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다섯번째 이야기
이 실장이 운전하는 차를 탄 복자는 어색한 표정으로 뒷좌석에 앉아 있다.
“이 실장님, 어디로 가는 건데요?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요.”
“하하, 뭐가 이상하세요? 청담동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곧 도착합니다.”
룸미러로 이 실장의 작은 눈이 한껏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100킬로 정도는 되어 보이는 거구의 몸을 안정감 있게 사피아노 가죽이 감싸고 있다. 차 안 천장은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의 초극세 섬유로 발라져 있고, 양 사방에서는 은은한 흰색 빛의 내장 조명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차 안 내부를 둘러보며 복자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자신이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떨어진 건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설레면서도 묘하지만 불안하기도 했다.
차는 박스형 건물 앞에서 섰다. 주차 요원이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고, 복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매장 입구에 있던 검은색 슈트를 입은 단정한 머리를 한 남자가 다가와 이 실장을 보고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복자에게 말을 건넸다.
“ 안녕하십니까. 안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남자는 머리스타일 만큼이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지만 딱딱하지 않은 말투와 행동을 보였다. 한 손으로 가볍게 건물 안쪽을 가리켰다. 복자는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자꾸만 주위를 둘러보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
단조롭고 절제된 외관과 달리 내부는 화려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대리석 바닥 한 가운데 자유로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러개의 마네킹들이 저마다 독특한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그 뒤로 지방시, 알랙산더 맥퀸, 셀린느, 마르니, 포로엔자슐러, 생로랑 등등의 핸드백들이 섹션별로 줄지어 전시되어 있었다.
갈라진 여러 갈래의 섹션들마다 기하학적으로 설치된 조명과 유리거울 사이로 계절과 상관없어 보이는 다양한 소재의 고급 브랜드 의류들이 비쳤다. 복도와 복도를 잇는 섹션 입구마다 정돈된 검정색 슈트를 입은 직원들이 그림처럼 서 있었다.
이곳에 들어온 지 채 3분도 되지 않아, 머리가 약간 어질해질 정도의 가벼운 현기증이 느껴졌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서울 하늘 아래에. 정말 별천지네.’
라고 복자는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뭔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자꾸 움츠려지고, 불편했다. 입구에서 복자를 안내한 중후한 목소리의 직원이 뒤에서 말을 걸어온다.
“손님. 여기는 N관입니다. 2층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녀는 직원의 안내를 따라 2층으로 연결되는 나선형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1층과 달리 2층은 파리의 고급 아파트를 연출한 듯한 모습으로, 큼직큼직한 섹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새하얀 조명 빛이 수십 켤레의 슈즈들을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섹션을 지나, 꽤 높고 커다란 문 앞으로 직원은 복자를 안내했다. 이 실장은 그 뒤를 묵묵히 따랐다.
문 옆에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직원이 가운데 금색 문고리를 쥐고 문을 밀자, 보라색 양탄자와 회색 돌벽으로 둘러싸인 실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번쩍거리는 골드빛의 머리칼을 하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펑퍼짐한 검은색 옷을 입고 입은 살집이 두터운 중년의 사내가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어머! 자기가 그분이구나~ 반가워요~ 나는 욥스라고 해요.”
얼어있는 복자를 욥스는 다정하고 가볍게 포옹해주었다. 복자의 양 볼에 통통한 그의 볼살을 번갈아 스치면서 입으로 “쪽,쪽” 소리를 내며 유럽식 인사까지 빼먹지 않았다. 그는 말을 할 때마다, 손가락을 여러 방향으로 움직였는데 그때마다 뭔가가 반짝거리는 노란 것이 보였다. 나중에 보니, 그것은 그의 손톱에 네일 아트 한 노란색 미니언즈들이었다.
“ 안,안녕하세요. 근데 제가 여길 왜...”
이젠, 정말 물어보아야겠다고 복자는 생각했다. 여기, 이곳에, 자신이 왜 있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그러자 욥스는 조금 놀란 얼굴로 두툼한 손가락을 오므려 입을 가리며 외쳤다.
“ 어머어머어머!! 자긴 몰랐구나. 어머! 이 실장님. 그죠? 이거 서프라이즈죠? 어머어머~~멋져멋져~ 민 전무님. 너무 멋지다. 푹 빠졌네. 푹 빠졌어. 영 점잖은 선비님인 줄 알았는데 이런 면이...”
속사포같이 하이톤으로 쏟아내는 그의 말들은 처음 듣는 사람이 단번에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욥스는 눈앞에 앉아 있는 복자와 이 실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구르며 한동안 호들갑을 떨었다.
“ 아 하...저기...”
어색한 웃음을 얼굴에 띠며 복자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자, 그는 조금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의자에 앉아 복자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 아 자기~ 미안 미안. 내가 좀 오바스럽지. 어쨌든 나만 믿어요. 오늘 저녁에 갈 파티를 위해서 자기를 좀 더 돋보이게 해 달라는 명령을 받았으니깐.”
“ 네???”
(서울 근교의 B 칼튼 리조트 행사장 안)
“아.아.”
목소리가 잠겼는지 우성은 자신의 목 상태를 점검한다. 평소엔 여유가 넘치는 그인데도 오늘은 조금 긴장되어 보인다. 회색 프라다 더블브레스트 슈트를 입은 그의 어깨가 조금 굳어 보였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민재의 눈빛이 한없이 만족스러워 보인다. 오늘은 그녀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던 날이었다. 내 아들이 차기의 이성 그룹의 주인이 될 거라는 걸 만 천하에 공포하는 날. 이날을 위해서 그녀가 얼마나 수많은 장애물을 무너뜨리고 갖은 모욕을 참아왔는지...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마저도 딸인 민재를 이해하진 못할 테니깐.
