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한번째 이야기
VIP병실과 연결된 가족 응접실 문이 열리고 다급한 얼굴을 한 우성이 들어온다.
“어머니.”
“우성아.”
민재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은 풀린다. 쉽게 감정의 변화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시는 분인데... 우성의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옆에 서 있던 김 비서가 우성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다.
“전무님 오셨습니까.”
“아, 김 비서님. 할아버지 상태는 좀 어떠세요..”
김 비서는 이성 그룹 최 회장의 오랜 심복으로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성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예순이 넘은 나이였지만, 그는 여전히 총명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지금은 괜찮아지셨습니다. 다행히, 이 박사님이 바로 발견하셔서... 안에 이 박사님 계십니다. 곧 나오실 겁니다.”
“네. 다행이네요.”
우성도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쉰다.
“이 년 전만 해도 이러진 않으셨는데. 아버지도 많이 늙으신 거겠죠..”
윤이 나는 갈색 가죽의자에 앉아 민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민재의 한쪽 어깨를 우성이 다정하게 맞잡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김 비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이제까지 정신력으로 버티신 겁니다. 부사장님 사고 이후로 마음의 상처가 크셨습니다.”
“마음의 상처라... 그 단단하시던 분이 마음의 병이 단단히 나셨죠. 아버지한테 자식은 언제나 오빠 하나뿐이죠. 딸은 안중에도 없으시고.”
민재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목소리에 차가운 성에가 끼어 한기가 느껴진다. 최 회장을 향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김 비서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에겐 최 회장은 평생을 모신 상사 이상의 의미였다. 든든한 형님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병실 문이 열리고, 흰 가운을 입은 선한 눈매를 가진 중년의 여성이 나온다. 그녀는 인상만큼이나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로 우성에게 인사를 건넨다.
“어? 우성이 왔구나.”
“외숙모, 할아버진 좀 괜찮으신 거예요?”
“응, 바이탈도 안정적이고. 지금은 걱정 안 해도 돼. 막 잠드셨어. 안정제 처방해드렸으니깐 두 시간은 푹 주무실 거야.”
검은색 뿔테를 낀 그녀의 눈에 따뜻한 웃음이 묻어 있다. 그 미소를 보니 비로소 안심이 된다. 우성의 외숙모이자, 최 회장의 유일한 며느리인 ‘이 진희’ 는 이성병원의 내과과장이자 그의 주치의다. 그녀는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편안한 인상을 풍긴다. 우성도, 자신의 어머니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그녀에게서 안정과 위안을 얻을 때가 많았고, 실제로 그녀도 조카인 우성을 친아들처럼 살뜰히 챙겼다. 그녀에겐 자식이 없었다.
진희는 17년 동안,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돌보고 있다. 어른들이 맺어준 결혼이긴 했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남편을 사랑했다. 사고의 충격으로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머리칼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당시 열여덟 살이던 우성도 그날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17년 전의 일이지만,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린 외숙모의 넋이 빠진 그 얼굴을. 피투성이가 된 외숙부를 끌어안고 병실 바닥에 주저앉아 절규하던 그녀를 그리고 그 날, 자신의 하나뿐인 사촌 동생 서준의 죽음을 알았다.
인형처럼 예뻤던 여덟 살짜리 최 서준. 유난히 우성을 잘 따랐던 녀석은 저에게 작별 인사를 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먼 곳으로 떠나 버렸다.
잠시 생각에 빠진 우성의 오른쪽 어깨 위로 진희의 따뜻한 손이 올라갔다. 풍성한 백발 머리를 위로 단정하게 틀어 올린 그녀의 스타일은 묘하게 신비스러운 느낌을 풍긴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짧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바빠서. 외숙모. 죄송했어요.”
“응? 뭐가 죄송해?”
“외숙부. 찾아뵙지 못한 거요. 이따 가기 전에 한 번 병실에 찾아뵐게요.”
“ 난 또. 뭐라고. 괜찮아. 외삼촌도 이해하셔. 우성아.”
우성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던 진희가 고개를 돌려 민재와 눈이 마주쳤다. 민재의 눈빛이 날카롭고 건조하다. 진희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무미건조한 눈빛을 주고받았고, 얼마 후 진희가 짧게 목 인사를 한 후 가족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아직까진 회장님 상태가 언론에 새 나가지 않아 다행이지만. 자꾸 이런 사태가 반복되면 곧 그들도 낌새를 차릴 겁니다. 경영권이 완전히 넘어 온 것도 아니고, 일부 주주들 중엔 딴생각하는 자들도 있고. 한 시라도 빨리 정리가 돼야 할 것 같네요. 내일모레 있을 창립 기념 파티 잡음 없이 마무리 잘해주세요.”
민재는 진희가 나간 문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뒤에 서 있던 김 비서가 짧게 “알겠습니다.”라고 답했고, 우성의 표정도 짐짓 어두워졌다. 역시, 어머니는 빈틈이 없으신 분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왠지 모르게 우성의 마음이 쓸쓸해졌다.
