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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Sep 09. 2024

31. 어쨌든 오늘은 크리스마스잖니...

서른 한번째 이야기 

      

 VIP병실과 연결된 가족 응접실 문이 열리고 다급한 얼굴을 한 우성이 들어온다.

      

 어머니.”     

 우성아.”     


민재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은 풀린다쉽게 감정의 변화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시는 분인데... 우성의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옆에 서 있던 김 비서가 우성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다     


 전무님 오셨습니까.”     

 김 비서님할아버지 상태는 좀 어떠세요..”     


김 비서는 이성 그룹 최 회장의 오랜 심복으로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성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예순이 넘은 나이였지만그는 여전히 총명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지금은 괜찮아지셨습니다다행히이 박사님이 바로 발견하셔서... 안에 이 박사님 계십니다곧 나오실 겁니다.”      


 다행이네요.”      


우성도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쉰다     


이 년 전만 해도 이러진 않으셨는데아버지도 많이 늙으신 거겠죠..”   

  

윤이 나는 갈색 가죽의자에 앉아 민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민재의 한쪽 어깨를 우성이 다정하게 맞잡는다그 모습을 바라보며 김 비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이제까지 정신력으로 버티신 겁니다부사장님 사고 이후로 마음의 상처가 크셨습니다.”     

 마음의 상처라... 그 단단하시던 분이 마음의 병이 단단히 나셨죠아버지한테 자식은 언제나 오빠 하나뿐이죠딸은 안중에도 없으시고.”      


민재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그녀의 목소리에 차가운 성에가 끼어 한기가 느껴진다최 회장을 향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김 비서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그에겐 최 회장은 평생을 모신 상사 이상의 의미였다든든한 형님이자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병실 문이 열리고흰 가운을 입은 선한 눈매를 가진 중년의 여성이 나온다그녀는 인상만큼이나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로 우성에게 인사를 건넨다   

  

 우성이 왔구나.”     

 외숙모할아버진 좀 괜찮으신 거예요?”     

 바이탈도 안정적이고지금은 걱정 안 해도 돼막 잠드셨어안정제 처방해드렸으니깐 두 시간은 푹 주무실 거야.”     


검은색 뿔테를 낀 그녀의 눈에 따뜻한 웃음이 묻어 있다그 미소를 보니 비로소 안심이 된다우성의 외숙모이자최 회장의 유일한 며느리인 이 진희’ 는 이성병원의 내과과장이자 그의 주치의다그녀는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편안한 인상을 풍긴다우성도자신의 어머니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그녀에게서 안정과 위안을 얻을 때가 많았고실제로 그녀도 조카인 우성을 친아들처럼 살뜰히 챙겼다그녀에겐 자식이 없었다     


진희는 17년 동안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돌보고 있다어른들이 맺어준 결혼이긴 했지만그녀는 진심으로 남편을 사랑했다사고의 충격으로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머리칼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당시 열여덟 살이던 우성도 그날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17년 전의 일이지만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린 외숙모의 넋이 빠진 그 얼굴을피투성이가 된 외숙부를 끌어안고 병실 바닥에 주저앉아 절규하던 그녀를 그리고 그 날자신의 하나뿐인 사촌 동생 서준의 죽음을 알았다     


인형처럼 예뻤던 여덟 살짜리 최 서준유난히 우성을 잘 따랐던 녀석은 저에게 작별 인사를 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먼 곳으로 떠나 버렸다    

      

잠시 생각에 빠진 우성의 오른쪽 어깨 위로 진희의 따뜻한 손이 올라갔다풍성한 백발 머리를 위로 단정하게 틀어 올린 그녀의 스타일은 묘하게 신비스러운 느낌을 풍긴다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짧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바빠서외숙모죄송했어요.”     

 뭐가 죄송해?”     

 외숙부찾아뵙지 못한 거요이따 가기 전에 한 번 병실에 찾아뵐게요.”     

 “ 난 또뭐라고괜찮아외삼촌도 이해하셔우성아.”     


우성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던 진희가 고개를 돌려 민재와 눈이 마주쳤다민재의 눈빛이 날카롭고 건조하다진희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무미건조한 눈빛을 주고받았고얼마 후 진희가 짧게 목 인사를 한 후 가족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아직까진 회장님 상태가 언론에 새 나가지 않아 다행이지만자꾸 이런 사태가 반복되면 곧 그들도 낌새를 차릴 겁니다경영권이 완전히 넘어 온 것도 아니고일부 주주들 중엔 딴생각하는 자들도 있고한 시라도 빨리 정리가 돼야 할 것 같네요내일모레 있을 창립 기념 파티 잡음 없이 마무리 잘해주세요.”     


민재는 진희가 나간 문을 차갑게 바라보며말했다뒤에 서 있던 김 비서가 짧게 알겠습니다.”라고 답했고우성의 표정도 짐짓 어두워졌다역시어머니는 빈틈이 없으신 분이다이런 상황에서도왠지 모르게 우성의 마음이 쓸쓸해졌다.       


