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우리 구면이죠.”
산뜻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향기를 풍기며 낭랑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무심코 옆으로 돌린 복자의 눈이 더없이 커진다.
“어? 조재림씨!”
크림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한 마리의 백조처럼 우아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 재림은 양손에 들고 있는 샴페인 중 하나를 복자에게 친근하게 건넸다.
이게 무슨 영광이야?
최고 인기 여배우와 서로 마주 보며 샴페인을 마신다니.
복자는 약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얼결에 재림이 건네는 샴페인을 받아서 한 모금을 마신다. 재림의 뒤로, 우성의 모습이 더 가까이 보였다.
“잠깐만요.”
서둘러 급한 용무가 있는지, 재림은 자신의 샴페인 잔을 복자에게 잠시만 들어달라는 듯 미소를 보인다. 그러더니 그녀는 뒤돌아 걸어오는 우성의 앞에 선다. 그 주변인들의 시선이 우성과 재림을 쫓고 있었다. 복자도 양손에 샴페인 잔을 든 채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원래 아는 사이인가?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그곳에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우성의 바로 앞에서 선 재림.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한 손 위에 반지를 꺼내 보인다.
남자는 눈으로 말한다.
너 지금 무슨 짓이야?
우성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서 있는 복자를 살핀다.
얼어버린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새하얀 도화지 위에 떨어진 검정 잉크처럼, 그녀의 얼굴이 어둠이 번진다.
그렇게 슬픈 표정 지을 필요 없다고.
이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나와는, 아니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우성은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갑자기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복자의 얼굴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마치 준비라도 되었던 것처럼 어디선가 ‘결혼 행진곡’이 위트있게 흘러나왔고, 우성은 한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속으로는 짜증이 솟구쳤지만, 겉으로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일어나. 조재림. 일어나서 얘기해.”
재림은 그런 우성을 올려다보면서 장난스런 웃음을 짓는다.
“그래, 좋아!”
재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우성의 목을 두 손으로 감고 갑작스레 입을 맞춘다.
“오호, 우와 장난 아닌데. 조 재림.”
“와~~ 멋지다.”
“재림 여신님. 대박..!”
“야, 우성아. 너무 빼지 마라. 저 자식은 너무 샌님이라니깐.”
“휙~~두 사람 너무 어울린다!!”
“드라마네, 드라마야!”
그들을 둘러싼 주변 친구나 지인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낸다. 그 사이에 파란색 벨벳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이 장면을 재빨리 촬영한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제각각 핸드폰을 꺼내 든다. 파티장 안 사람들이 무슨 일이지? 하는 호기심으로 자꾸만 몰려든다. 그러다, 샴페인 잔을 들고 멍하게 서 있는 복자 옆으로 누군가가 세게 치고 지나간다.
“엇어어, 아...!”
복자는 넘어질 뻔 앞으로 기우뚱하다가 간신히 오른손으로 테이블 끝을 부여잡았다. 잔 안에 든 샴페인이 출렁거리며 복자의 옷 위로 흘렀고, 테이블 끝에 진열된 핑거 푸드와 초콜릿으로 범벅된 디저트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중, 쇼콜라 한 무더기가 복자의 오른쪽 몸에 붙어 아래로 죽 떨어졌다. 시커먼 갈색의 초콜릿 덩어리가 녹색 드레스 한 면 전체에 넓게 묻었다. 마치 진흙 위를 구른 것처럼.
“완벽하네. 완벽해.”
복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먼저 음식물로 범벅된 손을 테이블보 위에 대충 문질렀다. 고맙게도 어디선가 달려온 이 실장이 하얘진 얼굴로 서둘러 흰색 냅킨을 그녀에게 건넨다.
“괜찮으십니까? 어쩌죠. 옷에 다 묻었네요. 갈아 입으셔야겠습니다.”
“...고마워요.. 이 실장님.”
“저 상황 오해하지 마십쇼. 전무님, 그럴 분 아니십니다.”
그는 복자의 눈치를 살피면서 우성과 재림이 있는 쪽으로 턱을 가리켰다. 복자는 입을 다문채 그저 묵묵히 초콜릿 범벅을 세게 문질렀다. 코끝이 찡해졌다. 머릿속으론 이 실장이 말한 그럴 분이 과연 어떤 분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것도 관두기로 했다. 어떤 답이 나오든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았다.
“ ... ”
“그니깐. 원래 재림 아가씨랑 두 분이 어렸을 때부터 잘 아는 사입니다. 장난도 치는. 뭐 그런. 특별한 거 아닐 겁니다.”
“하. 이 실장님. 안 그러셔도 돼요. 저한테.”
복자의 말에 이 실장의 표정이 더 난감해지고, 어떡해야 하나 싶은 죄지은 얼굴이다.
내가 뭐라고?
내가 이 상황에 화를 내야 하나?
이곳에 내가 왜 있는지조차 설명할 수 없는데 대체 무슨 자격으로?
“아, 잠시만요. 금방 오겠습니다.”
이실장은 재빨리 구경꾼 무리 속으로 파고 들어가 사진 촬영을 하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제지했다. 메아리치듯이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라마네. 드라마야! 완전 둘이 어울린다.”
