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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Nov 03. 2020

제주도 여행기#2

제주올레 1코스

비양도에서 일어나 시계를 보니 6시쯤 이었습니다. 이미 많은 백패커들은 일출을 보기 위해 분주합니다. 하지만 날씨가 흐려서 일출은 보질 못했습니다.

고개를 빼꼼 내놓는 해를 보며 몸을 녹이는 그 순간이 백패킹의 매력

비양도 공중화장실에서 양치를 하고 서둘러 나옵니다. 편의점에서 대충 요깃거리를 사고 마을 주민들이 주로 타는 버스를 타러 가는데 한 할아버지가 따라오며 담배 하나만 달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생각이었습니다만 계속해서 돈이 없다는 얘길 하길래 서둘러 버스에 탔습니다. 우도까지 와서 현지인이 구걸을 하는 모습을 보다니 참 희귀한 장면입니다. 이 짧은 경험 때문에 비양도 백패킹보다는 구걸하는 할아버지를 만났던 게 가장 기억에 남아 버렸습니다.


우도 천진항에서 제주 성산항까지는 20분 정도 걸립니다. 틈틈이 보조배터리를 충전하고 성산항에 도착했습니다. 또다시 버스를 타고 올레 1코스 시작점인 시흥초등학교로 갑니다. 이곳에 오기까지 버스> 배> 버스를 이용했습니다만 불편하다고 느끼진 못했습니다. 여행자라는 특수한 지위가 어느 정도의 불편은 느끼지 못하도록 저를 설계해 놓은 것 같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설레이는 순간



1번 코스 시작부터 연세 지긋하신 아버님이 같이 걷자고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의외로 낯을 가리기도 하고 혼자 있고 싶은 마음에 에둘러서 거절의 의사를 표했습니다. 그렇게 혼자 9kg의 배낭을 메고 걷다 보면 곧바로 오름이 나옵니다.

체력이 많이 남은 시작지점에서 오름을 만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음.

많은 사람들이 올레 1코스를 극찬하는데 그 이유는 초반에 만나는 말미오름, 알오름에 있습니다. 오름에 올라가기 전에 소나 말을 만나면 조심하라는 경고 문구가 있었는데 '허 참 제주도는 올레길에 소가 있나 보네'하고 넘어갔습니다. 이것이 복선이었습니다.

내가 가야할 그 좁은 길에 소가 누워 있다.

소를 앞에 두고 5분 정도 고민했습니다. 얘네를 어떻게 자극하지 않고 지나갈까. 결국 길이 아닌 곳으로 가며 여기저기 가시에 찔리고 우회해서 갔습니다. 그렇게 제주여행 최대 고비를 지나 전망 좋은 곳에서 어젯밤 먹다 남은 막걸리와 크림빵을 먹는데 제가 먹어본 막걸리 중에 제일 맛있었습니다.(맛 표현을 잘하는 여러 유튜버가 참 부러움)


혼자 땅에 세워서 셀카를 찍다 보면 뭐라도 해야 할것 같은 압박이 느껴짐

오름을 내려오면 종달리 마을이 나옵니다. 갬성적인 카페들이 몇 군데 보였지만 간판도 없고 정확히 뭘 파는지 몰라서 혼자 온 백패커는 그냥 걸었습니다. 그렇게 길을 걷다 보니 해변에 늘어선 오징어가 눈에 보였습니다.

중간지점인 목화휴게소에서  맥주와 5천원짜리 오징어를 먹었습니다. 이 또한 먹어본 오징어 중에 제일 맛있었습니다. 혼자 여행하다 보면 먹는 것에 돈을 아끼지 않게 되는데 무의식 적으로 나에게 보상을 해준다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굳이 친구에게 니 얼굴 오징어라고 말하기 위해 찍었던 동영상, 이번 여행에서 몇개 없는 셀카다
어디든 카메라만 들면 느낌있는 사진이 나온다. 유용하게 썼던 백팩커의 상징 날진물통(우)

제주에는 초보 운전자 비율이 많습니다. 해변길을 걷다 보니 제 눈앞에서 한 렌터카가 연석을 밟아 도보를 침범하는 사고가 났습니다. 할머니, 엄마, 딸이 여행 온 듯 보입니다. 5살 정도 돼 보이는 딸은 울고 할머니와 엄마는 어찌할 바를 몰라했습니다. 그래도 그 3명은 사고가 난 지점에 우연히 여행 온 경찰관이 배낭을 메고 길을 걸어가고 있던 탓에 빨리 차를 빼고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모녀에게 도움을 주고 쿨하게 걷다 보니 임창정의 영화 대사가 생각이 납니다.

그러다 카페가 보여서 카페를 들어갑니다. 혼자 여행 가면 이런 점이 좋습니다. 쉬고 싶은 곳에서 쉬고 가고 싶은 카페를 갈 수 있다는 점. 이따가 더 좋은 카페가 나오지 않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틈만 나면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쉰다. 그게 바로 백팩커의 길
쉬고 싶은 곳이 너무 많음 주의
보급 받은 신발과 블랙다이아몬드 트레킹 폴



그렇게 놀멍 쉬멍 걷다 보면 어느새 성산일출봉이 나옵니다. 코로나 여파인지 성산일출봉 쪽에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성산일출봉에 올랐었는데 밑에서 보는 성산일출봉도 꽤나 멋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맛집 검색 따위는 하지 않고 보이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늦은 점심메뉴는 흑돼지 돈가스.


너무 배가 고파서 얼마인지도 확인 안하고 먹은 흑돼지 돈까스

계속해서 걷다 보면 오늘의 박지인 광치기 해변에 닿습니다. 비양도는 날씨가 흐려서 제대로 즐기지 못했는데 광치기 해변은 여태껏 겪어본 박지 중 단연 최고였습니다. 비록 화장실은 없지만 이웃도 너무 잘 만났고 모든 게 완벽했습니다.


네이쳐하이크 텐트, 침낭, 매트, 헬리녹스 체어원


그렇게 박지를 구축하고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다가 바다를 보며 먹었습니다.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2시간 정도 바다만 쳐다봤는데 이렇게 오래 바다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30살이 되어서 처음인 게 이렇게 많아도 되는 건가 싶었습니다.


여행을 처음 떠날 때에는 이번에 가서 '모든 것들을 좀 돌아보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그냥 막연히 '좋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좋다'라는 생각 다음으로 많이 했던 생각은 '좋으면 된 것 아닌가' 그다음 생각은 '좋다는 생각만 하게 돼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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