으론 미안해, 미안해, 너무 미안해.. 하지만, 자꾸 입으론 그 반대의 말만 튀어나왔다. 왜 이렇게 심술궂게, 못나게 구는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그래.. 맞아. 미안할 일 없어. 당신.”
“그래 이 자식아. 너한테 나.. 하나도 미안하지 않아. 아냐고...”
“그래그래. 알아."
"그러니까... 다시는 그렇게 뛰어들지 마. 목숨 그렇게 함부로 하지 말란 말이야. ”
그녀는 제이의 어깨 위에 안겨있던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말한다. 그건 명령이고 경고이자, 이 남자에게 꼭 받고 싶은 약속이었다.
함부로 다치지 말길.
그래서 함부로 죽지도 말길.
제이의 목을 감싸고 있던 복자의 두 손이 그의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온다. 그 손이 따뜻하다. 온기. 그래. 이게 사람의 온기라는 거지. 소중히 여기는 마음. 누군가가 나를 소중히 여기고 다칠까, 잘못될까 염려하는 마음. 제이의 어깨 위로 닿은 온기가 피부를 뚫고, 수만 갈래의 핏줄로 갈라져 그의 몸 전체를 어루만졌다. 부드럽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절대 놓치지 않을 거다. 이 따뜻함을.
몰랐으면 영원히 몰랐을 테지만, 이젠 더 이상 무를 수 없다.
“함부로 아니야. 당신이라서 그랬어. 너니깐. 나도 목숨은 하난 거 알아.”
제이의 갈색 눈동자 속에 여자의 얼굴이 비쳤다. 맑게 빛나던 그 모습이 출렁거린다. 남자의 눈가가 붉어졌다. 감정은 이런 거다.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게 가능해진다. 차갑게 얼어붙은 가슴에 순풍이 불더니 모든 게 빠른 속도로 녹아버린다. 제이는 복자의 양 손 위에 솜사탕처럼 폭신한 입맞춤을 했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복자의 눈이 행복으로 빛난다. 눈물은 흘렀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였다.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너한테 나 하나도 안 미안해 할 거야.”
그녀의 입술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애써 참으려 실룩거린다. 그 모습이 참 어린애다. 뭐가 그렇게 쑥스러운지. 제이는 살짝 미소 지으며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으며 속삭인다.
“제발.. 그래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