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섯번째 이야기
(리조트 B동 1호)
“회장님.”
“응, 이제 식장으로 출발할 땐가?”
“아.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게 아니라...”
늘 침착한 얼굴의 김 비서가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다. 그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 밖에 그분이 찾아왔습니다.”
“...뭐야? 누가 왔다고?”
최 회장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고, 그의 단단한 이마가 격한 감정에 출렁였다. 거구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를 알아챈 김 비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다.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잠시 기다리시라고 할까요?”
“아 아니... 무슨... 내가 얼마나 그 아이를 기다렸는지 알고 있지 않나? 어서 부르게. 어서!”
두 명의 수행원이 서둘러 문을 열자, 마침내 그의 모습이 보였다.
“ 서...서준아...”
여든이 넘은 노인의 눈에 눈물이 넘치듯 차올랐다. 소파서 일어나 그는 문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떼며, 같은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흐르는 눈물 때문인지 그의 시야가 뿌옇고 흐리다.
오랜 세월 병상에 누워있는 그의 아들, 민수가 이십 대의 푸릇한 나이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얗고 고운 인상, 단단하고 날씬한 체격. 다만, 처연한 색을 띠고 있는 갈색 눈빛만 제외한다면 놀라울 정도로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아이에게 용서를 빌고, 최 회장의 마음은 납덩어리처럼 무겁기만하다.
민재는 직원들과 함께 식장의 입구로 들어서며 줄지어 있는 임원진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눈다. 그들 중 살집이 두둑한 남자가 민재 곁으로 다가온다.
“사장님, 오늘 임원진 뿐만 아니라 다른 주주들도 기대가 큽니다.”
“어떤 기대를 말씀하시는 거죠?”
민재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대꾸하자, 그가 답한다.
“다 아시면서... 오늘 이 자리에서 최 회장님이 민 전무를 어떻게 소개할 지에 대해서지요. 물론 저는 민 전무님이 앞으로 이성을 이끌고 나가실 분이라는 거에 대해선 한 치의 의심도 없지만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박 사장님. 오늘 말씀 제가 기억해두죠.”
민재가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자마자, 주변이 어두워지며 오프닝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이성그룹 창립 55주년 기념을 알리는 화려한 퍼포먼스와 영상 화면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다. 물 흐르듯이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당신, 얼굴 좋아 보이는군.”
그때였다. 랄프 로렌 블랙 라벨의 슈트를 멋들어지게 걸친 중년의 신사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며 민재의 옆에 앉는다. 그는 우성의 아버지이자, 그녀의 남편으로 그들 부부는 서로가 필요에 의해 연결된 비즈니스 관계에 더 가까워 보였다.
잠시 후, 20분 정도의 오프닝쇼가 끝이 나고 사회자가 무대 위에 올랐다.
“오늘은 우리 이성 그룹이 55년 창사 이래, 가장 기쁜 날입니다. 창립 기념사를 해주실, 최창호 회장님을 모시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큰 박수와 환호를 보냈고, 드디어 무대 위 최 회장의 근엄한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우성이 있었다. 기자들의 플래쉬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민재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회장은 탁상 앞에 설치된 마이크를 한 손으로 잡았다 놓으며 입을 뗐다.
“반갑습니다. 이성그룹을 사랑해주시는 여기 계신 모든 여러분... 제 뒤에 보이는 잘생긴 청년 보이십니까? 민우성 전무입니다. 제 손자이기도 하죠.”
무대 위 조명이 우성을 잠깐 비친다. 또 한 번 플래쉬 세례가 이어지고, 아까보다 더 큰 박수와 환호 소리가 터져 나온다. 민재와 그의 남편도 열렬히 박수를 친다. 그러나 부서지는 조명 빛 아래로 우성은 어느 한 쪽만을 보고 작게 미소를 지어 보낸다. 그 시선을 따라간 자리에 발그스름한 얼굴을 한 채로 앉아있는 복자가 있다. 그녀는 그런 우성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최 회장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민 전무를 여러분께 정식으로 인사드리고 싶어서, 오늘 함께 자리했습니다. 저는 이 유능하고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가 이끌어 나갈 이성의 미래가 너무나 기대됩니다. 다만, 아직 이 친구가 그걸 원하질 않습니다. 본인이 더 갈고 다듬고 익혀야 하는 부분이 많다고 하네요. 그래서 아직까지는 제가 이성을 좀 더 책임질 생각입니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왜 저렇게 마음이 변하신거야?’
민재의 양미간이 찌푸려지면서 불편한 기색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그들은 최 회장이 이 자리에서 자신의 퇴임 의사를 밝힐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최 회장은 마음을 바꾸어 버린 것일까?
“당신 표정 관리 좀 하지. 사람들이 당신만 쳐다본다고.”
민재의 귓가에 대고 그녀의 남편이 작게 속삭인다. 무대 위에 서 있던 최 회장은 뒤 돌아 우성의 한 쪽 어깨를 다독이고 안으며 작게 말했다. 우성은 처음의 계획과는 달라진 지금의 상황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섭섭하냐? 할애비 때문에?”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할아버지.”
“그래. 고맙구나. 그렇게 말해주어서. 그러나 너희 애미는 꽤 서운해 할 거다.”
두 사람의 포옹이 끝난 후, 회장은 무대 아래로 내려가고, 우성이 그다음 순서를 진행하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최 회장님의 말씀대로 저는 아직 이성을 위해 준비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이성의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겠지요. 그럼, 그간 이성 그룹의 발전 과정을 준비한 자료가 있습니다. 보시죠.”
단상 쪽의 조명이 어두워지며 준비된 영상이 진행된다. 그는 침착하게 일련의 과정을 진행한다.