새벽빛이 푸르스름하게 들어오는 병실 안,
벽 한 면을 감싸고 있는 통유리 바깥으로 우성은 병원 아래 정원을 바라보고 있다. 푸릇함이 남아있는 조경 잔디 위로 거대한 야외 조명전구가 둘러싸인 눈뭉치 조형물 사이로 5m 높이의 크리스마스트리와 그 주변을 에워싼 회전목마가 번쩍이고 있었다.
“흐흐흠”
작은 인기척 소리에 얼른 뒤돌아본다.
“할아버지? 좀 어떠세요?”
우성의 얼굴을 확인하고 최 회장의 입가 주름이 부드럽게 펴진다.
“ 우성이구나.”
자리에서 몸을 막 일으키려하던 최 회장이 왼쪽 가슴을 움켜진다. 그의 단단한 이마 아래 짙은 눈썹 사이로 굵은 주름 두 줄이 아래 방향으로 그어졌다.
“갑자기 일어나시면 위험해요. 할아버지.”
“ 어허허. 그래그래.”
푹신한 베개 위로 다시 머리를 가누는 최 회장. 그는 한결 편한 얼굴로 우성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냐?”
“ 조금 전에요.”
우성은 재빨리 침대 아래 연결된 슬립센스 수치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약 1cm 정도의 두께의 화면 위로 최 회장의 맥박과 호흡, 심박 수치가 자동으로 기록되며 ‘안정적’이라는 녹색 글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지나갔다.
“ 오늘이 25일이지? 그럼 크리스마스.”
최 회장을 바라보던 우성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간다. 진중한 눈에 설핏 장난스러움이 비친다.
“ 너, 왜 웃어? 할애비가 그런 말 하니깐 안 어울리냐?”
“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라고 하시니깐 좀 어색해서요.”
활짝 미소 짓고 있는 우성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최 회장이 조용히 입을 뗀다.
“ 너...조금 달라 보인다. 우성아.”
깊은 주름 속에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었지만, 최 회장의 눈빛은 예리하고 섬세했다. 아직 입 끝에 미소가 남아있는 우성은 그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얼굴이다.
“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옛날에. 네 외삼촌이 너만한 나이일 때.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하더구나. 암튼, 우성이 너는 얼핏 보면 엄마보다는 외삼촌을 더 닮은 거 같아. 부드럽고 따뜻하고….”
최 회장은 어딘가에 남아 있는 기억의 조각을 들추며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말했다. 투박스럽고 단단한 그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쥔 우성은 가만히 그 말에 귀 기울인다.
“이즈음이었는데 고 녀석 생일 말이다.”
“서준...이요?”
“그래. 서준이. 고 녀석 참 영특했는데... 날 처음 보던 날에도 기하나 죽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더구나. 그 때가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가 그랬지. 다시 돌아간다면... 그냥 자식이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두었을 텐데. 그 땐 그게 얼마나 평범하고 보잘 것 없게만 보이던지. 내 아들이지만 한심하더구나. 사내놈이 야망도 없이 근본도 없는 여자랑 사는 것도 모자라 둘 사이에 애까지 만들어 버리고... 회사도 버리겠다고 하고. 나로썬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내 기대만큼 해주지 않는 아들을 원망했지. 나가서 죽으라고 했지. 하지만 ... 정말로 그런 모습으로 돌아올지는 상상도 못 했다.”
최 회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더니 그의 눈가 아래로 굵은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할아버지의 눈물에 우성은 당황하며, 그의 손을 세게 잡아 쥐었다.
“ 할,할아버지...”
“허허. 나도 늙었다. 늙었어. 지나온 시간들을 후회하는 걸 보면.”
“아니에요. 할아버지. 얼마나 열심히 ... 최선을 다해서 사셨는데요.”
“최선을 다해... 돈만 좇았어. 진짜 중요한 건 지나쳤지. 우성아, 너는 그러지 마라. 진짜 중요한 건, 후회하지 않고 사는 거다.”
“...후회하지 않고...”
“ 지금, 내 감정에 충실히 사는 거. 아마 나보다 아래층에 누워있는 네 외삼촌이 후회는 더 적을 거다. 그러니깐 이 할애비 말은... 오늘 같은 날, 이성그룹 손자니 뭐니 이런저런 꼬리표 다 떼버리고, 그냥 너 자체로 봐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보내란 말이다. 진짜,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말이야. 너는 행운아겠지만.어쨌든 오늘은 크리스마스잖니. 사랑이 없다면, 결국 인생에 남는 게 없더구나.”
우성의 마음 한쪽이 꿈틀거리더니, 저도 모르게 떠오른 한 사람의 얼굴로 감정이 벅차올랐다. 세상의 모든 특별한 날들이 고마워진다.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주니까 말이다. 그래, 그래서 크리스마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