  



 새벽빛이 푸르스름하게 들어오는 병실 안     

벽 한 면을 감싸고 있는 통유리 바깥으로 우성은 병원 아래 정원을 바라보고 있다푸릇함이 남아있는 조경 잔디 위로 거대한 야외 조명전구가 둘러싸인 눈뭉치 조형물 사이로 5m 높이의 크리스마스트리와 그 주변을 에워싼 회전목마가 번쩍이고 있었다 

    

 흐흐흠”      


작은 인기척 소리에 얼른 뒤돌아본다.    

 

 할아버지좀 어떠세요?”     


우성의 얼굴을 확인하고 최 회장의 입가 주름이 부드럽게 펴진다     


 “ 우성이구나.”     


자리에서 몸을 막 일으키려하던 최 회장이 왼쪽 가슴을 움켜진다그의 단단한 이마 아래 짙은 눈썹 사이로 굵은 주름 두 줄이 아래 방향으로 그어졌다    

 

 갑자기 일어나시면 위험해요할아버지.”     

 “ 어허허그래그래.”     

 

푹신한 베개 위로 다시 머리를 가누는 최 회장그는 한결 편한 얼굴로 우성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냐?”     

 “ 조금 전에요.”     


우성은 재빨리 침대 아래 연결된 슬립센스 수치를 확인하며 대답했다약 1cm 정도의 두께의 화면 위로 최 회장의 맥박과 호흡심박 수치가 자동으로 기록되며 안정적이라는 녹색 글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지나갔다    

      

 “ 오늘이 25일이지그럼 크리스마스.”     


최 회장을 바라보던 우성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간다진중한 눈에 설핏 장난스러움이 비친다 

    

 “ 왜 웃어할애비가 그런 말 하니깐 안 어울리냐?”     

 “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라고 하시니깐 좀 어색해서요.”    

 

활짝 미소 짓고 있는 우성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최 회장이 조용히 입을 뗀다.     


 “ ...조금 달라 보인다우성아.”     


깊은 주름 속에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었지만최 회장의 눈빛은 예리하고 섬세했다아직 입 끝에 미소가 남아있는 우성은 그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얼굴이다     


 “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아주 옛날에네 외삼촌이 너만한 나이일 때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하더구나암튼우성이 너는 얼핏 보면 엄마보다는 외삼촌을 더 닮은 거 같아부드럽고 따뜻하고.”   

  

최 회장은 어딘가에 남아 있는 기억의 조각을 들추며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말했다투박스럽고 단단한 그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쥔 우성은 가만히 그 말에 귀 기울인다     


 이즈음이었는데  고 녀석 생일 말이다.”     

 서준...이요?”     

 그래서준이고 녀석 참 영특했는데... 날 처음 보던 날에도 기하나 죽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더구나그 때가 다섯 살인가여섯 살인가 그랬지다시 돌아간다면... 그냥 자식이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두었을 텐데그 땐 그게 얼마나 평범하고 보잘 것 없게만 보이던지내 아들이지만 한심하더구나사내놈이 야망도 없이 근본도 없는 여자랑 사는 것도 모자라 둘 사이에 애까지 만들어 버리고... 회사도 버리겠다고 하고나로썬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내 기대만큼 해주지 않는 아들을 원망했지나가서 죽으라고 했지하지만 ... 정말로 그런 모습으로 돌아올지는 상상도 못 했다.”  

   

최 회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더니 그의 눈가 아래로 굵은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한 번도 본 적 없던 할아버지의 눈물에 우성은 당황하며그의 손을 세게 잡아 쥐었다    

 

 “ ,할아버지...”     

 허허나도 늙었다늙었어지나온 시간들을 후회하는 걸 보면.”     

 아니에요할아버지얼마나 열심히 ... 최선을 다해서 사셨는데요.”     

 최선을 다해... 돈만 좇았어진짜 중요한 건 지나쳤지우성아너는 그러지 마라진짜 중요한 건후회하지 않고 사는 거다.”     

 “...후회하지 않고...”     

 “ 지금내 감정에 충실히 사는 거아마 나보다 아래층에 누워있는 네 외삼촌이 후회는 더 적을 거다그러니깐 이 할애비 말은... 오늘 같은 날이성그룹 손자니 뭐니 이런저런 꼬리표 다 떼버리고그냥 너 자체로 봐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보내란 말이다진짜그런 사람이 있다면 말이야너는 행운아겠지만.어쨌든 오늘은 크리스마스잖니사랑이 없다면결국 인생에 남는 게 없더구나.”     


우성의 마음 한쪽이 꿈틀거리더니저도 모르게 떠오른 한 사람의 얼굴로 감정이 벅차올랐다세상의 모든 특별한 날들이 고마워진다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주니까 말이다그래그래서 크리스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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