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은 세전 100만 원이고 수습 기간 동안 70%, 우리 회사의 수습 기간은 최소 3개월에서 최대 6개월이야. 그동안 게임 하나를 만드는 것이지. 출시해서 돈을 벌면 정직원으로 전환, 출시하지 못하거나 돈을 못 벌면 거기까지. 오케이?”
“네. 그럼 저는 오늘부터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
“일단 제안서 써야지. 네가 쓴 제안서는 나와 이사님들이 판단할 거야. 그중에 괜찮은 게 있다면 게임을 만들면 된다. 이제부터 네가 할 일은 하루에 딱 10개만. 신작 게임 제안서를 쓰는 거야. 오케이? 아, 그리고 우리 회사의 주력 게임인 연애 시뮬레이션의 추가 멘트 작업도 해야 하는 거 알지?”
첫 업무는 연애 게임의 시나리오를 추가로 쓰는 일이었다.
꿈에 그리던 첫 출근일. 게임 시나리오 작가로 입사했지만, 첫날부터 제안서를 쓰게 되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제안할 수 있다니, 두근거렸다. 기획팀장님은 나를 데리고 몇 명 없는 회사 직원들을 소개해 주셨는데, 그중 김 부장님이 있었다.
“이 분 대단한 분이야. 삼성 출신이거든. 그런데 게임 만들겠다고 때려치우고 나오셔서 우리 회사에 왔지. 그 높은 연봉을 버리면서 게임을 선택했다 이거야. 그리고 부장님은 회사에서 주무신다? 아침에 일찍 오면 빨랫줄을 볼 수 있을 거야. 전에 속옷 널린 거 보고 내가 기겁했잖아.”
“야! 뭔 소리야! 속 옷은 책상 아래에 널어 둔다니까!”
김부장님을 처음 소개 받을 때 들었던 속옷 빨래 이야기는 강렬했다.
회사에서 잠을 잔다는 소리에 크으 이런 게 게임회사지 하고 생각했다. 조만간 나에게도 닥칠 현실이겠지. 그날부터 매일 A4로 20페이지가량 시나리오 멘트를 썼다. 일이 끝나면 제안서 작성을 시작했다. 10개의 신작 게임 제안. 처음에는 전혀 부담이 없었지만, 매일 10개씩 제출하다 보니 점점 한계가 왔다. 머리를 쥐어짜야 했고 갈수록 야근이 늘어났다. 10개를 제출하기 전에는 퇴근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신 기획 팀장님은, 옆 자리에서 온라인 게임을 열심히 플레이하셨다. 나 때문에 퇴근 못하시는 건가 싶어서 죄송한 마음이 들어 더욱 조바심이 났다. 사실은 그냥 본인이 놀고 싶었을 뿐이었음을 한참이 지난 뒤에 알게 되었다.
매일매일 제안서 10개. 기가도쿄토이박스 만화에 나오는 에피소드는 나도 경험한 일이었다.
드디어 제안 하나가 통과되었다. 육아를 소재로 한 개그 콘셉트의 게임이었다. 그날부터 업무가 더 늘어났다. 원래 하던 연애 게임의 멘트를 작성하는 것은 그대로였다. 여기에 내가 만들 게임의 기획서와 시나리오를 써야 했다. 매일 10개씩 제출하던 신작 게임 제안서는 그대로 진행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추가로 제출한 제안서들은 팀장님이 본인의 아이디어인 것처럼 임원진에게 제출했다. 억울하다는 생각보다는 나의 제안을 높이 평가하시나 보다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했다. ‘두근두근 베이비’의 게임의 기획과 시나리오가 마무리될 무렵, 팀장님에게 다시 질문했다.
처음 통과된 캐릭터 제안... (창피하지만)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 다음 작업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너 게임 처음 만들어보냐? 아, 처음이지 참. 이제 필요한 그래픽 리스트 만들어서 그래픽 팀장님에게 드리고 프로그램 구현 리스트 만들어서 부장님에게 드려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개발 상황 체크해야지.”
“그것만 하면 되나요? 연애 게임 멘트도 이제 끝났습니다.”
“일 없어? 그럼 제안서를 더 써야지. 오늘부터 30개다. 오케이?”
어라? 이쯤 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기획서와 시나리오를 끝내고 나면 할 일이 없다고? 그게 맞나? 아무리 게임 개발 초짜라고 해도 이건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때쯤 김 부장님이 난입하셨다.
“야, 얘 할 일 없으면 내가 좀 써도 될까?”
김 부장님은 나를 데리고 나가더니 갑자기 하소연을 하셨다.
김부장님은 매번 나를 불러내서 수상한(?) 제안을 했다.
“내가 우리 회사에서 몇 개 프로젝트의 코드를 보는지 알아? 전부야 전부. 재미있기는 하지만 시간적으로 너무 무리라고. 그래서 말인데, 너를 데리고 테스트를 좀 해보려고 한다. 괜찮지? 내가 만든 엔진이 있는데, 이거 써서 직접 게임을 만들어봐. 기능이 부족하면 나한테 물어보고. 너 프로그램 좀 해봤지?”
