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네번째 이야기
“김 대리, 오늘이지?”
이성그룹 관련 인터뷰 글들을 편집하고 있던 복자에게 고 팀장이 갑자기 얼굴을 들이민다.
“아? 네. 창립 기념행사 말씀하시는 거죠?”
“거기, 블랙 초대장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데 아닙니까?”
기름기에 떡진머리를 볼펜 뒤쪽으로 긁으면서 장 기자가 끼어들었다. 머리 상태를 보아하니 아직 일주일은 넘지 않은 것 같다. 고 팀장이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재벌이 그냥 재벌이겠어. 어중이떠중이 부르면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지. 기자들도 굉장히 엄선한 최정예 요원들만 뽑았다고 하던데.”
“와~ 그럼. 우리 김 대리가 거기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크악 장난 아니네. 김 대리. 가문의 영광이네. 친하게 지내자.”
과하게 귀여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루돌프 스웨트를 입은 장 기자가 두 팔을 벌리며 오버를 떤다. 그 옆에 겨자색 앙고라 목폴라를 입은 홍 양이 박수를 치며 장단을 맞춘다.
“ 대리님. 진짜 좋겠다. 근데 나는 다 이렇게 될 줄 진즉에 알았거든요.”
어느새 복자 옆으로 바싹 다가온 홍 양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앙고라 털이 나부끼며 공중에 떠올랐고, 복자의 코끝이 간질거렸다.
“엣취~ 얘가 무슨 소리야? 엣취~ 그냥 사보 제작 관계로 가는 거라니까.”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한 채로 새벽이 커피를 들고 탕비실에서 걸어나왔다.
“좋냐?”
“뭐가?”
복자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새벽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한다.
“김복자, 내 말 까먹지 마라. 바람 들어가지 말라는 말.”
“쳇. 뭐라니.”
별소리 다 듣겠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새벽의 말은 복자의 마음을 따끔하게 꼬집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사람은 본디 자기 깜냥을 알아야 덜 상처 받는 법이다.
그때였다.
“어? 언제 왔어요? 일단 내 사무실로 들어가서 말하죠. 작가님.”
고 팀장이 뒤돌아 출판사 입구 쪽에 서 있는 제이를 발견하고 말했다. 그는 체크 코트에 아래에는 검은 슬렉스와 같은 색깔의 첼시 부츠를 신은 채, 비스듬하게 문 쪽에 기대어 있었다. 표정이 조금은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제이는 일부러 그 시선을 피하며 빠르게 고 팀장과 함께 사라졌다.
“뭐야.”
복자는 또 갑자기 냉랭해진 제이의 태도가 혼란스럽고 실망스러웠다. 그의 감정선을 따라가다가 말라 죽겠다. 문득, 혜교의 충고가 떠오른다.
- 잘해줬다가, 쌀쌀맞았다가. 내가 보기에는 그런 남자가 매력은 있어도, 웬만한 여자는 감당 못 한다. 니는 그 웬만한 여자고.
“그럼, 그 오므라이스랑 감자스프는 뭐냐고? 이랬다저랬다.”
복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탕비실에서 나온 홍 양이 복자 책상 위에 커피를 내려놓으면서 말한다.
“휴~ 정말 저 작가님은 언제 봐도 너무 잘 생기지 않았어요? 모델이나 하지. 그죠? 배우나.”
“너도 눈이 삐었다. 저게 뭐가 잘 생겼니? 눈 쪽 찢어지고, 얼굴 밀가루 바른 거처럼 허~옇고, 입술은 새빨개가지고. 기생오라비 같은데.”
따따따따.... 따발총을 적진에 쏴대는 것처럼 복자는 목까지 시뻘겋게 변해 흥분된 목소리로 빠르게 쏟아냈다. 옆에 서 있던 홍 양의 눈이 동그래지고, 뒤편에 있던 장 기자가 의자에 앉은 채로 밀면서 다가와 말했다.
“김 대리. 그거 욕이야? 칭찬이야?”
(고 팀장실 안)
“너. 정말 계속 그쪽으로 쓸 거야?”
고 팀장이 분홍색 뿔테 안경을 벗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앞에 앉은 제이를 쏘아본다. 밖에서와는 달리 현정의 말투와 자세가 사무적이지 않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편한 오누이처럼 보였다. 제이는 말없이 책상 위의 핑크빛 깃털 펜을 장난스럽게 만지작거리기만 한다.
“위험한 일이야. 그 책 나가는 거. 요즘 어떤 세상인데. 분명 그게 이성 이야기인지 금방 알게 될 거라고.”
현정의 말이 끝나자 깃털을 매만지던 제이의 손이 멈추었다.
