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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즈 Nov 02. 2024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의 글쓰기 연대기

D-12*

초등학교 1학년. 아버지가 출장 가던 날의 이야기를 한 페이지짜리 수필로 쓴 적이 있었다. 이 글은 대상을 받고 아동 문학 책에 실렸다. 나의 글이 처음으로 세상에 보여진 날이었다. 이후 소년 한국 일보 비둘기 기자가 되어 몇 년간 기사를 쓰는 활동을 하게 되었다.

D-11*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하던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스티븐 킹을 접했다. 그의 소설을 닥치는 대로 구해서 읽었고 심지어 두꺼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필사하기도 했다. 이런 작품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스티븐 킹은 영웅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D-10*

중고등학교 시절. 글짓기 대회마다 상을 받았다. 교내 대회든 전국 대회든 가리지 않았다. 국어 선생님과 작문 선생님에게 특별 대우를 받았고 특별 활동도 문예부에 가입해야 했다. 나는 천자 원고지를 좋아했다. 200자 원고지는 갑갑했기 때문이다.

D-9*

인터넷에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단지 내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을 위해 몇 편의 소설을 완결까지 썼다. 연재 분량이 책 몇 권 이상이 되고 나니 나 같은 3류 작가에게도 출판사 컨텍이 왔다. 당시에는 인터넷 소설이 유행이었는데, 막상 쓰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생긴 기회였던 것 같다. 만약 그때 책을 출간했더라면 현재의 나는 다른 모습이겠지. 하지만 제안을 거절했다. 작품에 대한 수정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치기 어린 이유였다. 그날 이후 글을 연재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D-8*

한 참의 시간이 지나고 웹 서핑을 하던 중, 누군가의 게시글을 발견했다. 내가 썼던 소설 제목과 필명을 거론하며 이 작가님의 근황을 아시는 분 있냐는 내용이었다. 그 짧은 게시글 하나에 큰 감동을 받았다. 누군가가 기억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D-7*

나의 첫 직업은 게임 시나리오 작가였다. 글을 쓸 생각으로 출근했는데, 소규모 회사라서 1인 1게임 개발이 필요했고 프로그래밍도 배워야 했다. 내가 쓴 시나리오를 직접 게임으로 만들어야 하는 구조였다.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덕분에 따라오는 장점이 있었다. 직접 구현을 하다 보니 사업부와 경영진 이외에는 아무도 터치하지 않아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사업부에서 요청하는 주제에 맞춰서 육아 개그물, 추리물, 연애물, 호러물, 시대극 등의 시나리오를 쓰며 게임 기획자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쓴 장르도 힐링물, 아포칼립스, 농장물, 슈팅, 미소녀 배틀물 등 다양하다. 신기하게도 같은 장르를 두 번 쓴 적이 없는 것은 나의 성향인 걸까? 우연인 걸까?

D-6*

오랜만에 찾아뵌 중학 시절 담임 선생님께서 요즘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셨다. 게임을 만든다고 했다. 게임 시나리오는 글보다는 연출과 상호 작용이 중요하기에 글을 쓴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었다. 글 쓰는 직업이 아니라고? 왜 그만두었니? 어린 나에게 글 쓰는 재능이 있다며 도전해 보라고 격려해 준 분이셨다. 선생님은 내가 당연히 글과 관련 있는 직업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왠지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담임 선생님의 담당 과목은 국어였다.

D-5*

게임 시나리오 미니 특강을 통해서 알게 되고, 이후 친하게 지내던 작가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에세이 공저를 출간하려는데, 갑자기 한 자리가 비었어요. 사정이 급한데 혹시 글을 써줄 수 있겠어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급하게 쓴 원고 세 꼭지가 책으로 출간되었다. 책으로 나온 것을 읽다 보니 좀 더 잘 쓸 걸 그랬나 싶었다. 다른 분들은 힘을 주어서 쓴 것이 느껴졌고, 그 탓에 내 글만이 대충 쓰여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어설픈 글을 통해 아버지와 십여 년 만에 화해를 할 수 있었다. 새삼 책의 힘, 글쓰기의 힘을 느꼈다. 중학교 담임 선생님께도 한 권 보내 드리고 싶었지만, 이후 연락이 되지 않았다.

D-4*

제대로 소설을 배워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찾아본 소설 작법 강좌는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 쓰는데 규칙이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 시나리오를 쓰던 탓일까? 각자의 스타일과 개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써도 될 텐데. 규칙에 갇히는 글은 갑갑해서 싫었다. 그래서 독립 출판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누구도 문체나 규칙을 강요하지 않았다. 서로 피드백을 나누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의 몫이었다. 그렇게 독립 출판으로 세 권의 단편 소설집을 출간했다. 이번에도 모두 공저였다.

