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세번째 이야기
복자와 우성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찰나에 골목 입구 쪽에서부터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려온다.
“김복자!”
혜교다. 어둠을 뚫고 갈색 털 코트를 입은 그녀가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다. 자다 일어나 거칠게 헝클어진 혜교의 머리칼은 그녀의 야생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우성은 누구냐는 눈빛을 보내왔고, 복자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친구라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민우성입니다. 복자씨 잠깐 보러 왔었습니다.”
우성은 살짝 얼이 나간 표정의 혜교에게 먼저 정중히 인사를 했다. 부드럽고 정중한 그의 목소리가 어두운 밤 골목 안에서 울렸다. 혜교는 복자와 우성의 얼굴을 번갈아 한 번씩 쳐다보았다.
“네, 전 복자 친구 혜교고요. 추운데 밖에서 이러지 말고 안에 같이 들어가는 거 어때요? 우성씨라고 했나? 예?”
갑작스런 혜교의 제안에 복자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거기다 그 어색한 표준말은 또 뭐고? ‘뭐야?’라는 눈빛을 보내고 혜교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헤헤 웃었다. 그때, 우성의 자켓 안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다. 피할 수가 없는 전화인지, 그는 “ 잠시만요.” 이라 말하며 한 손을 들고, 고개를 돌려 짧게 통화한다.
그런 사소한 행동에도 “캬~” 혜교는 감탄사를 보내며 넋 나간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다. 복자는 헤벌쭉하게 벌어진 혜교의 턱을 아래에서 살짝 올려 주었다.
“응. 그래. 알았어. 그래.” 간단한 단답형의 말만 하더니, 그는 전화를 끊고 다시 혜교와 복자가 있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이거 어쩌죠. 저도 정말 같이 하고 싶은데. 잠시 빠져나온 거라서 다시 회사로 들어가봐야겠네요.”
“어머머? 이런 날에도 야근하는 회사가 있어요? 완전 노동착취다.”
“ 아하하. 그러게요. 다음에 한 번 자리 정식으로 만들죠. 그리고 이거. 전해주려고 왔어요.”
우성은 올리브색 자켓 안쪽 주머니에서 손바닥크기 만한 크기의 검정색 카드를 꺼내 복자에게 건넸다. 검정색 바탕의 봉투 안을 얼핏 들여다보니 금색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초대장이에요. 복자씨. 꼭 와줄 거죠?”
“초대장이요?”
검정색 카드를 쥔 채로 멍하게 서 있는 복자의 두 손을 우성이 한 손으로 감싼다. 그의 눈빛이 한없이 포근하다.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 서서 혜교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은 정말 이제 가야하는 시간이 왔는지, 아쉬움에 복자의 손을 조금 세게 잡았다가 살며시 놓았다. 그리고는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옆에 있던 은색 suv에 올라탔다. 날렵한 곡선을 뽐내며 엠블런이 좁은 골목길을 빠져 나가자, 혜교의 콧구멍에서 거친 숨소리가 연발로 쏫아져 나왔다.
“ 김복자 이 복 터진 가시내야. 오늘 밤에 털어놓을 얘기가 장난 아니겠다. 그자.”
“그니까 니 말은... 와 이거 장난 아니네. 진짜. 민 우성이란 남자랑은 엘리베이터에서 만났고, 여차저차 여기까지 온 거다 이 말 아이가? 근데 그 남자가 이 그니까 그 이성 그룹에서 오너 가족 중에 하나고, 거기다가 완전 훈남에 그 매너에... 캬, 김복자 인생에 이런 날도 오네. 가스나야! 니 완전 로또 맞았다. 로또! 나는 니가 그때 포장마차 뛰어온 이쁘장하게 생긴 가랑 뭐 있는 줄 알았는데...”
“후. 그 이쁘장한 아는 저 옆방에 살고 있어.”
“ 뭐어어어...!!”
혜교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던 복자가 한쪽 턱을 괴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고 나니 정말 자신이 난잡한 연애를 즐기는 선수가 되어버린 것 같다.
“잠만, 잠만 있어봐라.”
혜교가 반쯤 남은 맥주잔을 한 입에 털어 놓고 연신 눈을 껌벅거린다. 업데이트화 과정이 영 더뎠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완전 사는 게 아니고, 아무튼 3개월만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했어. 나랑 작업 중인 작가야. 근데 문제는..... 걔랑도 나 키스했어. 근데 그게 안 지워져. 자꾸 밟혀.”
헐. 턱이 다물어지지 않는지, 한동안 입을 벌린 채로 혜교가 복자를 바라본다.
“이게 무슨 상황이고. 지금 니가 로또를 두 번 맞았다는 뜻이가. 아니면 로또 맞은 종이를 세탁기에 넣고 빨았다는 뜻이가.”
“그러게. 미친 거 아는 데... 나 둘 다 좋은 거 같아. 그래, 둘 다 좋아. 나도 이런 내가 재수가 없다.”
