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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Oct 07. 2024

51.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쉰 한번째 이야기 

  

 이 실장의 보고가 끝이 나자 우성이 등을 돌려 바깥을 향해 섰다복잡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인지아니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서인지그는 굳은 얼굴로 말없이 20층 사무실 밖 아래를 내려다본다푸르스름한 스모그가 끼어있는 도심의 풍경이 답답한 그의 가슴을 더욱 조였다.     



보고를 마친 이 실장은 오늘따라 그런 우성을 보기가 더욱 힘이 들었다차라리 화를 냈더라면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다시 정확하게 조사해보라고 소리라도 질러주었으면그의 마음이 이렇게 불편하지는 않을 텐데     


그가 복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나 잘 아는 이로써 방금 전에 그가 말한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복자와 우성의 만남이 쉽진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민재 그러니깐 우성의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었다이쪽에서 떠도는 최 사장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긴 했지만풍문으로 아는 것과 직접 대면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복자의 존재는 그녀에게 있어 아들의 발 밑에 붙은 하찮은 바퀴벌레와 다르지 않았다    


      

우성이 고개를 돌려 입을 뗀다건조한 목소리였다     


 이 실장님.”     

 전무님말씀하시죠.”     


이 실장이 답했다그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 싶었다     


 일단 이 일은 제가 처리할 테니더 이상 캐내진 마세요.”     

 .. 알겠습니다전무님... 그리고 말씀드릴 일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이 실장의 말에 우성이 이 실장을 향해 몸을 돌아섰다     


 저희 말고도 다른 쪽에서도 김복자씨 사고에 대해 알아내려고 했었습니다.”     

 다른 쪽누굽니까기자?”     

 ... 확실친 않지만회장님이십니다.”     

 “.. 회장님이요할아버지가 왜... ”     

 그건 아직... 아직 자세한 사항은 아니지만회장님이 요근래에 최 사장님을 계속 지켜보고 계신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요.”     


분명할아버지는 어머니를 경계하고 있다우성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말을 머릿속에 어지럽게 풀어놓았다가족이라... 핏줄이라... 그런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곳이 바로 그가 사는 세상이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우성은 늘 궁금했다그 질문의 종착점은 항상 어머니였다따뜻하진 않았지만어머닌 다른 방식으로 정성을 들여 자신을 키웠다사실은그랬을 거라 믿고 싶은 스스로의 위안이 더 크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나눈 기억은 별로 없지만그런 것들은 어머니 외에도 해줄 수 있는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자랐기 때문에 서운하진 않았다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어머니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회사의 주인이 되지 못한 것에 늘 괴로워하셨다아내로써딸로써그리고 어머니로써의 삶 같은 건원치 않는 여인이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우두머리가 되길 원했고그걸 막아서는 이들은 그 누구라도 그녀의 적이 되었다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더욱 난폭해지고 교활해지고 잔인해졌으리라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제거하는 데 익숙했을 거다     

우성은 그런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하고또 이해하려고 애썼다남들이 제 어머니에 대해 그 어떤 끔찍한 평가를 한 대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 외삼촌을 식물인간으로 만든 게 혹그 여동생의 계획된 범죄라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었지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자신은 생각했다사방이 적인 어머니의 삶이 고독해질까봐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하나뿐인 아들인자신이라도 그런 어머니의 든든한 편이 되고 싶었다끝까지 그녀를 믿고 싶었다그래야 자신이 덜 외로워질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러나 이건 아니다더 이상은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  

단지 자기 아들에게서 떼어 놓기 위한 경고였는지아니면 그 이상의 의도가 있었는지...

만약 일이 잘못됐더라면 자신은 어떻게 살았겠는가.     


우성아... 내 말은... 저 아가씨를 위해서야너네 엄마를 몰라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이번엔 운 좋게 여기서 끝났지만다음번엔 저 아가씨가 수술대 위로 올라갈 수도 있어그것도 운이 좋은 경우겠지만          


외숙모의 말이 떠올랐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퍼진 소독약 냄새가 났다작게 사각거리며 움직이는 인기척이 들리고그 소리가 아주 조심스럽다그 조심스러움이 고마워서 가슴이 따끈해진다의자에서 잠시 일어났다가 다시 앉는 소리가 난다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작게 한숨을 쉰다     


몇 장 넘기다가 표지를 덮어버렸다그러더니 침대 쪽에 몸을 기대어 손을 뻗어 간질이듯 제이의 손을 스쳤다 만졌다 다시 떠난다웃음이 난다눈을 번쩍 뜨고 싶지만조금 더 이 상황을 즐기고 싶다 

    

누군가가 나를 작은 아기처럼 보살펴주는아늑하고나른한 이 기분.     


