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로알토의 한 놀이터에서 만난 푸른 눈의 아이
실리콘밸리 놀이터를 이곳저곳 들르다 만난, 잊을 수 없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하디나. 그 아이를 만난 곳은 팔로알토의 한 놀이터였습니다.
알록달록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하디나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아이였습니다. 보통 이곳 놀이터에는 한쪽에 3~4세 미만 아이들을 위한 놀이기구가 설치되어 있고, 그 옆으로 더 큰 아이들을 위한 미끄럼틀이나 그네가 설치돼있거든요. 그런데 하디나는 딱 봐도 자기보다 훨씬 큰 언니들 틈에 끼어서 다소 위험해보이는 미끄럼틀을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제 언니를 따라온 어린 동생이겠거니 했어요. 익숙한 놀이터인 듯 맨발로 미끄럼틀을 올라갔다 내려왔다, 자유롭게 뛰어놀고 있었거든요. 언니들이 미끄럼틀 위에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그 틈에 끼어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그런데 잠시 후 하디나는 저와 제 아이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제 눈을 빤히 보던 하디나는 갑자기 “제 이름은 하디나이고 이제 세살이예요”라고 말했어요. 빨려들어갈 듯 푸른 눈동자를 보며 저도 “와우! 세살이나 되었어? 누나구나!”라고 말하자 하디나는 “이 아이는 몇살이예요? 이름은 뭐예요?”하고 신나서 되물었습니다. 제 아이는 영어이름이 없거든요, 그래서 한국이름을 말해주자 몇번 따라했지만 어려워보여서 “그냥 줄여서 민이라고 불러”라고 하자 까르르 웃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워하지 않고 말을 걸고 이곳저곳을 누비는 모습이 자유분방하고 이쁘다고 생각했어요.
문득 하디나가 놀던 미끄럼틀 위를 보니 큰 여자아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의아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자 하디나의 엄마인 듯한 한 여성이 그네 옆 의자에 앉아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어요. 간간이 하디나를 쳐다보긴 했지만 놀이터에 온 직후부터 쭉 전화통화를 끊지 않더라고요. 하디나는 개의치 않고 놀이터 이곳저곳을 누볐습니다.
잠시 후 한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타났습니다. 또래 여자아이였는데 엄마가 그네를 밀어주자 신이 나 있었어요. 하디나는 그네 옆에 서서 부러운 듯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전화통화를 하던 여성은 귀찮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네를 태워주더군요. 그리고 옆 그네를 밀어주는 엄마와 한참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다 그 엄마가 사라지자 하디나의 그네도 멈추었고, 이 여성은 다시 의자로 돌아가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전화를 걸고 끊고, 또 받지 않으면 다른 곳에 전화를 거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어요.
잠시 후 그녀는 전화를 걸며 하디나에게 초콜릿이 발린 프레즐 과자를 한 봉지 주더군요. 하디나는 흙묻은 손으로 과자를 먹으며 저와 제 아이를 지켜보았어요. 과자를 먹은 후 하디나는 웬 열쇠를 하나 가지고 와서 제 눈 앞에 흔들었습니다. 저는 “잃어버릴지 모르니 엄마에게 갖다주자”고 말했어요.
아.. 그때 알았어요. 엄마가 아니란 것을요. 하디나는 “우리 엄마 아니고 내니(유모)예요. 우리 엄마 아빠는 일하러 갔어요. 이 열쇠는 어느 문이나 열 수 있는 마법의 열쇠예요”라고 말했지요. 그러고보니 끊임없이 전화를 걸던 이 여성은 확연하게 외모에서 차이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와, 정말 신기한 열쇠구나. 좋겠다”라고 말하자 하디나는 으쓱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를 떠났습니다.
마음이 씁쓸했어요. 분명 팔로알토에 살고, 엄마 아빠가 모두 직장에 다닌다면 누구나 선호하는 직장에 다니며 고연봉을 받는 가족일텐데. 내니가 이렇게 방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까 싶더라고요. 그리고 저 역시도 한때 직장맘이었기에 하디나의 엄마에게 동화되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디나의 내니가 원망스럽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동안 도서관과 놀이터에서 본 비슷한 상황들이 머릿 속을 스쳐지나갔습니다. 아.. 아이 혼자 내버려두고 쉴새없이 전화를 걸던 많은 사람들이 내니였구나.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아이를 자유롭게 놀게 둔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방치했던거구나.
오후 다섯시, 하디나의 내니는 마침내 전화를 끊고 유모차를 끌며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종종 이곳에 와서 하디나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요, 문득 하디나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것이 저의 큰 실수이자 오만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하디나가 마주치는 누구에게나 가서 말을 걸고, 자기소개를 하고, 큰 아이들이 노는 놀이기구도 스스럼없이 오르내리고, 이 모든 것들이 어쩌면 하디나가 더 큰 아이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반드시 엄마 손에서 자라는 아이가 더 반듯하고 잘 자라날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의 성향도, 환경도 각자 모두 다른데 말이죠.
그래서 저는 하디나의 미래가 궁금해졌습니다. 어떤 아이로 자라날까, 저 아이는. 누구보다 친화력이 좋고 어느 곳에서든 적응을 잘 하는 아이가 될지 모릅니다. 우리 아이가 성인이 될 때쯤 하디나도 성인이 되어있겠지요. 어디선가 다시 하디나의 소식을 듣는다면 너무나 반가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