“금방 들통 나는 요즘 세상. 난 좋은데. 그래야 글 쓸 맛이 나죠.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주면 굳이 왜 쓰겠어요? 소설 따위를. 그리고 그 책은 엄청 팔릴 테니깐 누나한테도 좋은 거지,”
복자의 폰이 울린다.
“어? 우성씨.”
복자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다. 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테라스가 있는 야외 계단 쪽으로 나갔다.
- 복자씨. 바쁘죠? 전화, 받을 수 있어요?
“괜찮아요. 준비는 잘 돼가요?”
- 하하. 네. 좋아요. 복자씨가 그렇게 물어봐주니깐 뭔가 든든한데요. 아, 이따가 이 실장이 출판사 앞으로 갈 거예요.
“이 실장님이요? 기념식은 오후 5시로 알고 있는데...아닌가요?”
-아, 맞는데... 잠깐 준비할 게 좀 있어서... 그래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우성의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 있다. 일단 알겠다고 전화를 끊었지만 아리송했다. 잠깐 준비해야 할 게 뭐가 있을까. “흠흠” 등 뒤에서 나는 인기척 소리에 깜짝 놀라 복자가 뒤를 돌아본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쓸어내리며 복자를 바라보는 제이의 눈매가 살짝 뾰족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걸까.
“어? 어... 출판사 왔네. 팀장이랑 무슨 회의가 있었나봐? 담당자인 나도 모르는...”
“.....”
그는 어떤 대답도 없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갈색 눈빛이 뚫어져라 한 곳만을 응시한다. 복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하면서도 속 안에서 간질거리는 전율을 애써 무시했다.
뭐야. 대낮부터 이 후끈한 기운은... 미쳤나봐.
복자의 노력도 소용없게 제이는 복자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한 발 한 발 멈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두 사람은 더 없이 가까워져 이마가 닿을 지경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딱 붙는데. 얘가 미쳤나. 아 사람 심장 떨려 죽겠네.
계단 발판 위로 두 사람의 발이 거의 닿을 듯한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그가 복자가 있는 쪽으로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손은, 오른쪽 뺨에 붙은 속눈썹 한 개를 떼어냈다.
“윽.”
복자는 저도 모르게 요상한 신음소리를 내쉬면서 두 눈을 꼭 감아버렸다. 그런데, 눈은 왜 감았을까? 아, 내가 왜 그랬지. 그냥 반사적인 행동이라고 밖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실눈을 살짝 뜨더니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미세먼지 장난 아니야. 눈에 막 뭐가 들어가 가지고. 하하하 너 이상한 오해한 거 아니지?”
“ 하, 자꾸 그런 건 어디 가서 배우나. 학원 같은 데 다녀?”
복자의 동그란 코 위로, 제이의 오똑하게 솟은 콧날이 살짝 스치듯 지난다. 그의 입김이 복자의 얼굴 위로 연기처럼 퍼졌다가 사라졌다.
쿵쿵쿵.... 복자의 가슴이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리고, 두 뺨이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바로 눈앞의 자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제이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어 괜히 애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뭐...뭐뭐가?? 뭘 배우는데.”
“사람 미치게 하는 거. 떨리게 하는 거. 보고 싶게 만드는 거. 그런 거 너무 잘하잖아. 당신.”
쿵-
뭐야. 이 오글거림은. 으악 ... 내 손가락, 발가락이 없어지는 것 같아.
근데... 저런 눈빛으로, 목소리로 말하니깐 그냥 믿어버리고 싶잖아.
복자는 멍한 표정으로 제이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갈색 눈동자 속에 제 얼굴이 가득 차 있다.
“배운 게 아니라면, 그냥 타고 난 건가. 김 복자?”
아이씨.
너는 나이도 어린 게 그런 섹시한 말투로 자꾸 누나 이름 부를래? 잿더미만 남았는데 다시 너는 불을 붙이냐. 어쩌다 이렇게 까지게 된 거니. 서른 넘은 누나 심장이 지금 박살이 난다. 박살이.
“ 아하하, 왜 이래. 진짜~ 야!! 나 손가락 열 개 잘 붙어있냐? 손발이 오글거려 죽는 줄 알았다.”
복자는 마음속에서 울렁이는 감정을 숨기려고 대려 싱거운 농담을 장난조로 던졌다. 그는 분명히, 100퍼센트 위험한 남자 유형이 맞는데 자꾸만 거기에 휘둘리는 자신도 싫었다.
복자가 손바닥을 제이 앞으로 펼치고 씨익 웃는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녀가 사무실 안과 연결된 테라스 문 쪽에 거의 다다랐을 때, 제이가 뒤돌아 담담히, 그렇지만 힘 있게 말했다.
“이제 헷갈리게 안 해. 한 번 가보자고. 당신이랑. 어떻게 될지. 나도 궁금해졌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