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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즈 8시간전

추억의 마리오 하우스

예쁜 점장 누나가 있던 게임 샵

올림픽 상가 중앙에 큰 광장이 있다. 아이들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탔고 한 켠에 당시 유행하던 미니카 레이싱 장도 있었다. 그 맞은편으로 간판에 마리오가 그려져 있는 가게가 있었다. 당시를 생각하면 표절이나 무단 도용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놀랍게도 공식 라이센스를 받은 마리오였다. 왠지 가게 안에는 배불뚝이 콧수염 아저씨가 멜빵 지를 입고 버섯을 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피치 공주 같은 예쁜 누나가 어서 오세요~하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이곳이 ‘마리오 하우스’였다.

처음 방문했을 때, 누나에게 말을 걸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쭈뼛거리며 삼촌 이름을 대자 ‘아~ 니가 사장님 조카구나? 얘기 들었어.’라며 웃어주었다. 마리오 하우스는 둘째 외삼촌의 가게였다. 올림픽 아파트로 이사오기 전, 1년 동안 함께 살았기에 나름 가까운 분이셨다. 삼촌은 닌텐도의 혁신적인 게임기, 패미콤을 정식 수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계셨다. 윗분(?)들을 설득하기 위해 삼촌은 우리를 활용했다. 나쁘게 보면 아이들을 데리고 실험을 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저 감사했다. 패미콤 게임기와 함께 게임 팩 두 박스를 주신 것이다. 그리고 마음껏 게임을 할 수 있게 지원해 주셨다. 1년이 지나도 건강이나 정신(?)에 아무 문제없음을 인증(??) 받고 나서야 정식 수입이 통과된 것이었다. 덕분에 어린 나는 수많은 게임을 공짜로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삼촌의 노력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이미 불법으로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당한 루트를 고집하신 삼촌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 영웅처럼 비춰졌다.

“저 게임 잘해요. 마리오 하우스에서 일하고 싶어요.”


어린 시절의 우리 집은 부유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교육 방식은 확고했다. 공짜로 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 덕분에 우리 집은 용돈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다른 어른이 돈을 주시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정중히 돌려드리라고 시키셨다. 그럼 내가 갖고 싶은 것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집에서 아버지의 구두를 닦거나 흰머리를 뽑고 방 청소를 하면서 백 원 이백 원씩 모아야 했다. 물론 학교 준비물 등은 따로 사주셨기 때문에 내가 번 돈은 오로지 나를 위해 쓸 수 있었다. 덕분에 어릴 때부터 돈을 번다는 것에 익숙했다. 물론, 동시에 도둑질도 익숙해졌지만.

이런 제안을 기특하게 여기셨는지 부모님 허락 하에 마리오 하우스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였다. 하루를 일하면 3천 원을 받았다. 그럼 시급이 얼마지? 하고 계산하려는 분이 계실 테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애초에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도 않았고 솔직히 말해서 초등학생이 무슨 일을 하겠는가. 그냥 가게에 앉아서 게임만 했을 뿐이다. 종종 게임을 깰 수 없다며 불량품이 아니냐고 손님이 찾아오는 일이 있었다. (게임이 어렵다고 불량품이라니… 이 또한 창의적인 발상 아닌가!) 이런 손님을 응대해서 막힌 부분을 공략해 주는 것이 그나마 일이었다. 손님이 없을 때면 진열대에 게임을 이렇게 저렇게 바꿔가며 진열하기도 했다. 슈팅 게임끼리 배치해 보고, 이번에는 일본어 모르면 하기 힘든 게임끼리도 배치해 보고, 쉬운 게임끼리 배치해 보고… 덕분에 게임의 장르와 메커니즘, 소재 등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을 해도 누나는 항상 웃으며 귀여워해주었다. 사장님 조카여서 그랬던 것일까? 정말 귀여웠던 걸까? 어쩌면 귀찮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새로 들어온 게임이 있으면 혹시 문제없는지 불량품 아닌지 저쪽 가서 해보라며 자연스레 게임을 권하기도 했으니까.

식사 시간에는 점장 누나와 단 둘이 짜장면을 시켜 먹기도 했다. 가끔 동생이 놀러 오면 근무 중이니 끝나고 집에서 보자며 엄중히 타이르기도 했다. 게임 가게에서 일한다고 하니 믿지 못한 친구들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얼른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일하는 중에 딴짓하면 혼날지도 모른다며 직장인 흉내를 냈다. 물론, 누나가 나를 혼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 장소에서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신작 게임 중에서 ‘나는 드라큐라 군’이 들어왔다. 악마성 외전이라고 했다. 악마성 시리즈는 (어렵다는 이유로) 불량품 문의가 많이 들어오는 게임이었다. 미리 공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편은 너무 쉬웠다. 처음 팩을 꽂고 시작하자마자 엔딩까지 클리어. 정신을 차려보니 누나와 아이들 여럿이 구경하고 있었다. 너 진짜 게임 잘하는구나? 누나도 직접 해보면 한 번에 깰 거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너무 쉬운 게임이었으니까. 하지만 조용히 칭찬을 즐겼다.

몇 달 뒤에는 고객에게 게임 추천도 해주었다. 아이와 함께 오는 부모님들 입장에서는 같은 또래 초등학생이기에 신뢰가 갔던 것이 아닐까?  한 번은 손님에게 '미스터 마리오'가 재미있다며 강력 추천했는데, 바로 눈앞에 있는 게임 팩을 찾지 못했다. 무슨 어른이 영어도 못 읽냐며 한심해하면서 게임 팩을 꺼내주었는데, 'Dr. Mario'라고 쓰여 있었다. 누나도 손님도 한참 웃었다. 왜 웃는지 나중에 알게 되면서 부끄러워졌다. 덕분에 그 게임의 제목은 결코 잊지 못한다. '미스터'가 아닌 '닥터' 마리오. 간혹 어른이 혼자 오셔서 아이에게 선물로 게임을 사주고 싶다며 추천해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골라준 게임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부모님이 게임을 사주는데, 어떤 게임이라도 기뻐하지 않을 아이가 있겠는가? 게임의 종류나 내용보다 부모님의 마음이 기쁘지 않았을까? 나의 선택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 같다.

돌이켜보면 마리오 하우스에서의 일은 진짜 아르바이트는 아니었다. 삼촌과 점장 누나가 그저 귀여워해준 것일 테니까. 삼촌 입장에서는 웬만해서는 주기 힘든 조카의 용돈을 알바비라는 명목으로 주려고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처음으로 출퇴근이라는 것을 하는 정식 일자리였다. 첫 아르바이트가 게임 매장이었다는 점은 나의 삶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유치원 때 정한 게임이라는 꿈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지 눈앞에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나의 꿈이 더욱 공고해지지 않았을까?

요즘도 올림픽 상가를 지나게 되면 괜히 마리오 하우스가 있던 자리를 찾아가 본다. 왠지 그 자리에 가면 여전히 마리오가 그려진 간판과 피치 공주를 닮은 예쁜 누나가 반겨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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