그래. 잘 어울린다. 주인공들끼리 아주 잘 해봐라.
‘지나가는 여자1’은 이제 퇴장하니까.
고개를 끄덕거리며, 복자는 뒤돌아 식장의 출구 쪽으로 걸어간다. 불현듯, 반대편으로 걸어가 재림을 제치고 우성의 얼굴을 부여잡고 이렇게 묻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데? 당신 나, 좋아한 건 아니었냐고. 이때까지 나 데리고 당신 뭐 한 거냐고.
고개를 옆으로 작게 흔드는 복자, 눈물이 차올라 앞이 어른거렸다. 그런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냐. 자신만 더 비참해질 뿐이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게 상책이다. 복자는 식장 밖으로 서둘러 나갔다. 초콜릿 범벅이 된 테이블 위. 녹색 비즈로 장식된 클러치만이 그곳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식장의 직원들이 새 연회 음식들을 진열하려고 분주한 틈에, 누군가의 손이 나타나 그것을 빠르게 낚아챈다.
정신없이 연회장 밖으로 나온 복자는 외부로 통하는 세 개의 길 중 리조트 정원 안으로 무작정 걸었다. 다섯 걸음 정도 걸으니 그제야 추위가 확 느껴진다. 이가 떨릴 정도였다.
“여기가 어디야...”
홧김에 씩씩거리며 나오긴 했는데, 막상 나와 보니 주변이 낯설고 꽤 어둑하다. 그러다, 뭔가 발이 푸욱 빠지는 느낌이 든다.
“으악, 뭐야?”
풀밭 으슥한 곳에 진흙 웅덩이가 있었다. 복자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프라다 구두가 흉물스럽게 갈색 눈물을 흘리고 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반짝거리던 것이. 복자는 그 구두가 마치 자신 같았다.
잠깐이나마,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만의 하나를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통속적이지만, 그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되는 일. 완벽한 남자를 만나는 평범한 여자의 이야기.
하지만 이게 드라마라면, 여자 주인공이 어두컴컴한 겨울밤에 혼자서 진흙탕에 발이 빠져가며 도망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 속 그녀들은 어찌 그리 당황스럽고, 기가 막히는 상황에서도 또박또박 주옥같은 대사를 던져 주는가.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복자는 우성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다. 민우성이 너무나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일은, 지금 여기서 빠져나가기 위해 몇 번 버스를 타야 할지, 아니면 집까지 가려면 택시 요금은 얼마가 나올까 계산기를 두드리는 일이다.
“젠장, 핸드폰. 그 클러치... 아~ 나 어떡하니?”
그제야 복자는 그 손바닥만한 클러치를 연회장 테이블 위에 두고 나왔다는 걸 생각해냈다. 더럽게 운도 없지. 그리고 수백만 원짜리 옷에 주머니도 하나 안 만들어 놓다니. 이 독한 것들. 다시 연회장안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야? 멈췄던 눈물이 다시 날 정도로 막막하다.
그때였다. 뒤에서부터 포근하게 몸을 감싸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복자는 제자리에서 얼어붙듯 놀라 멈춰 선다.
“여기... 어, 어떻게?”
제이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재빨리 복자에게 입힌 코트의 단추를 잠근다. 뛰어왔는지 하얀 얼굴이 조금 붉게 변해 있었다. 그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에, 하얀 입김이 쉴 새 없이 나왔다.
“ 당신, 뭐 그렇게 걸음이 빨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겁도 없이... 어떻게 가려고 그 옷으로 무작정 나온 거야? 여긴 차도 안 다니는 곳이라고!”
화가 난 목소리였지만 무섭진 않았다. 저를 향한 걱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뭐... 그게 아니라. 거기 더는 있을 수가 없어서. 아니 근데, 너 여기 어떻게 온 거야?”
복자의 물음에 제이는 별 대답 없이, 그녀의 팔목을 강하게 잡는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옷차림이 평소와 다르다. 주변이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잘 정돈된 슈트를 입고 있다. 그도 파티에 초대된 것일까? 대체 어떻게.
절뚝거리는 복자의 걸음걸이를 눈치 챈 제이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을 살핀다.
“뭐야? 당신, 발 왜 그래? 똥이라도 밟은 거야?”
“아~ 뻘 같은데 빠진 것뿐이야. 됐어. 야! 야! 왜 그래? 야!”
제이는 거침없이 복자의 구두를 그녀의 발에서 벗겨 버리더니, 볼썽사납게 된 프라다 구두를 어딘가로 휙 던져 버린다. 왠지 모르게 복자의 무거운 마음 한쪽이 가벼워진다. 멍한 눈으로 구두가 사라진 쪽을 바라본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떠오른다.
제이가 두 팔로 복자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복자는 제이의 품에 안겨서 두 발을 허공에 버둥대며 비명을 내지르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만, 가만. 좀 있어. 무거워 죽겠으니까. 혹시, 아까워서 그래? 그 구두?”
“그래, 아까워서 그런다. 이 밤에 집어 던지면 어디서 찾냐.”
“하여튼, 여자들은 명품이라면….”
“……너, 혹시 파티장 안에서 있었던 일 본 거야?”
" ...... "
제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어둑한 수풀 안을 한참 동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