D-3*

여전히 나는 작가가 아니었다. 독립출판 업계에서도 주류에 들지 못했던 출판사와 우리 프로젝트는 이도 저도 아닌 자기만족 수준의 책을 출간했을 뿐이다. 그때 오랜 친구가 웹소설로 대박을 냈고 나름 많은 팬을 보유한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니 도전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끌렸다. N사의 공모전을 통해 웹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한때 베스트 리그까지 올라가며 상승세를 보였지만, 잠시 뿐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인기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마지막 화까지 정주행 해준 독자는 한자리 수였다. 하지만 단 한 분이라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중도 하차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년 만에 완결을 냈다. 마지막 화를 읽어준 독자는 단 5명뿐이었다. 하지만 이후, 소설은 출판사와 계약이 되었고 유명 플랫폼으로 재 연재를 들어가며 적게나마 수익이 생겼다. 출판사와는 다음 작품도 선 계약을 했다. 이제서야 정식으로 작가라는 타이틀은 얻었다고 생각했다.

D-2*

웹소설은 종이 책으로 실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독립 출판을 한 책들이 대형 서점에 들어가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서점에 꽂힌 책은 급하게 쓴 공저 에세이 한 권뿐이었다. 이 것만으로는 작가 등록조차 불가능했다. 결국 작가라는 호칭에 당당하려면 대형 서점에 혼자 쓴 책 한 권은 꽂혀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재를 고민하다가 20년 넘게 해 오던 게임 기획과 관련된 책을 쓰기로 했다. 세상에 없는 책이고, 포지셔닝도 확실하다. 초고를 써서 여기저기 투고를 했다. 너무나 좋은 출판사를 만났고 출간에 1년 정도 걸렸다. 출판사 대표님이 말씀하셨다. 이 책이 작가님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면 좋겠어요. 그 말 덕분이었을까? 책은 한동안 베스트셀러였고 말 그대로 나의 인생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네이버는 드디어 작가 등록을 받아주었다. 후속 책도 계약을 하고 1차 탈고를 마쳤다. 이 책은 내년 출시 예정이다.

D-1*

하지만 나의 원류는 소설이었다. 스티븐 킹처럼 실험적인 작품을 다양하게 쓰고 싶었고 어린 시절 인터넷에 연재했던 소설처럼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공모전을 찾아보며 분량과 주제에 맞춰 단편 소설을 몇 편인가 썼다. 한 번은 친한 출판사 대표와 식사를 하는데, 실험적으로 영문 소설을 출간해보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왠지 끌리는 이야기였기에 공모전에 제출하려던 단편 소설을 보내 주었다. 글을 읽은 대표가 제안했다. 아마존에 내보지 않을래? 번역해서 나간다면 한국어 문장의 비유나 은유가 부족해도 괜찮지 않을까? 나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재미있을 것 같아 공모전용으로 쓴 단편 소설 세 편을 출간했다. 효과는 미비했지만 덕분에 아마존에 작가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영문 단편 소설의 출간 이력이 세 편이나 생겼으니 잃은 것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공모전용 글은 다시 쓰면 되니까.

D=0*

나는 특수 분야의 작가이다. AR이나 홀로그램, 볼륨 매트릭 같은 특수 기술과 연관된 콘텐츠의 대본과 스크립트를 작성한다. 다큐멘터리 성우 대본을 쓰거나 보드게임 텍스트를 작성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태블릿의 콘텐츠 대본을 썼다. 오디오 드라마 대본도 작성했고, 몇 편의 칼럼도 작성했다. 지금은 방송과 영화 시나리오도 쓰고 있다. 20년 넘게 일한 게임 분야의 기술적인 이력과 작가 이력이 합쳐지면서 다양한 형태의 글쓰기 요청을 받고 있다.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작업들이다. 그 중간중간 소설도 쓰고 직업서도 쓴다. 웹소설은 집필이 계속 늦어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계약은 되어 있으니 작가라고 불러도 되겠지?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는 않다. 에세이도 한 권 내보고 싶고 온전히 혼자서 쓴 소설책도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다. 신춘문예나 등단은 기대도 관심도 없다. 고전적인 글쓰기보다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일이 나에게는 더 즐겁고 잘 맞으니까.

D+1*

기존에 고착화된 글쓰기는 점점 AI와 경쟁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AI는 유명한 작가의 문체 스타일을 흉내 낼 수 있으며 학문적으로 분석된 고전이라면 지금보다도 점점 더 완벽하게 집필해갈 것이다. 이런 현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글쓰기를 가르칠 때면 학생들의 개성을 살리려 노력한다. 전통적인 문장 쓰기는 결국 대체될 것이 분명한데, 그런 방식을 알려주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물론, 등단이나 순문학을 추구한다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내가 바라보는 글쓰기에 더 이상 옳고 그름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하나뿐이다.


[재미있으니까]


뻔하지 않고 계속 변화하는 세상. 그리고 그에 맞춰 달라지는 글의 형태가 나를 지루하지 않게 한다. 앞으로도 아직까지 써보지 못한 새롭고 다양한 글을 쓰게 될 것 같아 설레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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