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덟번째 이야기
“일어나. 조 재림.”
“그래, 좋아!”
재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우성의 목을 두 손으로 감고 갑작스레 입을 맞춘다. 주변 사람들은 환호하고 박수치면서 호들갑을 떨었고, 사방에서 연신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우성의 완강한 손이 재림의 어깨를 힘주어 떼어낸다. 그러나 재림은 크게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이다. 어떤 남자가 나를 거부할 수 있겠어? 그녀에겐 세상 그 어떤 것에도 거부당한 적 없는 특유의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자신감이라 해도 좋고, 오만함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눈앞의 남자에겐 무의미했다. 슬슬 악이 바치려 했다.
우성은 그런 재림의 옆을 지나치며 그 자리를 유유히 벗어났다.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도 그 냉기를 감지했는지, 말없이 그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그래, 오빠. 이따 봐.”
천하의 조재림이 쉽게 무너질 리 없다.
재림은 곧 밝고 여유 있는 얼굴로 멀어지는 우성을 향해 외쳤다.
“정말... 보통이 아니시네요. 조재림씨.”
이 실장이 다급한 걸음으로 뒤따라 연회장을 빠져나오며 웅얼거렸다. 앞장선 우성이 황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뛰다시피 걸었다.
“어디 갔죠? 그냥 가버린 건 ”
“어? 어!! 방금까진 여기 계셨는데.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잠시 후, 우성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정원 외곽의 길 주변을 서성인다. 이 실장으로부터 확인된 CCTV 화면에 잡힌 복자의 모습은 여기까지였다.
그때였다.
정원 외곽 쪽 수풀과 연결된 주차장으로 한 여자를 안고 가는 젊은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얼핏 여자가 입고 있는 어두운 색 코트 아래로 살짝 비치는 옷이 눈에 익다. 라임색의 드레스.
짙은 네이비색 슈트를 완벽히 소화한 남자는 흰색 포르쉐 파나메라 앞에 멈췄다. 우성의 걸음이 더 빨라진다. 남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품 안의 여자를 조수석에 태웠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진 못했다. 그러나 우성은 자신도 모르게 불안하고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기분은 대체 뭘까?
바로 눈앞에서 제일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겨 버린 것 같은 기분.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숨쉬기가 어렵고 답답해졌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상실감이었다.
“잠깐만요. 저기요.”
이렇게 보낼 수 없다. 우성은 운전석 쪽으로 걸어가는 낯선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남자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두 사람의 거리는 꽤 가까워졌다. 선팅된 유리창 너머로 복자의 윤곽을 어렴풋이 드러났다.
“복자씨. 거기 있어요? 나 민우성입니다.”
우성이 조수석이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제이가 그 앞을 자연스럽게 막아선다. 그 어떤 표정도 담겨 있지 않은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다.
두 남자의 눈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극과 극을 이루는 두 남자.
불과 얼음처럼 전혀 섞일 수 없을 것 같았다.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나요?”
우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제이는 묘한 미소를 띠며, 여전히 차가운 눈동자로 답한다. 우성은 말없이 그의 얼굴을 살피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한 가지만 묻죠. 저 차에 타고 있는 여자분, 복자씨... 맞습니까?”
우성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평소와 달리 조금 떨렸다. 자신의 물음에 대해 이 사내가 어떤 대답을 하든,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안위에 대해 다른 남자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상황은 대단히 엿 같은 일이다.
더구나 이 사내는 기묘하게도 우성이 모르는 다른 것들을 이미 알고 있다는 기분까지 느끼게 했다. 대체 누굴까?
“대답해야 하나요?”
그 짤막하고 건방진 대답에 우성은 한 손을 올려 입가를 매만지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는 말이군요. 알겠습니다. 복자씨한테 전해주세요. 오해라고. 하지만 미안하다고 말입니다.”
우성은 처음과 달리 그 목소리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아마 복자라는 이름이 그의 입 밖을 지나간 다음부터일 것이다. 그는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불편한 표정을 한 사내가 아니라, 그 뒤에 숨죽이고 있을 복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차 안에 있는 복자도 우성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듣고 있었다.
오해라고.
하지만 미안하다고.
알고는 있다.
우성이 자기를 한 번 놀아볼까? 하는 상대로 대한 것은 아닐 거라는 것을.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발전되는 우성과 자신의 관계를 복자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분명히 멋진 남자지만, 정말 내가 당신을 감당할 수 있을까?
