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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Sep 11. 2024

33. 미친 거 아는 데 둘 다 좋아.

서른 세번째 이야기 

         

 복자와 우성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찰나에 골목 입구 쪽에서부터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려온다.     


 김복자!”     


혜교다어둠을 뚫고 갈색 털 코트를 입은 그녀가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다자다 일어나 거칠게 헝클어진 혜교의 머리칼은 그녀의 야생성을 더욱 부각시켰다우성은 누구냐는 눈빛을 보내왔고복자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친구라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안녕하세요민우성입니다복자씨 잠깐 보러 왔었습니다.”      


우성은 살짝 얼이 나간 표정의 혜교에게 먼저 정중히 인사를 했다부드럽고 정중한 그의 목소리가 어두운 밤 골목 안에서 울렸다혜교는 복자와 우성의 얼굴을 번갈아 한 번씩 쳐다보았다.      

 

 전 복자 친구 혜교고요추운데 밖에서 이러지 말고 안에 같이 들어가는 거 어때요우성씨라고 했나?”     


갑작스런 혜교의 제안에 복자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본다거기다 그 어색한 표준말은 또 뭐고? ‘뭐야?’라는 눈빛을 보내고 혜교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헤헤 웃었다그때우성의 자켓 안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다피할 수가 없는 전화인지그는 “ 잠시만요.” 이라 말하며 한 손을 들고고개를 돌려 짧게 통화한다     

그런 사소한 행동에도 ~” 혜교는 감탄사를 보내며 넋 나간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다복자는 헤벌쭉하게 벌어진 혜교의 턱을 아래에서 살짝 올려 주었다

 

 그래알았어그래.” 간단한 단답형의 말만 하더니그는 전화를 끊고 다시 혜교와 복자가 있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이거 어쩌죠저도 정말 같이 하고 싶은데잠시 빠져나온 거라서 다시 회사로 들어가봐야겠네요.”     

 어머머이런 날에도 야근하는 회사가 있어요완전 노동착취다.”      

 “ 아하하그러게요다음에 한 번 자리 정식으로 만들죠그리고 이거전해주려고 왔어요.”     


우성은 올리브색 자켓 안쪽 주머니에서 손바닥크기 만한 크기의 검정색 카드를 꺼내 복자에게 건넸다검정색 바탕의 봉투 안을 얼핏 들여다보니 금색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초대장이에요복자씨꼭 와줄 거죠?”     

 초대장이요?”     


검정색 카드를 쥔 채로 멍하게 서 있는 복자의 두 손을 우성이 한 손으로 감싼다그의 눈빛이 한없이 포근하다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 서서 혜교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은 정말 이제 가야하는 시간이 왔는지아쉬움에 복자의 손을 조금 세게 잡았다가 살며시 놓았다그리고는 가볍게 인사를 한 후옆에 있던 은색 suv에 올라탔다날렵한 곡선을 뽐내며 엠블런이 좁은 골목길을 빠져 나가자혜교의 콧구멍에서 거친 숨소리가 연발로 쏫아져 나왔다    

 

 “ 김복자 이 복 터진 가시내야오늘 밤에 털어놓을 얘기가 장난 아니겠다그자.”     

          



그니까 니 말은... 와 이거 장난 아니네진짜민 우성이란 남자랑은 엘리베이터에서 만났고여차저차 여기까지 온 거다 이 말 아이가근데 그 남자가 이 그니까 그 이성 그룹에서 오너 가족 중에 하나고거기다가 완전 훈남에 그 매너에... 김복자 인생에 이런 날도 오네가스나야니 완전 로또 맞았다로또나는 니가 그때 포장마차 뛰어온 이쁘장하게 생긴 가랑 뭐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이쁘장한 아는 저 옆방에 살고 있어.”     

 “ 뭐어어어...!!”     


혜교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던 복자가 한쪽 턱을 괴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말을 하고 나니 정말 자신이 난잡한 연애를 즐기는 선수가 되어버린 것 같다     


 잠만잠만 있어봐라.”      


혜교가 반쯤 남은 맥주잔을 한 입에 털어 놓고 연신 눈을 껌벅거린다업데이트화 과정이 영 더뎠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완전 사는 게 아니고아무튼 3개월만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했어나랑 작업 중인 작가야근데 문제는..... 걔랑도 나 키스했어근데 그게 안 지워져자꾸 밟혀.”     


턱이 다물어지지 않는지한동안 입을 벌린 채로 혜교가 복자를 바라본다  

   

 이게 무슨 상황이고지금 니가 로또를 두 번 맞았다는 뜻이가아니면 로또 맞은 종이를 세탁기에 넣고 빨았다는 뜻이가.”     

 그러게미친 거 아는 데... 나 둘 다 좋은 거 같아그래둘 다 좋아나도 이런 내가 재수가 없다.”     


