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두번째 이야기
어렴풋하게 새벽빛을 보고 잠시 눈을 감은 것 같은데, 다시 눈 떠보니 대낮이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가 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아 엄마, 아빠 제주도 가셨지. 그럼, 나 오늘 쟤랑 둘이 있는 거야? 아, 어색하다. 어색해. 얼굴 딱 보면 뭐라고 해야 하나. 아~~ 아~~”
두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불 사이로 머리를 숨겼다가, 다시 이불을 걷어내고 방 안을 서성인다. 엄지손톱을 이로 자꾸 물어뜯다가 방문 쪽을 쳐다보면서 하릴없이 한숨만 연거푸 내쉰다. 지난밤의 장면이 선명하게 눈앞에 스친다.
다시 상종하면, ‘개.미.친.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내가 술을 핑계로, 또 그 녀석이랑.
아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나 진짜 왜 이러는데.
시계는 11시가 훨씬 넘어 점심때를 향해 가고 있었고, 이렇게 하루 종일 방 안에 갇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뭐 어때. 나는 취했고, 잠들었고,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하면 돼. 뭐가 무서워서.”
복자는 대충 얼굴에 붙은 눈곱을 떼어내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꺼져 있는 텔레비전과 과묵한 소파, 말이 없는 거실 바닥 위로 닿은 복자의 맨발이 민망해진다. 아직은 느낌이지만, 이 집엔 아무도 없다는 기운이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맞은 편 묵묵히 서 있는 제이의 방문 쪽으로 걸어가 귀를 잠시 댄 후, 천천히 손잡이를 돌려본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제이는 없었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화장실, 마당, 심지어 부모님 방까지 열어 보았지만, 모두 비어 있었다.
“ 없구나. 나갔구나. 그래 이런 날에 집에 붙어 있겠어?”
그녀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약간의 아쉬움과 실망감이 묻어난다. 두 어깨를 아래로 축 내려트린 그녀는 터덜터덜 힘없이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그제야 배속의 허기가 확 느껴졌다.
“아 뭘 먹나.”
냉장고 속을 대충 훑어보다, 우유병을 집어 들었다. 잔을 집으러 싱크대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식탁 위로 복자의 시선이 멈추었다.
“어머, 이게 뭐야?”
식탁 위. 노란색 계란 이불을 덮고 있는 다소곳한 오므라이스와 볼록한 하얀색 뚜껑을 열어보니 아직 따끈한 감자스프. 고소하고 기분 좋은 냄새는 이곳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옆에 적힌 메모 하나.
< 방금, 부모님은 일출봉을 오르셨다고 전화 오셨음. 메리크리스마스. 식사는 혼자서도 맛있게 하도록 - 산타>
“ 뭐야. 글씨도 왜 이렇게 예뻐?”
복자는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단정한 글씨체를 쓰다듬으면서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식탁 위를 내려다본다. 울컥한 마음이 찰랑거렸다.
겨울 날씨 치곤 공기는 포근했다. 한낮의 강렬한 햇빛이 검은색 세단의 차체를 골고루 비춘다. 차는 외곽고속도로를 타고 20분을 더 달려서 양주 시청을 지나 ‘하늘 숲’ 수목장 입구 쪽에 다다랐다. 차에서 검정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회색 중절모를 멋들어지게 둘러쓴 고 영감이 내린다. 모자 아래로 비쳐진 그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무겁고 차분해 보였다.
열 다섯 개정도의 계단을 오르자, 탁 트인 언덕이 보였다. 위에는 하늘, 아래엔 초록 숲. 바라보는 자체로 눈 속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하늘 숲’ 수목장은 죽은 자들이 아름답게 흔적을 남긴 곳이라 처연한 아름다움이 감돌았다. 수십 그루의 참나무와 너도밤나무, 자작나무들이 둥글게 모여 있고, 한 개의 오솔길이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고 영감은 아래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중절모를 한 손으로 눌러 잡고, 그 오솔길을 천천히 밟는다. 오 분쯤 걸어 유난히 나무껍질이 하얀 자작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그 나무 앞에 짙은 회색 코트를 입은 제이가 보인다. 흔들리는 녹색의 이파리들이 그의 하얀 얼굴 아래 연두빛 그늘을 드리운다. 그는 알록달록 조화로 감싸진 한 인식표를 매만지고 있었다. 인식표에는 ‘오 수정(1971~2000)'이라고 적혀 있었다.
“ 오늘은 겨울 같지 않구나.”
고 영감이 쓰고 있던 회색 중절모를 벗으며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게요. 여기 오는 날이면 늘 날씨가 좋잖아요.”
“허허. 그래. 수정이가 좋아하겠구나.”
고 영감은 뒷짐을 지고, 유난히 맑고 쾌청한 겨울의 하늘 한쪽 끝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래전 한 사람을 회상하는 얼굴을 한 채로 말이다. 제이는 천천히 걸어 자작나무 기둥에 조심스럽게 기대어 앉았다.
“엄마는 무조건 아주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른 살. 너무 젊고 예쁜 나이인 것 같아요.”
“그럼, 당연하지. 이 녀석. 너 그걸 이제 알았냐?”
“그렇게 죽기엔 너무 아까운 나이였죠. 우리 엄만.”
