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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Sep 19. 2024

39. 꿈에서 깨어나다.

서른 아홉번째 이야기 

      

 “...전무님전무님.”     


우성은 깊은 생각에 사로잡혀 뒤에서 자신을 몇 번이나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 실장.”     

 어머님께서 찾으십니다지금 바로... 근데기분이 좀.”     


이 실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알겠습니다여러모로 기분이 안 좋으시겠죠.”  

   

우성은 어머니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히 말했다     

리조트 객실동으로 들어온 우성적막감이 감도는 복도 위에 덩그러니 서 있다     

불과 세 시간 전에이 문 앞에서 자신의 가슴은 얼마나 두근거렸던가


문을 열어 그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 여인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묘한 감정이었다

그걸 설렘이라고 한다면 좋다설렘이고

사랑이라고 한다면 좋다그건 사랑인거다

 

그 모든 일들이 한순간의 신기루처럼 사라져 없어졌다.     


-똑똑.     


문을 두드린 후천천히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방 한 가운데에민재가 팔짱을 끼고 심각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었다그녀는 우성의 얼굴을 보자걸음을 멈추고 소파에 앉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니?”     

 무슨 말씀이세요?”     


민재의 목소리만큼이나 우성의 목소리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회장님이 이상하시다그러니까 우리정신 바짝 차려야 돼작전을 바꿀 거다회장님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겠어안정하게 경영권을 우리 쪽으로 가져오려면 전쟁이 필요해일단주주들이랑 운영진들 중의 일부는 우리 쪽으로 돌아섰지만아직은 불안해나머지가 회장님 말에 복종하는 원로들이야협상이 안 돼서 골치라고.”     


 어머니... 어머니!!!”     



우성의 거친 고함소리에 민재는 당혹감에 휩싸인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낯설게 쳐다본다 

    

 어머니대체 왜 이러세요!! 할아버지와 전쟁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몸도 불편하신 분이라고요아직은 사정이 있으셔서 선뜻 저한테 넘기지 못하신 것뿐일 겁니다그리고 정말로 할아버지 뜻이 저한테 회사를 넘겨주기 싫어하신다면전 그 뜻을 따를 거구요그게 회사를 위한 거라면!”     


빠른 속도로 단숨에 토해내듯 이 모든 말을 내뱉은 우성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그는 조금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어머니의 얼굴을 그제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어머니 앞에서 오늘처럼 세게 대든 적은 우성의 기억엔 단 한 번도 없는 일이었다한숨을 쉬고조금은 진정된 투로 다시 그가 입을 연다.     


 “ 그러니까 너무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지 마셨으면 합니다제 결혼 문제도요부탁드립니다.”     


민재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한다     


 총리님이 많이 언짢아하셨다오늘 니 태도나도 민망했어재림이한테 정식으로 사과해남자답게넌 신사잖니.”     


 재림이랑은 결혼하지 않습니다분명히여러 번 말씀드렸어요.”      


민재는 얼굴을 약간 찡그리더니 머리가 아픈지 손을 올려 이마를 살짝 짚는다     


 넌 결혼이 뭔지 알고 하는 말이니날개를 다는 일인데 왜 너는 싫다고 해남들은 하고 싶어 안달해조 총리총리로 안 끝나더 크게 올라갈 사람이야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고재림이 괜찮잖아예쁘고똑똑하고뭣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릎 꿇을 정도로 널 좋아한다는 데되려 고맙지 않니복잔가 뭔가 하는이름도 괴상한 그런 여자보다는.”     


우성의 눈이 두려운 것을 보기라도 한 듯 커지고 이내 그것은 모멸감으로 바뀌었다     


 “ 어머니지금?”     


 기분 나빠하지 마라어떤 앤지 캐보려다 기도 안 차서 ... 중간에 관뒀으니깐내 아들이고 이성의 주인이야세상을 다 가졌는데왜 쓸데 없는데다가 고집을 피우려고 하니누가 여자 만나지 말래만나니 마음대로누구든 상관없다나는다만결혼은 재림이랑 하라는 거야무리한 부탁도 아니잖아?”     


민재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는 우성의 옆얼굴을 슬쩍 쳐다본 후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다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마치 정원에 심은 나무의 가지라도 치듯 간단히 사람들을 베어 버리거나 뭉개 버렸다우성은 점점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오늘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의 지하철은 빠르게 종로 3가역을 지나고 있었다사람들은 아직 졸음이 남은 피곤한 얼굴로 각자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출근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그 한 무리 속에 어두운 카키색 목도리를 칭칭 감은 복자도 벽 쪽에 몸을 기대고 있다매캐하고 갑갑한 아침 지하철 특유의 냄새복자는 두 눈을 살짝 감고 어제의 기억을 하나씩 떠올린다.       