“네. 대학교 때 혼자 게임을 만들어본 경험은 있습니다.”
“모바일 게임은 이통사마다 언어가 조금씩 다른데, 그건 내가 알려줄 수 있어. 그럼 프로그램 기능 리스트는 나에게 줄 필요 없다. 리스트 정리해서 네가 직접 해봐.”
그날부터 업무량이 폭증했다. 그래픽 팀에서 나오는 리소스를 체크했고, 내가 생각한 내용은 직접 프로그램을 배우며 구현하기 시작했다. 부장님이 제작했다는 엔진에는 UI와 그래픽 좌표를 찍는 기능뿐이었기에 부족한 기능은 함께 추가해야 했다. 엔진을 만들어가며 동시에 3개월 안에 게임을 완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거의 집에 가지 못했고, 회사에서 잠을 자는 일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부장님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많아졌지만, 본인 이야기는 잘하지 않으셨다. 3개월에 걸려 게임은 거의 완성 단계가 되었지만, 문제가 생겼다. 당시 모바일 게임의 제한 용량을 넘어서게 된 것이었다. 지금까지 만든 내용 중 많은 부분을 삭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 부장님은 저녁을 먹자며 나를 데리고 근처 식당으로 가셨다. 그리고 또 하소연을 하셨다.
나를 끊임없이 성장시켜준 김부장님의 제안들.
“작은 용량으로 게임을 묶는 게 얼마나 힘든 지 너도 알지? 그런데 위에서는 나한테만 자꾸 뭐라고 한다. 나는 최적화가 뭔지 기획자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생각하는 대처 방법이 있는데, 조금 어렵기는 해. 그래서 말인데, 네가 할 수 있을지 테스트를 좀 해보려고 한다. 괜찮지?”
왠지 기시감이 느껴졌지만, 이번에도 동의했다. 제안해 주신 솔루션은 필요할 때마다 리소스를 온라인에서 받아오는 새미 네트워크였다. 부장님의 진두지휘 아래 내 프로젝트는 새미 네트워크로 교체되기 시작했고, 결국 6개월을 꽉 채워서야 게임이 출시되었다. KT Brew버전은 내가 만들었고, SKT와 LG 버전, Wipi는 다른 프로그래머들이 변환 작업을 했다. 그렇게 나의 첫 게임이 출시되었다. 성과는 나쁘지 않았기에 다행히 정사원이 되었다. 축하 회식을 하고 나서 며칠 뒤, 부장님이 또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하소연을 하셨다.
결국 6개월이 걸린 나의 첫 게임.
“우리 회사 게임들은 너무 단편적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밸런스가 정말 중요한데, 아무도 거기에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너를 데리고 테스트를 좀 해보려고 한다. 게임 밸런스 작업을 해보는 게 어때? 너네 팀장이 하는 프로젝트에서 수치 밸런스 부분을 해주겠다고 해봐. 아마 좋아할 거다. 그 팀장은 숫자 작업을 귀찮아하거든. 타이쿤 게임이니까 좋은 연습이 될 거야. 밸런스 두어 개 하고 다음은 나랑 RPG 만들자.”
왠지 기시감이 느껴졌지만, 이번에도 동의했다. 하지만 팀장님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밸런스 작업을 나에게 주는 대신, 본인의 다른 프로젝트 시나리오를 써달라고 하셨다. 당시의 나는 일 욕심이 많았기 때문에 조건을 받아들였다. 일은 점점 더 많아졌다. 신작 게임의 제안서를 쓰면서 팀장님의 A프로젝트 시나리오를 썼고, B프로젝트의 밸런싱 작업을 했다. 이쯤부터는 회사 안의 모든 프로젝트에 QA 지원도 해야 했다. QA 부서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기획자가 테스트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 와중에 나의 첫 게임도 계속 업데이트를 해야 했다. 새로운 휴대폰이 나올 때마다 게임을 수정해야 하는 시대였다. 점점 더 집에 갈 일이 없어지면서 월세가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다른 프로젝트의 시나리오와 밸런스 작업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전부 팀장님 프로젝트였지만...
그 와중에 두 번째 프로젝트 제안도 통과되어 신규 게임의 시나리오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추리 게임이었는데, 그동안 학습한 밸런스 요소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게임을 만들기 시작할 무렵에는 처음부터 직접 프로그램과 네트워크 구조를 잡고 밸런스까지 다룰 수 있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부장님은 종종 나를 불러내어 둘만의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매번 하소연으로 시작해서 나에게 테스트를 해보겠다는 말로 이야기를 마쳤다. 그 하나하나의 제안이 매번 나를 성장시켰음은 물론이었다. 3개월 정도 집에 가지 못하고 회사에서 작업을 하던 중, 부장님이 나를 불러서 열쇠 하나를 건넸다. 새벽 4시경이었다.
두번째 게임인 추리극장 슬립워커. 한국에서는 심의를 거부 당했다.
“야, 이거 하나 갖고 있어.”
“네? 이거 무슨 열쇠입니까?”
