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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Sep 12. 2024

34. 배운 게 아니라면, 그냥 타고 난 건가?

서른 네번째 이야기 

     

 김 대리오늘이지?”     


이성그룹 관련 인터뷰 글들을 편집하고 있던 복자에게 고 팀장이 갑자기 얼굴을 들이민다.     


 창립 기념행사 말씀하시는 거죠?”     

 거기블랙 초대장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데 아닙니까?”     


기름기에 떡진머리를 볼펜 뒤쪽으로 긁으면서 장 기자가 끼어들었다머리 상태를 보아하니 아직 일주일은 넘지 않은 것 같다고 팀장이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재벌이 그냥 재벌이겠어어중이떠중이 부르면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지기자들도 굉장히 엄선한 최정예 요원들만 뽑았다고 하던데.”     

 그럼우리 김 대리가 거기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크악 장난 아니네김 대리가문의 영광이네친하게 지내자.”     


과하게 귀여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루돌프 스웨트를 입은 장 기자가 두 팔을 벌리며 오버를 떤다그 옆에 겨자색 앙고라 목폴라를 입은 홍 양이 박수를 치며 장단을 맞춘다.     


 “ 대리님진짜 좋겠다근데 나는 다 이렇게 될 줄 진즉에 알았거든요.”  

   

어느새 복자 옆으로 바싹 다가온 홍 양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앙고라 털이 나부끼며 공중에 떠올랐고복자의 코끝이 간질거렸다     


 엣취얘가 무슨 소리야엣취그냥 사보 제작 관계로 가는 거라니까.”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한 채로 새벽이 커피를 들고 탕비실에서 걸어나왔다.     

  

 좋냐?”     

 뭐가?”     


복자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묻자새벽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한다.     


 김복자내 말 까먹지 마라바람 들어가지 말라는 말.”     

 뭐라니.”     


별소리 다 듣겠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새벽의 말은 복자의 마음을 따끔하게 꼬집었다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사람은 본디 자기 깜냥을 알아야 덜 상처 받는 법이다.       


그때였다.     


 언제 왔어요일단 내 사무실로 들어가서 말하죠작가님.”     


고 팀장이 뒤돌아 출판사 입구 쪽에 서 있는 제이를 발견하고 말했다그는 체크 코트에 아래에는 검은 슬렉스와 같은 색깔의 첼시 부츠를 신은 채비스듬하게 문 쪽에 기대어 있었다표정이 조금은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쳐다보았다그러나제이는 일부러 그 시선을 피하며 빠르게 고 팀장과 함께 사라졌다   

  

 뭐야.”     


복자는 또 갑자기 냉랭해진 제이의 태도가 혼란스럽고 실망스러웠다그의 감정선을 따라가다가 말라 죽겠다문득혜교의 충고가 떠오른다.     


잘해줬다가쌀쌀맞았다가내가 보기에는 그런 남자가 매력은 있어도웬만한 여자는 감당 못 한다니는 그 웬만한 여자고     


 그럼그 오므라이스랑 감자스프는 뭐냐고이랬다저랬다.”     


복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탕비실에서 나온 홍 양이 복자 책상 위에 커피를 내려놓으면서 말한다.    

 

 정말 저 작가님은 언제 봐도 너무 잘 생기지 않았어요모델이나 하지그죠배우나.”  

   

 너도 눈이 삐었다저게 뭐가 잘 생겼니눈 쪽 찢어지고얼굴 밀가루 바른 거처럼 허~옇고입술은 새빨개가지고기생오라비 같은데.”     


따따따따.... 따발총을 적진에 쏴대는 것처럼 복자는 목까지 시뻘겋게 변해 흥분된 목소리로 빠르게 쏟아냈다옆에 서 있던 홍 양의 눈이 동그래지고뒤편에 있던 장 기자가 의자에 앉은 채로 밀면서 다가와 말했다.     


 김 대리그거 욕이야칭찬이야?”     




(고 팀장실 안)          


 정말 계속 그쪽으로 쓸 거야?”     


고 팀장이 분홍색 뿔테 안경을 벗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앞에 앉은 제이를 쏘아본다밖에서와는 달리 현정의 말투와 자세가 사무적이지 않다그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편한 오누이처럼 보였다제이는 말없이 책상 위의 핑크빛 깃털 펜을 장난스럽게 만지작거리기만 한다     

 

위험한 일이야그 책 나가는 거요즘 어떤 세상인데분명 그게 이성 이야기인지 금방 알게 될 거라고.”     