고 영감은 제이의 옆에 앉으며, 그의 한쪽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 오늘은 북촌으로 가자. 내일, 너 생일인데. 안 그래도 현정이가 미역 사 왔더라. 미역국은 먹어야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제이가 말없이 고 영감의 얼굴을 바라본다. 인상 좋게 주름진 그의 얼굴은 넉넉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제이의 갈색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있다.
“그 생일 챙기지 마세요. 그 아이 17년 전에 이미 죽었으니까.”
All by myself~ Don't wanna be~
빨간색의 폭신한 수면 잠옷을 입은 복자는 소파 위에 가로로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다. 표정이 심각하다. 두툼한 소재의 초록색 보카시 양말을 뒤집어 쓴 두 발이 영화 속 음악에 맞춰 까딱거린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1편.
브리짓 언니라고 해야 하나? 이모라고 해야 하나?
화면 속 금발의 브리짓은 서른둘에도 잘 풀리지 않은 연애 사업과 외로움, 막막함, 그리고 뚱뚱함에 사무쳐 홀로 방 안에서 잠옷 바람으로 술에 취해 " 올바~~~마이쉘~프”를 울부짖고 있었다.
오래된 영화인데도, 너무 와 닿는다.
웃어야 되는 부분 같은데, 웃음이 나지 않는다.
남 일이 아니다.
“어이, 울지 마. 영국언니. 그쪽은 그래도 곧 멋진 변호사 남친도 생기고 결국엔 애도 낳고 잘 사니깐.”
소파 아래 바닥에 놓인 접시가 꽤 멀다. 복자는 소파에 들러붙은 채로 최대한 접시 쪽으로 손을 뻗는다. 바로 일어나 조금만 걸어가면 될 것인데. 이미 손 뻗은 김에 꼭 이 자세로 성공해야 한다는 괜한 고집이 부려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순간, 찌리리리릭
가운데 손가락 끝에서부터 오른쪽 팔을 타고, 어깨까지 기분 나쁜 통증이 빠르게 스친다. “으악” 단발마의 고통과 함께 눈가에 굵은 눈물방울이 맺혔다. 그래도 이 와중에 다행인 건, 손안에 오징어 다리 하나를 집는 거에 성공했다는 거다.
“에이씨. 팔 빠질 뻔 했네.”
오징어 다리를 질겅거리며 씹는데, 혜교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야? 그 목소리 뭐꼬? 니 실망한 것 같다. 끊으까?
“무슨 아니야. 어디야? 오늘도 일 한 건 아니지?”
-아 말도 마라. 어제 너무 피곤해서 잤다가 깨보니 지금 이 시간이드라.
“뭐? 지금 초저녁인데. 어제 그렇게 일 많았어?”
-알고, 무시브라. 어제 손톱에다가 산타 얼굴을 서른 개는 그린 것 같다. 아직도 손이 떨린다. 니 혼자 있겠네? 부모님, 제주도 가셨다 했잖아. 뭐 했노?
“ 나? 음 영화감상 중.”
- 아이고. 그놈의 브리짓 존스. 니 그걸로 무슨 논문 쓰나? 내는 똑같은 영화 또 보기 싫든데. 청승 그만 떨고. 한잔하자. 너희 집으로 갈게.
“우리 집?”
- 와? 누가 있나?
“아니. 뭐. 누가 있진 않지. 그래 와.”
- 안 그래도 다 와 간다. 근데, 흰둥이 동네 입구에 지금 섰다. 먹을 거도 좀 사 왔는데. 들고 가야 할 거 같은데.
“ 아니 차는 왜?”
- 기름 넣는 거 깜박했다.
“큰일 날 뻔했네. 나 지금 바로 나가께.”
서둘러 눈에 보이는 대로 소파 옆에 흘려놓은 두툼한 녹색 카디건을 걸치고 카키색 크록스를 질질 끌고 나갔다.
“으~ 춥다. 어어?”
“어? 복자씨? ”
오 마이 갓. 이게 누구야?
대문 밖에 은색의 suv가 서 있었다. 그 앞에 우성이 한 손에 폰을 쥔 채 놀란 눈으로 복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놀람과 반가움, 그리고 설렘이 묘하게 섞여 있다.
“ 이거 너무 신기한데요? 집 앞에 왔다고, 3분만 얼굴 봐도 괜찮을지 연락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짠, 복자씨가 나온 거예요. 아직 전송도 안 눌렀는데. 우리 통한거죠?”
그는 핸드폰에 찍은 문자 화면을 살짝 흔들어 보여 주었다.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그를 보며 복자는 반갑기도, 설레기도 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코끝이 빨갰다.
이 사람 언제부터 여기 서 있었던 걸까?
양쪽 깃을 세운 헤링본 올리브색 자켓 안으로 코코아색 꽈배기 니트가 언뜻 보였다. 그는 평소보다 조금 편하고 가벼워 보이는 차림이었다. 그러다, 복자 자신의 옷차림이 번뜩 떠올랐다. 아부지 카디건에, 아래위 빨간색 수면 잠옷차림.
아 왜 하필.
이런 거대한 태양초 고추 차림일 때.
그때 골목 입구 쪽에서부터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려온다.
“김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