“우리 집 열쇠. 회사에서 5분 거리니까 자고 와. 너 지금 얼굴이 말이 아니다. 그렇게 있으면 사람들이 부담을 느껴. 밤샌다고 유세 부릴 거 아니면 가서 자고 와.”
그날부터 부장님의 집은 두 사람이 번갈아 들어가는 수면 장소가 되었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며칠씩 잠을 못 잔 상태에서는 몸을 눕히는 것만으로도 숙면에 빠질 수 있었기에 점점 편안한 장소가 되어갔다. 가끔은 부장님 집에 혼자 자러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라면이나 과자를 사두기도 했다. 숙박비 대신이었다. 그렇게 세 번째 게임까지 완성했다. 출시 당일, 몇 개월 만에 집에 돌아갔다. 그동안 달렸으니 조금은 쉬고 싶었다. 오랜만에 보는 동생과 어머니를 데리고 고깃집을 다녀왔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한번 출근하면 짧게는 2~3일, 길게는 2~3개월씩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야근은 필수, 철야는 선택인 시절이었다.
시끄러운 휴대폰 벨소리에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부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어디야?”
“네? 집이지요. 무슨 일 있나요?”
“집 주소 불러!”
“네? 제가 지금 회사로 갈게요.”
“지금 시각에 택시 잡기도 힘들어. 내가 갈 테니까 불러!”
얼떨결에 집 주소를 부르고 옷을 입고 나갔다. 부장님의 차를 타고 다시 회사로 되돌아갔다.
“무슨 일인가요?”
“버그야. 네 게임. 오늘 출시된 거 받아서 하고 있는데 버그가 보였어.”
부장님이 발견한 버그는 미미한 부분이었다. UI 출력 부분이라서 게임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고, 다음날 수정해도 충분한 내용이었다. 게다가 오래된 구형 휴대폰에서만 발생하는 오류였다. 이 기기까지 테스트를 해보신다고?
“이거 한 줄만 바꾸면 되는 거라서 별 문제없는데요. 게다가 B타입에서만 발생하는 문제예요. KT검수에서도 문제없다고 넘어간 부분이었어요.”
“야, 이거 누가 기획했지?”
“저요.”
“누가 코딩했지?”
“저요.”
“테스트는 누가 했지?”
“저요.”
“네가 다 한 건데, 별 문제 있는지 없는지를 내가 어떻게 알아? 내부를 내가 하나하나 뜯어볼 수는 없잖아? 그리고 넌 네가 출시한 게임을 테스트도 안 해보냐? 출시 전에 했더라도 출시하고 나면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넌 그렇게 책임감이 없는 놈이 게임을 만든다고 할 수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부장님의 화내는 모습. 나의 책임감 부족을 진심으로 일깨워주시는 것 같아 감사했다.
2년이 넘게 함께 일하면서 처음 본모습이었다. 항상 온화하던 김 부장님이 화를 내고 계셨다. 일할 때는 물론 같이 먹고 자고 출장을 갈 때도 웃는 모습이셨던 분이 새벽에 잠자는 나를 깨워 회사까지 끌고 와서는 목소리를 높이고 계셨다. 얼굴은 분노로 빨갛게 변해있었다.
첫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나를 끊임없이 성장시켜 준 분은 기획 팀장님이 아닌 프로그래머인 김 부장님이셨다. 프로그램부터, UI, 밸런스, 네트워크, 리소스 관리까지. 그 짧은 순간에 부장님에게 배운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의 부장님은 어쩌면 지금까지의 것 중에서 가장 큰 가르침을 주고 계신 게 아닐까? 나의 작업물, 나의 게임에 대한 책임감. 어쩌면 나는 언젠가부터 게임을 ‘일’로 보게 된 것은 아닐까?
그날부터 한동안 집에 가지 않았다. 모든 코드를 재검토했고 모든 루트로 테스트를 다시 진행했다. 이번에는 KT 말고 다른 버전도 내가 직접 컨버젼 해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한 달 뒤, 나의 세 번째 게임은 KT에서 2위를 기록했다. 큰 성공이었다.
처음으로 성공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나의 세번째 게임.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게임 퍼블리싱 사업부의 본부장이 된 나는 소규모 업체들을 돌아다니며 투자할만한 게임을 찾고 있었다. 그날 돌아본 회사 네 군데는 모두 허탕이었다. 마지막 회사는 게임은 좋았지만, 대표를 신뢰하기 힘든 경우였다. 허탈한 마음으로 회사로 돌아갈지, 바로 퇴근할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어라? 너 마이즈 아니냐?”
야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남성이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김 부장 님이었다.
“부장님? 와 너무 오랜만이에요! 회사 OB 모임도 안 나오시고, 어떻게 지내셨어요?”
“하하. 나 이제 부장 아니야. 대표다. 작은 회사지만.”
“회사 차리셨어요? 시간 괜찮으시면 저녁이라도 하실래요?”
“오늘은 나 미팅 있어. 연락처 줘라. 다음에 밥 먹자.”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너무 궁금해요. 반가워요. 역시 게임을 계속 만들고 계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