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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Sep 10. 2024

32. 지금, 얼굴 보여 줄 수 있어요?

서른 두번째 이야기 


어렴풋하게 새벽빛을 보고 잠시 눈을 감은 것 같은데다시 눈 떠보니 대낮이다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가 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아 엄마아빠 제주도 가셨지그럼나 오늘 쟤랑 둘이 있는 거야어색하다어색해얼굴 딱 보면 뭐라고 해야 하나~~ ~~”     


두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다어쩔 줄 몰라 하며 이불 사이로 머리를 숨겼다가다시 이불을 걷어내고 방 안을 서성인다엄지손톱을 이로 자꾸 물어뜯다가 방문 쪽을 쳐다보면서 하릴없이 한숨만 연거푸 내쉰다지난밤의 장면이 선명하게 눈앞에 스친다.     


다시 상종하면, ‘...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내가 술을 핑계로또 그 녀석이랑.

아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나 진짜 왜 이러는데.     


시계는 11시가 훨씬 넘어 점심때를 향해 가고 있었고이렇게 하루 종일 방 안에 갇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뭐 어때나는 취했고잠들었고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하면 돼뭐가 무서워서.”     


복자는 대충 얼굴에 붙은 눈곱을 떼어내고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꺼져 있는 텔레비전과 과묵한 소파말이 없는 거실 바닥 위로 닿은 복자의 맨발이 민망해진다아직은 느낌이지만이 집엔 아무도 없다는 기운이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맞은 편 묵묵히 서 있는 제이의 방문 쪽으로 걸어가 귀를 잠시 댄 후천천히 손잡이를 돌려본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제이는 없었다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기분으로화장실마당심지어 부모님 방까지 열어 보았지만모두 비어 있었다     


“ 없구나나갔구나그래 이런 날에 집에 붙어 있겠어?”      


그녀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약간의 아쉬움과 실망감이 묻어난다두 어깨를 아래로 축 내려트린 그녀는 터덜터덜 힘없이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그제야 배속의 허기가 확 느껴졌다     


아 뭘 먹나.”     


냉장고 속을 대충 훑어보다우유병을 집어 들었다잔을 집으러 싱크대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식탁 위로 복자의 시선이 멈추었다   

  

어머이게 뭐야?”     


식탁 위노란색 계란 이불을 덮고 있는 다소곳한 오므라이스와 볼록한 하얀색 뚜껑을 열어보니 아직 따끈한 감자스프고소하고 기분 좋은 냄새는 이곳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그 옆에 적힌 메모 하나.     


방금부모님은 일출봉을 오르셨다고 전화 오셨음메리크리스마스식사는 혼자서도 맛있게 하도록 산타>     


“ 뭐야글씨도 왜 이렇게 예뻐?”     


복자는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단정한 글씨체를 쓰다듬으면서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식탁 위를 내려다본다울컥한 마음이 찰랑거렸다  

        


 

 겨울 날씨 치곤 공기는 포근했다한낮의 강렬한 햇빛이 검은색 세단의 차체를 골고루 비춘다차는 외곽고속도로를 타고 20분을 더 달려서 양주 시청을 지나 하늘 숲’ 수목장 입구 쪽에 다다랐다차에서 검정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회색 중절모를 멋들어지게 둘러쓴 고 영감이 내린다모자 아래로 비쳐진 그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무겁고 차분해 보였다.

  

 열 다섯 개정도의 계단을 오르자탁 트인 언덕이 보였다위에는 하늘아래엔 초록 숲바라보는 자체로 눈 속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하늘 숲’ 수목장은 죽은 자들이 아름답게 흔적을 남긴 곳이라 처연한 아름다움이 감돌았다수십 그루의 참나무와 너도밤나무자작나무들이 둥글게 모여 있고한 개의 오솔길이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고 영감은 아래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중절모를 한 손으로 눌러 잡고그 오솔길을 천천히 밟는다오 분쯤 걸어 유난히 나무껍질이 하얀 자작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그 나무 앞에 짙은 회색 코트를 입은 제이가 보인다흔들리는 녹색의 이파리들이 그의 하얀 얼굴 아래 연두빛 그늘을 드리운다그는 알록달록 조화로 감싸진 한 인식표를 매만지고 있었다인식표에는 오 수정(1971~2000)'이라고 적혀 있었다

     

“ 오늘은 겨울 같지 않구나.”     


고 영감이 쓰고 있던 회색 중절모를 벗으며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게요여기 오는 날이면 늘 날씨가 좋잖아요.”     

허허그래수정이가 좋아하겠구나.”     


고 영감은 뒷짐을 지고유난히 맑고 쾌청한 겨울의 하늘 한쪽 끝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래전 한 사람을 회상하는 얼굴을 한 채로 말이다제이는 천천히 걸어 자작나무 기둥에 조심스럽게 기대어 앉았다     


엄마는 무조건 아주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서른 살너무 젊고 예쁜 나이인 것 같아요.”     

그럼당연하지이 녀석너 그걸 이제 알았냐?”     