“민 전무, 괜찮아?”
“어머니? 지금 도착하신 거예요..”
“응, 아버지랑 같이. 회장님도 와 계신다. 룸에 계셔.”
“할아버지...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으시데. 어쨌든 오늘 우리 민 전무한테는 중요한 날이니깐 다른 건 신경 쓰지 마라. 그지? 회장님이 공개적으로 우리 민 전무를 소개하는 날이니깐.”
민재는 하얀 공단으로 둘러싸인 시스루 블라우스 위의 여러 개의 진주 목걸이를 매만지며 준비가 거의 끝난 장내 안을 둘러보았다. 무대, 조명, 객석의 위치, 주변의 장식과 움직이는 직원들... 어느 하나 실수가 없어야 한다. 오늘은 모든 게 완벽해야 하는 날이니깐.
“ 어머니?”
“ 응? 뭐 수정해야 할 부분이라도 있니?”
“ 아.. 오늘 제가 어머니께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우성의 말에, 민재의 눈빛이 묘하게 날카로워졌지만 곧 누그러졌다. 그녀는 우성을 아주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았다.
“ 소개하고 싶은 사람?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이니? 너에게서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구나. 물론, 친구는 아닐 테고, 여자?”
“ 네. 제가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유 있게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민재는 진중한 얼굴을 한 우성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 하지만, 민 전무. 오늘 재림이 부모님 두 분 다 여기 초대되어 오시는 것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어쨌든 나도 그 아가씨가 궁금하니깐, 편견 없이 보도록 할게. 그럼 나는 회장님 좀 뵈러 가야겠다. 수고.”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식장을 빠져나온 민재, 우성과 조금 떨어진 거리까지 오자 뒤에 따라오던 수행 비서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린다. 그 목소리가 매우 차갑다.
“지금 바로 이 실장 연결시키고, 우성이 이름으로 나간 초대장 명단 손님 중에 여자 이름 추려서 가지고 와.”
어머니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는지 우성은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건다. 아까와는 달리 그의 표정에 생기가 돈다.
“이 실장, 어디쯤이야?”
- 허허, 전무님. 지금 리조트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A동 3호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 그래. 지금 가께.”
- 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우성은 빠른 걸음으로 식장을 빠져나와 오픈 톱 라페라리에 올라탔다. 주변에 뒤따라 나온 몇몇의 수행원들에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우성은 엑셀을 힘주어 밟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만 있을 뿐 이었다.
“후우-”
A동 3호 문 앞에 서있는 우성. 그는 크게 숨을 내쉬고 자신의 왼쪽 가슴에 한 손을 올려두었다. 손바닥으로 둥둥거리는 심장의 박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고백이자 확신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우성이 들어서자, 맞은 편 테라스 쪽에서 주변 풍경을 구경하며 감탄하는 복자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따뜻한 기운으로 불타고 있는 벽난로를 지나 테라스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옆모습이 있었다. 맞은편에 보이는 겨울 산의 하얀 눈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파리하게 비쳐 복자의 피부가 투명하게 보였다. 동그랗게 말아 올린 머리 스타일 때문에 그녀의 갸름한 얼굴과 아래로 떨어지는 목선이 여릿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몸 전체를 부드럽게 조이며 감싼 라임색의 레이스 드레스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그녀가 서 있는 것만으로, 방안의 공기가 5월의 봄날처럼 따뜻해졌다.
우성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감탄했다.
“ 하... 복자씨.”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복자가 고개를 돌려 우성을 발견하고 반갑게 활짝 웃었다. 두 눈의 반짝거림, 활짝 꽃 피듯 펼쳐진 미소. 그녀는 몰랐겠지만, 그 모든 게 우성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시간은 그곳에서 정지했고, 복자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우성의 뇌리속에 선명하게 박혔다.
“아? 우성씨. 리허설 중이라고 들었는데.”
복자는 생각지 못한 우성의 등장에 약간 놀랐지만, 한편으론 낯선 곳에서 만난 그가 너무 반가웠다. 불안한 그녀의 마음이 그제야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장소, 다른 모습의 자신이 어색하고 불편한 건 여전했다.
“하. 어색하죠? 이런 건 처음 입어 봐서. 뭐랄까. 공주가 된 것 같은 기분. 그래도 저 피오나 공주 같진 않...”
복자 쪽으로 성큼 다가간 우성,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손을 뻗어 그녀를 포근하게 안았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그는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목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곡선에 살며시 그의 얼굴을 깊숙이 묻었다. 갑작스런 우성의 포옹에 복자는 놀라 두 팔을 뻣뻣하게 아래로 내린 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가슴 위로 느껴지는 두근거림이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우성의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나만 보고 싶어요. 당신 전부 다.”
몽롱해지는 분위기를 뚫고, 우성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손이 복자의 등 위를 연주하듯 쓰다듬은 후, 사랑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 까맣고 동그란 두 눈을 하루 종일 쳐다보고 있으라고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았다. 우성은 작게 탄식과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민망해진 복자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지는 못하고, 대신 애먼 네이비 셔츠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우성은 한 손으로 적당히 붉어진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스친 후, 복자의 이마 위로 솜털같이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무게감 있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 실장이었다. 뭔가 묘하게 훈훈해진 주변의 핑크빛 기류를 느꼈는지, 거구의 사내가 겸연쩍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아... 죄송합니다만. 전무님, 이제 곧 파티가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