간절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복자를 보고혜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재수는 없는데근데 이해는 된다포장마차에 온 그 남자가 오죽 잘 생겼어야지근데 니보다 나이도 어리고행동도 들쭉날쭉하다매잘해줬다가쌀쌀맞았다가내가 보기에는 그런 남자가 매력은 있어도웬만한 여자는 감당 못한다니는 그 웬만한 여자고근데 마음에 걸리는 거는그 남자도그리고 방금 그 우성이란 사람도 진짜 니를 좋아하는 것 같든데... 몰라 몰라~~ 내가 다 머리가 터지겄다서른 평생 남자 복 없던 김 복자 인생에 이게 무슨 일이고?”     


 내말이순서대로나 오던지... 이렇게 겹쳐서 올 줄 누가 알았겠냐내 인생의 운을 여기서 다 쓴다젠장.”     

.

.     


 복자는 팔다리를 크게 벌린 채로 잠에 빠진 혜교 위에 도톰한 담요를 덮어 주었다그리고 침대 한 편에 기대어 앉아 아까 우성이 주고 간 검은색 카드를 다시 열어 보았다검정색 봉투 안에는 번쩍거리는 금박에 invitation 글자가 도톰하게 올라와 있었다그 아래에는 김복자 이름이 흘림체로 쓰여 있었다아마 우성이 썼을 것이리라글자는 힘 있고 기품이 느껴졌다복자는 제 이름을 손으로 만져보았다뒷장에는 이성그룹 55주년 창립기념’ 이란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당신에게 가려면 이런 초대장이 필요한 거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복자는 복잡한 눈빛으로 초대장을 내려다보았다앉은 자리에서 두 무릎을 세운 채그 위로 고개를 가누었다그녀의 마음이 설레면서도 한편쓸쓸해졌다.        


 



(최 회장의 vip 병실 안)    

 

 "자네... 좀 어떤가?”     


고 영감의 얼굴이 걱정스럽게 찌푸려졌다그러나 침대 위 최 회장은 느긋한 눈으로 고 영감은 올려다본다     


 괜찮아뭘 별스럽게 여기까지 오고 난리야안 그래도 내일 퇴원할걸세창립 기념행사도 있고....”     

 자네나 나나 이제 늙었다고자네는 게다가 심장이.”     

 “ 잔소리는... 진짜 자네 늙었나보네그렇게 쉽게 안 죽어내가 어서 죽기만을 바라는 자들한테는 미안한 소리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고.”     


최 회장의 짙은 눈썹이 부드럽게 아래로 휘어지고 양 눈가 사이로 깊은 주름이 잡혔다     


 자네그게 무슨 말인가자네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     

 자식을 제대로 못 키운 내 죄가 크지아무튼 그 아이는 어떻게 지내나잘 지내고 있나?… 아직도 날 보길 싫어하겠지.”     


단단하던 최 회장의 눈빛과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애절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고 영감의 얼굴이 난처해 보인다그와 50년이 넘은 지음의 관계인최 회장이 그 표정을 놓칠 리가 없었다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벼운 투로 말한다.     


 그래사내자식이 그만한 고집은 좀 있어야지그래야 큰일을 하지허허그런 점은 쟤 아비보다 날 닮았구먼다행이야.”     

 내가 좀 더 채근해 보겠네자네 몸 상태도 이야기하고...”  

   

고 영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최 회장이 손사래를 치며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말한다.       


 아니절대절대 그러지 말게어쨌든 나도 지은 죄가 있지 않나제 엄마 죽이게 한 사람들 중에 나도 있을 건데... 그냥 그 아이 마음 열릴 때까지 참회하면서 기다릴 거야이 회사도 그 아이가 원하는 만큼 주고 싶은데...그 때까진 내가 살아있어야 하지 않겠나.”        

  

  

 사장님안 들어가시고 거기서 뭐하십니까?”     

 김 비서왔어요?”     


등 뒤에서 나타난 김 비서의 인기척에 병실 문 앞에 서 있던 민재가 놀란 얼굴로 얼버무리며 답한다그것도 잠시곧 여유로운 미소가 채워졌다     


 “ 안에 친구분이 계시네요곧 나오실 줄 알고 기다렸더니이야기가 꽤 길어지시네요창립 기념행사 리허설 가기 전에한 번 뵙고 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요.”     


민재는 보라색 블라우스 아래로 흘러내린 롤렉스 데이저스트를 바라보며 빠른 속도로 말한다김 비서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지만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안 되겠네요행사장으로 바로 가봐야 할 것 같네요.. 김 비서님?”     

 말씀하십쇼사장님.”     

 전 아버지 딸입니다불필요한 억측은 삼가주셨으면 합니다제 말뜻 아시죠?”     


김 비서는 말없이 고개를 아래로 깊게 숙였다그의 몸이 직각으로 반듯하게 굽혔다민재는 재빨리 병실과 연결된 가족 대기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문이 닫히고고개를 숙인 김 비서의 얼굴이 올라와 문 쪽을 차갑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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