현정의 말이 끝나자 깃털을 매만지던 제이의 손이 멈추었다     


 금방 들통 나는 요즘 세상난 좋은데그래야 글 쓸 맛이 나죠사람들이 아무도 몰라주면 굳이 왜 쓰겠어요소설 따위를그리고 그 책은 엄청 팔릴 테니깐 누나한테도 좋은 거지,”     





     

복자의 폰이 울린다.     


 우성씨.”     


복자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다그녀는 전화를 받으며자연스럽게 테라스가 있는 야외 계단 쪽으로 나갔다.     


복자씨바쁘죠전화받을 수 있어요?     

 괜찮아요준비는 잘 돼가요?”     

하하좋아요복자씨가 그렇게 물어봐주니깐 뭔가 든든한데요이따가 이 실장이 출판사 앞으로 갈 거예요     

 이 실장님이요기념식은 오후 5시로 알고 있는데...아닌가요?”     

-맞는데... 잠깐 준비할 게 좀 있어서... 그래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우성의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 있다일단 알겠다고 전화를 끊었지만 아리송했다잠깐 준비해야 할 게 뭐가 있을까. “흠흠” 등 뒤에서 나는 인기척 소리에 깜짝 놀라 복자가 뒤를 돌아본다기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쓸어내리며 복자를 바라보는 제이의 눈매가 살짝 뾰족했다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걸까.     


 ... 출판사 왔네팀장이랑 무슨 회의가 있었나봐담당자인 나도 모르는...”     


 “.....”     


그는 어떤 대답도 없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갈색 눈빛이 뚫어져라 한 곳만을 응시한다복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하면서도 속 안에서 간질거리는 전율을 애써 무시했다.       


 뭐야대낮부터 이 후끈한 기운은... 미쳤나봐.    

 

복자의 노력도 소용없게 제이는 복자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한 발 한 발 멈추지 않고 적극적으로두 사람은 더 없이 가까워져 이마가 닿을 지경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딱 붙는데얘가 미쳤나아 사람 심장 떨려 죽겠네     

계단 발판 위로 두 사람의 발이 거의 닿을 듯한 거리만큼 가까워졌다그가 복자가 있는 쪽으로 한 손을 들어 올렸다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손은오른쪽 뺨에 붙은 속눈썹 한 개를 떼어냈다  

   

 .”     


복자는 저도 모르게 요상한 신음소리를 내쉬면서 두 눈을 꼭 감아버렸다그런데눈은 왜 감았을까내가 왜 그랬지그냥 반사적인 행동이라고 밖엔 설명이 되지 않는다실눈을 살짝 뜨더니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미세먼지 장난 아니야눈에 막 뭐가 들어가 가지고하하하 너 이상한 오해한 거 아니지?”     

 “ 자꾸 그런 건 어디 가서 배우나학원 같은 데 다녀?”     


복자의 동그란 코 위로제이의 오똑하게 솟은 콧날이 살짝 스치듯 지난다그의 입김이 복자의 얼굴 위로 연기처럼 퍼졌다가 사라졌다     


쿵쿵쿵.... 복자의 가슴이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리고두 뺨이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그녀는 바로 눈앞의 자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제이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어 괜히 애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뭐뭐가?? 뭘 배우는데.”     

 사람 미치게 하는 거떨리게 하는 거보고 싶게 만드는 거그런 거 너무 잘하잖아당신.”     



뭐야이 오글거림은으악 ... 내 손가락발가락이 없어지는 것 같아.

근데... 저런 눈빛으로목소리로 말하니깐 그냥 믿어버리고 싶잖아     

복자는 멍한 표정으로 제이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그의 갈색 눈동자 속에 제 얼굴이 가득 차 있다     


 배운 게 아니라면그냥 타고 난 건가김 복자?” 

 

아이씨.     

너는 나이도 어린 게 그런 섹시한 말투로 자꾸 누나 이름 부를래잿더미만 남았는데 다시 너는 불을 붙이냐어쩌다 이렇게 까지게 된 거니서른 넘은 누나 심장이 지금 박살이 난다박살이.

 

 “ 아하하왜 이래진짜!! 나 손가락 열 개 잘 붙어있냐손발이 오글거려 죽는 줄 알았다.”     


복자는 마음속에서 울렁이는 감정을 숨기려고 대려 싱거운 농담을 장난조로 던졌다그는 분명히, 100퍼센트 위험한 남자 유형이 맞는데 자꾸만 거기에 휘둘리는 자신도 싫었다     


복자가 손바닥을 제이 앞으로 펼치고 씨익 웃는다최대한 자연스럽게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그녀가 사무실 안과 연결된 테라스 문 쪽에 거의 다다랐을 때제이가 뒤돌아 담담히그렇지만 힘 있게 말했다.     


 이제 헷갈리게 안 해한 번 가보자고당신이랑어떻게 될지나도 궁금해졌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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