당신과 나와의 거리를. 그 차이를.
다른 날, 다른 일들로, 또 오늘처럼 바보같이 도망쳐 나오진 않을까?
복자의 눈에 다시 멈췄던 눈물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민우성씨.”
우성은 상대의 말에 또 한 번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성 창립기념파티에 초대 되서 온 거라면, 자신의 이름을 모를 리는 없겠지만....
“......”
우성은 대답하지 않고, 긍정의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부터 당신이 가지고 있는 거나 잘 지키시지요.”
제이의 눈 속에 선명하게 경고의 메시지가 비췄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선전포고였다. 우성의 반듯한 이마가 잠시 일그러졌다.
“하, 제가 이 상황에서 당신한테 왜 이런 말을 듣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그리고 그쪽이 누군지도 밝히지도 않으면서.”
“제가 누군지는... 곧 알게 될 겁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럼.”
제이는 파나메라의 운전석에 올라탔고, 그 바로 옆에 타고 있을 복자를 생각하며 우성은 매우 불편한 기분으로 그 장면을 바라봤다. 복자는 창문도 내리지 않은 채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이를 바라보는 제이의 표정도 편치 않다.
모두의 무거운 시선을 담은 흰색 파나메라는 강렬한 전조등 빛을 발하며 어둠을 뚫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우성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금부터 당신이 가지고 있는 거나 잘 지켜.
리조트 안을 완전히 빠져나간 후, 서울 근교로 들어오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차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러나 10분 전부터 계속해서 울리는 메시지 알림 소리에 드디어 복자가 입을 열었다. 대교 위를 지나며 옆쪽으로 밤의 한강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메시지 확인해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 스팸이야.”
“스팸? 이렇게 계속?”
“생일이라 그래.”
“...생일?오늘?...너?”
제이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복자는 그제야 몸을 돌려 제이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본다. 멍하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복자가 서둘러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10시야. 두 시간 남았다. 니 생일.”
방금까지, 축축하고 음울한 기분이었던 김 복자는 어디로 가고, 다시 살아난 그녀의 말소리에 제이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녀의 눈이 반짝인다. 다행이다.
“후. 생일 내년에 또 와.”
제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툭 내뱉으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스물다섯 번째 생일은 다시 안 오지. 넌 작가가 왜 그렇게 감수성이 말랐냐.”
날렵하게 뻗은 그의 콧날 위로 주황색 불빛이 아른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복자는 빤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가 쓴 원고의 첫 줄이 떠오른다.
-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무기이자 철학이다.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아서, 그는 스물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사람을 믿지 않고, 피 공포증을 앓고 있으며, 누군가에게 따뜻하다가도 금세 냉랭해지는 성미를 가지게 되었나. 그리고 그렇게 섬뜩하고 놀라운 글을 써 내려가면서 머릿속에, 그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살았던 걸까.
제이는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복자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모르겠지만.
“봐도 봐도 잘 생겼지? 내가. ”
“웃기는 소리 관두고. 아니. 생일인데 뭐라도 해줘야 하는데.... 뭐가 있나 생각한다고... 케이크라도 불어야 하지 않나? 아직, 빵집 문 연데 있을 건데...”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빛나는 화려한 이목구비에 복자의 가슴이 괜히 두근거렸다.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고, 차는 잠시 멈췄다.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다, 작은 새처럼 귀엽게 지저귀는 복자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제이. 품에도 맞지 않는 큰 코트 밖으로 작고 하얀 얼굴만 쏙 나와서는. 아까의 일은 다 지워버린 듯, 다시 눈을 반짝이며 누군가를 챙겨주려고 한다. 따뜻하게.
“넌 무슨 케이크 좋아하냐. 치즈? 생크림? 혹시 초코는 아니지? 아님, 의외로 고구마 같은 거 좋아하려나. 참고로, 나는 치즈 좋아해. 넌?”
통통 튀는 생기가, 그 따뜻한 기운이 얼음을 녹인다. 장벽이 허물어진다. 제이의 오른손이 콘솔박스를 지나 복자의 손 위를 덮으며 감싸 쥔다. 순간, 움찔했지만 그 손을 쳐내진 않는다.
“ 난... 당신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