창립 기념 파티의 1부 공식행사가 끝이 나고, 2부가 시작되었다. 연회장의 벽면은 마호가니 원목으로 전체가 둘러싸여 있고, 천장에는 1미터 간격으로 앤티크 샹들리에가 빛나고 있었다. 화이트와 골드의 컬러가 적절히 배합된 꽃과 장식물, 아른거리는 촛불들은 중세 시대 유럽의 왕실을 연상케 했다.
곳곳에 사람들은 네다섯 명 정도의 무리를 이루어 저마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우성은 조금은 급한 걸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고 있다. 복자는 어디에 있는 걸까? 너무 오랫동안 그녀를 혼자 둔 것 같아 그는 걱정이 된다. 우성이 연회장 안으로 나타나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몰려들었지만, 그는 가볍게 눈인사만 나눌 뿐 이었다.
“자네, 정말 대단하네. 무대 위에서 모습이 정말 멋지더구만.”
“아 총리님... 감사합니다.”
차기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경제부 총리가 우성의 앞을 자연스럽게 막아서면 말을 건다. 그는 재림의 아버지다. 우성은 여유 있게 감사의 인사로 답하며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민재가 아들 앞을 막는다. 그리고 아버지도.
“아버지?”
“응, 우성아. 이제야 인사 하는구나. 아, 총리님. 오랜만에 뵙네요.”
“네, 민 사장님. 일본 상황이 좀 어떻습니까?”
“하하, 저는 뭐 비슷합니다. 안 그래도 총리님, 더 바빠지시기 전에 한 번 가족 모임을 해보고 싶었는데 어떠십니까?”
“하하. 민 사장님. 좋습니다. 한국에 계실 동안 시간을 잡아보죠. 재림이도 좋아하겠군요.”
총리는 재림의 이름을 말하면서 슬쩍 우성의 눈치를 살핀다. 이곳의 공기가 점점 무겁게만 느껴진다. 갈증이 난다. 우성은 무심히 샴페인 잔을 들이킨다. 그리고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놓을 찰나에,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주변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녹색의 드레스를 입은, 이 순간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했다. 오아시스다. 저 여자는.
아들의 눈빛에 띈 이채를 발견한 민재는 예리하게 그 시선을 따라간다.
‘저 여잔가?’
그녀는 한 발짝을 떼려는 우성의 손목을 살짝 잡으며 작게 속삭인다.
“잠시만 여기 있으렴. 오늘 중요한 게 틀어졌잖니. 민 전무, 여기 좀 있어줘야지.”
우성은 난감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때,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을 발견한 복자가 환하게 웃는다.
아... 그녀를 잠시라도 혼자 두고 싶지 않은데.
검은색 공단으로 둘러싸인 테이블 위에는 가히 예술적인 수공예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연회 음식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금 티스푼 위에 놓인 구운 완자를 한 입 넣고 오물거리면서 복자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통통한 완자가 씹히면서 사이사이로 무언가 톡톡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다른 티스푼 음식을 살펴보니, 검은색 캐비어가 한 줌씩 올라가있다.
“우와~이 귀한 걸.”
복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그녀의 옆으로 짙은 파랑색 벨벳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다가와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온다. 심심하던 참에 복자도 반가운 마음이다.
“어머, 그 드레스... 너무 이쁘네요. 지난 밀라노 패션쇼에서 본 적이 있던 거 같은데 어떻게 공수하셨어요? 한정판이라 구하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눈썹 위로 달랑 올라간 앞머리를 한 그녀는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복자의 드레스를 훑어보았다. 밀라노? 한정판? 영문을 알 수 없는 복자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대충 얼버무리려 한다.
“아 네. 어떻게... 입게 됐네요...”
아는 사람도 없이 혼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복자의 모습을 본 건지, 여자가 다시 묻는다.
“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이쪽에서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부모님이...?”
뭐야? 드레스 얘기하다가 갑자기 호구 조사는?
“아~ 부모님, 슈퍼하세요.”
복자의 자연스런 대답에 조금 놀란 여자는 자기만의 방식대로 해석을 한다.
“아~ 유통업~ 호호호, 대게 말씀 재밌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럼, 혹시 하시는 일을 여쭤봐도 될지...”
후- 유통업? 그건 또 뭔 말이야?
그리고 당신, 무슨 면접관이냐?
내가 입은 팬티 색깔도 말해주리?
“아... 책 만드는 일 하고 있어요.”
복자의 대답에 여자는 또 한 번 당황스러워 하더니, 이내 팔짱을 낀 채 약간 거드름을 피우며 말한다.
“아~ 출판업.... 자선 사업 비슷한 거 하시나 봐요? 후원 같은 거?”
복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뭐야. 이 여자. 진짜 안 되겠네.
“자선 사업이요? 그렇게 볼 수도 있나. 전 좋은 작가 만나서 좋은 책 만드는 일 해요.”
“아 네.”
잠깐 호기심이 동했다가 몇 마디 대화만으로 그 실체가 파악이 끝난 것일까.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로, 벨벳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샴페인 잔을 들고, 다른 무리 쪽으로 사라졌다.
“뭐야 참, 밥맛 떨어지게 ”
복자는 작게 투덜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서 있는 우성과 눈을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저절로 입가가 올라가면서 미소가 번진다.
그래, 저 멋진 남자가 날 보고 있잖아.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은.
그를 둘러싼 몇몇의 사람들.
그리고 그녀를 지나쳐 사라지는 사람들.
나와는 상관없는 이들의 수다 소리와 웃음소리.
황금빛 샴페인이 유리잔 위로 쏟아지고.
별빛처럼 일렁이는 불빛과 공간을 채우는 화려함.
모든 그림이 느리고 희미하게 스쳐 지나간다.
그래.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우성이 복자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