그렇게 죽기엔 너무 아까운 나이였죠우리 엄만.”     


고 영감은 제이의 옆에 앉으며그의 한쪽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 오늘은 북촌으로 가자내일너 생일인데안 그래도 현정이가 미역 사 왔더라미역국은 먹어야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제이가 말없이 고 영감의 얼굴을 바라본다인상 좋게 주름진 그의 얼굴은 넉넉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제이의 갈색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있다 

    

그 생일 챙기지 마세요그 아이 17년 전에 이미 죽었으니까.”          





All by myself~ Don't wanna be~     

빨간색의 폭신한 수면 잠옷을 입은 복자는 소파 위에 가로로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다표정이 심각하다두툼한 소재의 초록색 보카시 양말을 뒤집어 쓴 두 발이 영화 속 음악에 맞춰 까딱거린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1.     


브리짓 언니라고 해야 하나이모라고 해야 하나     


화면 속 금발의 브리짓은 서른둘에도 잘 풀리지 않은 연애 사업과 외로움막막함그리고 뚱뚱함에 사무쳐 홀로 방 안에서 잠옷 바람으로 술에 취해 올바~~~마이쉘~를 울부짖고 있었다.      

  

오래된 영화인데도너무 와 닿는다

웃어야 되는 부분 같은데웃음이 나지 않는다.

남 일이 아니다.     


어이울지 마영국언니그쪽은 그래도 곧 멋진 변호사 남친도 생기고 결국엔 애도 낳고 잘 사니깐.”    

 

소파 아래 바닥에 놓인 접시가 꽤 멀다복자는 소파에 들러붙은 채로 최대한 접시 쪽으로 손을 뻗는다바로 일어나 조금만 걸어가면 될 것인데이미 손 뻗은 김에 꼭 이 자세로 성공해야 한다는 괜한 고집이 부려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순간찌리리리릭      


가운데 손가락 끝에서부터 오른쪽 팔을 타고어깨까지 기분 나쁜 통증이 빠르게 스친다. “으악” 단발마의 고통과 함께 눈가에 굵은 눈물방울이 맺혔다그래도 이 와중에 다행인 건손안에 오징어 다리 하나를 집는 거에 성공했다는 거다.

      

에이씨팔 빠질 뻔 했네.”     


오징어 다리를 질겅거리며 씹는데혜교에게서 전화가 왔다.     


~”     

-그 목소리 뭐꼬니 실망한 것 같다끊으까?     

무슨 아니야어디야오늘도 일 한 건 아니지?”     

-아 말도 마라어제 너무 피곤해서 잤다가 깨보니 지금 이 시간이드라.     

지금 초저녁인데어제 그렇게 일 많았어?”     

-알고무시브라어제 손톱에다가 산타 얼굴을 서른 개는 그린 것 같다아직도 손이 떨린다니 혼자 있겠네부모님제주도 가셨다 했잖아뭐 했노?     

“ 음 영화감상 중.”     

아이고그놈의 브리짓 존스니 그걸로 무슨 논문 쓰나내는 똑같은 영화 또 보기 싫든데청승 그만 떨고한잔하자너희 집으로 갈게     

우리 집?”     

누가 있나     

아니누가 있진 않지그래 와.”     

안 그래도 다 와 간다근데흰둥이 동네 입구에 지금 섰다먹을 거도 좀 사 왔는데들고 가야 할 거 같은데.     

“ 아니 차는 왜?”     

기름 넣는 거 깜박했다.     

큰일 날 뻔했네나 지금 바로 나가께.”      

서둘러 눈에 보이는 대로 소파 옆에 흘려놓은 두툼한 녹색 카디건을 걸치고 카키색 크록스를 질질 끌고 나갔다     

춥다어어?”

 


복자씨? ” 

    

오 마이 갓이게 누구야?     

대문 밖에 은색의 suv가 서 있었다그 앞에 우성이 한 손에 폰을 쥔 채 놀란 눈으로 복자를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얼굴엔 놀람과 반가움그리고 설렘이 묘하게 섞여 있다     


“ 이거 너무 신기한데요집 앞에 왔다고, 3분만 얼굴 봐도 괜찮을지 연락하려고 했거든요그런데이렇게 짠복자씨가 나온 거예요아직 전송도 안 눌렀는데우리 통한거죠?”     


그는 핸드폰에 찍은 문자 화면을 살짝 흔들어 보여 주었다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그를 보며 복자는 반갑기도설레기도 하면서머릿속이 복잡해진다코끝이 빨갰다   

  

 이 사람 언제부터 여기 서 있었던 걸까?     


양쪽 깃을 세운 헤링본 올리브색 자켓 안으로 코코아색 꽈배기 니트가 언뜻 보였다그는 평소보다 조금 편하고 가벼워 보이는 차림이었다그러다복자 자신의 옷차림이 번뜩 떠올랐다아부지 카디건에아래위 빨간색 수면 잠옷차림


아 왜 하필

이런 거대한 태양초 고추 차림일 때.     


그때 골목 입구 쪽에서부터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려온다.     


 김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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