간절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복자를 보고, 혜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재수는 없는데. 근데 이해는 된다. 포장마차에 온 그 남자가 오죽 잘 생겼어야지. 근데 니보다 나이도 어리고, 행동도 들쭉날쭉하다매? 잘해줬다가, 쌀쌀맞았다가. 내가 보기에는 그런 남자가 매력은 있어도. 웬만한 여자는 감당 못한다. 니는 그 웬만한 여자고. 근데 마음에 걸리는 거는, 그 남자도, 그리고 방금 그 우성이란 사람도 진짜 니를 좋아하는 것 같든데... 아~ 몰라 몰라~~ 내가 다 머리가 터지겄다. 서른 평생 남자 복 없던 김 복자 인생에 이게 무슨 일이고?”
“내말이. 순서대로나 오던지... 이렇게 겹쳐서 올 줄 누가 알았겠냐. 내 인생의 운을 여기서 다 쓴다. 젠장.”
.
.
복자는 팔다리를 크게 벌린 채로 잠에 빠진 혜교 위에 도톰한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리고 침대 한 편에 기대어 앉아 아까 우성이 주고 간 검은색 카드를 다시 열어 보았다. 검정색 봉투 안에는 번쩍거리는 금박에 invitation 글자가 도톰하게 올라와 있었다. 그 아래에는 김복자 이름이 흘림체로 쓰여 있었다. 아마 우성이 썼을 것이리라. 글자는 힘 있고 기품이 느껴졌다. 복자는 제 이름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뒷장에는 ‘이성그룹 55주년 창립기념’ 이란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당신에게 가려면 이런 초대장이 필요한 거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복자는 복잡한 눈빛으로 초대장을 내려다보았다. 앉은 자리에서 두 무릎을 세운 채, 그 위로 고개를 가누었다. 그녀의 마음이 설레면서도 한편, 쓸쓸해졌다.
(최 회장의 vip 병실 안)
"자네... 좀 어떤가?”
고 영감의 얼굴이 걱정스럽게 찌푸려졌다. 그러나 침대 위 최 회장은 느긋한 눈으로 고 영감은 올려다본다.
“괜찮아. 뭘 별스럽게 여기까지 오고 난리야. 안 그래도 내일 퇴원할걸세. 창립 기념행사도 있고....”
“자네나 나나 이제 늙었다고. 자네는 게다가 심장이….”
“ 잔소리는... 진짜 자네 늙었나보네. 그렇게 쉽게 안 죽어. 내가 어서 죽기만을 바라는 자들한테는 미안한 소리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고.”
최 회장의 짙은 눈썹이 부드럽게 아래로 휘어지고 양 눈가 사이로 깊은 주름이 잡혔다.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
“자식을 제대로 못 키운 내 죄가 크지. 아무튼 그 아이는 어떻게 지내나? 잘 지내고 있나?… 아직도 날 보길 싫어하겠지.”
단단하던 최 회장의 눈빛과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애절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고 영감의 얼굴이 난처해 보인다. 그와 50년이 넘은 지음의 관계인, 최 회장이 그 표정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벼운 투로 말한다.
“그래. 사내자식이 그만한 고집은 좀 있어야지. 그래야 큰일을 하지. 허허. 그런 점은 쟤 아비보다 날 닮았구먼. 다행이야.”
“내가 좀 더 채근해 보겠네. 자네 몸 상태도 이야기하고...”
고 영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 회장이 손사래를 치며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말한다.
“아니. 절대. 절대 그러지 말게. 어쨌든 나도 지은 죄가 있지 않나. 제 엄마 죽이게 한 사람들 중에 나도 있을 건데... 그냥 그 아이 마음 열릴 때까지 참회하면서 기다릴 거야. 이 회사도 그 아이가 원하는 만큼 주고 싶은데...그 때까진 내가 살아있어야 하지 않겠나.”
“사장님, 안 들어가시고 거기서 뭐하십니까?”
“어, 김 비서. 왔어요?”
등 뒤에서 나타난 김 비서의 인기척에 병실 문 앞에 서 있던 민재가 놀란 얼굴로 얼버무리며 답한다. 그것도 잠시, 곧 여유로운 미소가 채워졌다.
“ 안에 친구분이 계시네요. 곧 나오실 줄 알고 기다렸더니, 이야기가 꽤 길어지시네요. 창립 기념행사 리허설 가기 전에, 한 번 뵙고 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요.”
민재는 보라색 블라우스 아래로 흘러내린 롤렉스 데이저스트를 바라보며 빠른 속도로 말한다. 김 비서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지만,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안 되겠네요. 행사장으로 바로 가봐야 할 것 같네요.. 김 비서님?”
“네. 말씀하십쇼. 사장님.”
“전 아버지 딸입니다. 불필요한 억측은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제 말뜻 아시죠?”
김 비서는 말없이 고개를 아래로 깊게 숙였다. 그의 몸이 직각으로 반듯하게 굽혔다. 민재는 재빨리 병실과 연결된 가족 대기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고개를 숙인 김 비서의 얼굴이 올라와 문 쪽을 차갑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