그렇지만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제이가 제 손에 들어온 여자의 손을 힘주어 잡는다갑자기 들어간 힘에 여자의 손이 놀라 움찔했지만억지로 빼내려 하진 않았다     


 ..?”     


반쯤 보이던 여자의 하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제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 얼굴이다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이 얼굴만은 새하얗게 빛나서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갈색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아래로 기분 좋게 휘어진다놀란 표정으로 얼어있던 복자의 얼굴이 그제야 살겠다는 표정으로 핏기가 돈다그러더니 눈앞에 보이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마주 잡더니 동그란 두 눈에 물기가 어린다두터운 성벽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여자의 몸 속 어디에선가부터 엄청난 양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튀어 나왔다     


다행스러움걱정불안분노미안함고마움안타까움애타는 마음정의 내릴 수 없는 그 모든 감정들이     


내가 이 사람을 좋아했구나

생각보다 더 많이 내가 이 사람을 좋아했었구나아니 좋아하는 구나.

어쩌면 사랑하는구나

내 마음을 내가 알아버렸을 때 느끼는 그 통쾌한 전율과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그러나 그녀의 입 밖으론 뜻밖에 거친 단어들이 볼 폼 없이 튀어나와 버린다     



 ... ...미친 새끼야!! 너 다음번에 또 그러면 너 진짜 죽여 버릴...꺼야!!”  

   

말투는 거친데금방이라도 울음이라도 쏟을 것처럼 그 목소리가 떨린다.     


 그래그래.. 알았어.”     


제이는 복자의 허리를 자신 쪽으로 감싸듯 안았다두 팔이 뻐근했지만아랑곳하지 않았다통증보다 지금 이 여자를 안지 않으면 더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여자를 껴안고 우는 아이를 달래듯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안 미... 하나도 난 안 미안해......너한테 안 미안하다고...”     


복자의 몸이 반쯤 기울어 제이의 품에 안기고두 뺨에 놓인 손이 자연스레 그의 목둘레를 감싸게 되었다그러나 그녀는 쉬지 않고 계속 투덜댔다마음속으론 미안해미안해너무 미안해.. 하지만자꾸 입으론 그 반대의 말만 튀어나왔다왜 이렇게 심술궂게못나게 구는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그래.. 맞아미안할 일 없어당신.”     

 그래 이 자식아너한테 나.. 하나도 미안하지 않아아냐고...”     

 그래그래알아."     

 "그러니까... 다시는 그렇게 뛰어들지 마목숨 그렇게 함부로 하지 말란 말이야. ”     


그녀는 제이의 어깨 위에 안겨있던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말한다그건 명령이고 경고이자이 남자에게 꼭 받고 싶은 약속이었다     


함부로 다치지 말길

그래서 함부로 죽지도 말길     


제이의 목을 감싸고 있던 복자의 두 손이 그의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온다그 손이 따뜻하다온기그래이게 사람의 온기라는 거지소중히 여기는 마음누군가가 나를 소중히 여기고 다칠까잘못될까 염려하는 마음제이의 어깨 위로 닿은 온기가 피부를 뚫고수만 갈래의 핏줄로 갈라져 그의 몸 전체를 어루만졌다부드럽게그리고 사랑스럽게.


절대 놓치지 않을 거다이 따뜻함을     

몰랐으면 영원히 몰랐을 테지만이젠 더 이상 무를 수 없다.         


 함부로 아니야당신이라서 그랬어너니깐나도 목숨은 하난 거 알아.”     


제이의 갈색 눈동자 속에 여자의 얼굴이 비쳤다맑게 빛나던 그 모습이 출렁거린다남자의 눈가가 붉어졌다감정은 이런 거다인정하는 순간모든 게 가능해진다차갑게 얼어붙은 가슴에 순풍이 불더니 모든 게 빠른 속도로 녹아버린다제이는 복자의 양 손 위에 솜사탕처럼 폭신한 입맞춤을 했다그 장면을 바라보는 복자의 눈이 행복으로 빛난다눈물은 흘렀지만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였다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너한테 나 하나도 안 미안해 할 거야.”   

  

그녀의 입술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애써 참으려 실룩거린다그 모습이 참 어린애다뭐가 그렇게 쑥스러운지제이는 살짝 미소 지으며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으며 속삭인다.

     

 제발.. 그래줘.”     

이전 20화 50. 다시 제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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