기사 딸린 고급차파티장한정판 디자이너 드레스프라다 구두예술품 같은 음식들....

그리고 가장 말이 되지 않았던 건바로 민 우성이란 남자였다

 

그 모든 게 한 여름밤의 꿈이다

처음부터 몸에 맞지 않는 것들이라 불편하고 어색했다

매력적이고 아름답지만어쩔 수 없다

이젠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아무리 인생의 숨어있는 반전이 있다고 해도이런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반전이란 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때였다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여자가 서로 핸드폰을 보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머머이거 뭐야조 재림 결혼하나봐?”     

 대박재벌 3세래이성그룹우와완전 잘 생겼는데이 남자.”      


그러더니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급히 핸드폰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대충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워듣기만 해도복자는 대강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그러나 그녀도 참지 못하고 인터넷 기사 화면을 터치해 본다.     


활짝 웃고 있는 재림과 그녀를 내려다보는 우성의 얼굴

그리고 입맞춤하는 두 사람     

두 장의 사진 아래로인기배우 조 재림과 대기업 재벌 3세 M씨의 결혼이 임박했다는 기사가 이어져 나왔다다른 포털 사이트에도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번지듯이 퍼져 있었다  

   

그래누군가 복자의 머리를 향해 총을 쏴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확인 사살.


니 현실을 직시하라고.  


   

그날 여러 명이 찍어대던 사진을 이 실장 혼자서 막아내긴 역부족이었던 가보다불쌍한 이 실장님오지랖은... 김 복자내가 지금 누굴 걱정해 줄 처지냐.

   

그나마 어제 실제 현장을 눈앞에서 봐서 그런지 그다지 충격이 크진 않았다다만그들이 퍽이나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걸또 그걸 세상 사람들이 인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우성은 아니라고 했지만그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받아들일 수밖에     


안국역에서 내려 다시 얼굴도 모르고이름도 모르는 무수한 사람들과 섞여서 지하철 계단을 올랐다회색빛의 수십 개의 계단을 숨이 차게 올라 지상 위를 밟았을 때 바로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전광판에도 우성과 재림에 관한 기사가 떠 있었다     


두세 번 보니 이제 뭐 대려 담담하다잠깐이지만 자신이 어떤 남자와 연애아니 연애 비슷한 걸 했는지 새삼 놀랍다이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대단한 남자였구나당신.    

      

길을 걷다 울리는 전화벨 소리혜교다

봤구나기사.     


여보세...”     


복자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흥분하여 달아오른 혜교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뚫고 나온다귀가 찌릿할 정도다     


!이게 뭐꼬이게이 남자그 남자 맞쩨그 크.크크리스마슷 날느그 집 앞에 왔던 그 ...금마민 우썽이!!!     

  

 “그래맞아.”     


복자는 간단히 대답하며출판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우와뭐 이런 지랄 같은 경우가 다 있노그럼느그 집 앞.에서 와서 살랑살랑거리면서도 딴 데서는 이 조재림인지장조림인지 하는 년 만나고 다닌 기가?   

 

 그렇다고만은 볼 수 없는데... 어쨌든 그렇게 됐어.”   

  

출판사에 거의 다다르고 이제 하나 남은 모퉁이만 돌면 되었다이렇게 피곤하고 지친 출근길은 학교를 그만두고선처음인 것 같았다복자는 한 손에 핸드폰을 쥐고 끊임없이 쏟아내는 혜교의 일장 연설을 들으며 다른 한 손으론 바람결에 아무 때나 나부끼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오늘따라 패딩코트 주머니 안에 머리를 묶을 고무줄도 들어있지 않다     


-차라리 잘 됐다.    

 

 뭐가?”      


-어차피 니도 두 남자 때매 머리 아팠던 거 아이가둘 다 좋대매이제 고민할 필요 없네그 작가랑 잘해봐라     


 간단하네."   

  

혜교의 명쾌(?)한 해법을 듣고 복자도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실소가 새어 나왔다그렇게 모퉁이를 돌아 출판사 앞에 닿았을 때 복자는 얼어버린 듯 길 위에 우뚝 섰다     


 미안먼저 끊을게.”      


대충 전화를 끊어버리고 복자출판사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우성을 발견한다핸섬한 얼굴이 하루 만에 몰라보게 상해 있었다눈 밑 그늘이 짙었다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갑자기 복자의 가슴이 싸해지더니눈가가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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