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종을 누르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는 주머니에서 ‘철이’를 꺼냈다. TV 광고를 보며 갖고 싶어 하던 플레이 모빌. 드디어 선물 받게 되었고, 붉은색을 띤 그 아이에게 ‘철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어제 늦은 시각에 받은 탓에 집 구경을 다 시켜주지 못했다. 기왕이면 대문부터 순서대로 소개하고 싶어서 하루를 기다린 것이다. 집 앞에는 놀이터가 있어 등뒤로 아이들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같이 놀고 싶었지만 오늘은 철이에게 집을 소개해줘야 했다.
내 친구 철이는 붉은색 플레이 모빌이었다.
문이 열리자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에는 화단과 일본식 연못이 있었다. 그 사이로 돌 길이 있었는데, 쭉 따라가면 주방으로 돌아서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철이에게 연못을 보여주고 왼쪽 정원으로 뛰어갔다. 잔디밭에 개 집이 있고 우리 강아지 투투가 묶여 있었다. 정원 벽 쪽으로는 높은 나무들이 있었다. 딱 한번 사다리를 놓고 나무 위에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너무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정원 뒤로 들어가면 집 뒤편으로 길이 있었고 2층 테라스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화단과 나무 관리가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누가 했던 걸까?
정원
철이에게 정원 안내를 끝내고 계단을 올라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현관을 열면 눈앞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고풍스러운 계단이 보인다. 계단 안쪽으로 욕실과 화장실이 있었는데, 큰 욕조가 있어서 동생과 자주 물놀이를 했다. 현관을 지나자마자 왼쪽에 우리 방이 있었다. 동생과 내가 함께 쓰는 방.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상당히 큰 방이었구나 싶다. 스탠드와 책꽂이까지 일체형인 큰 책상이 두 개 있었고, 피아노도 있었다. 벽으로는 5개의 책장. 서너 개의 우리 옷장과 서랍장까지. 3개의 침대가 놓여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이 많이 남아서 방 안에 어린이용 종이 집을 세워 그 안에서 놀았을 정도니까.
“우리는 주로 이 방에 있을 거야. 오늘은 다른데도 둘러보자!”
현관과 우리 방
‘철이’를 손에 들고 거실로 뛰쳐나갔다. 방 안에 있던 동생도 재미있어 보이는지 따라왔다. 거실에는 안방과 손님방, 온실로 가는 문이 있었고 주방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철이에게 안방은 보여주지 않기로 했다. 내가 잘 들어가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1층에는 거실과 안방, 손님방에 각각 TV와 비디오가 있었는데 우리끼리 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손님방에서 봤다. 서부극을 많이 봤었지. 빵빵! 가끔 손님이 올 때면 TV를 빼앗기는 것 같아 속상했다. 온실은 말 그대로 여러 식물을 키우는 곳이었다. 철이를 잠시 화분 잎사귀에 얹어주었다. 비가 올 때 자연을 느끼고 싶으면 오는 곳이야. 이상한 설명이었다. 온실 안 쪽에는 의자와 티 테이블이 있었는데,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장소이기도 하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처음으로 실감하고 눈물이 끊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만약 살아계셨다면 그분도 마왕이 되진 않으셨을 텐데. 어머니도 아버지도 자주 그 이야기를 하셨다.
온실
주방은 문이 없어 천으로 된 가림막을 쳐두었다. 그래서인지 들어갈 때마다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주방에 가자마자 철이에게 소개한 곳은 과자통이었다. 주방에서 동생과 나, 둘에게 배정받은(?) 공간이었다. 먹고 싶은 거 있냐고 철이에게 묻고는 근육맨 과자를 꺼냈다. 봉투를 뜯으려는데 가정부 누나가 밥 먹고 나중에 먹으라기에 내려두었다. 주방 가운데에는 큰 식탁이 있었다. 명절 때면 열 명이 넘는 어른이 둘러앉아 술과 식사를 했다. 나는 이 식탁을 좋아하지 않았다. 멀리 있는 반찬은 손이 닿지 않았으니까. 2대의 냉장고가 있었고 예닐곱 개의 화구가 있었다. 평소에는 가정부 누나 혼자서 사용하는 공간이었지만, 파티가 열리는 날에는 여러 아줌마가 동시에 요리를 했다. 그럴 때면 아줌마들이 서로 와서 맛보라며 나를 유혹했다. 마치 마트 시식 코너처럼.
식당
주방에는 집 뒤편으로 나가는 문과 정원 우측으로 나가는 문,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철이를 안고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갔다. 난간이 없어서 위험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어두워서 무서웠다. 이 아래 살고 있는 사람도 있어. 궁금하지? 내려오자마자 불을 켰다. 잔뜩 쌓여있는 박스들 가운데 책상과 캐비닛이 놓여있었다. 구석에는 방이 하나 있었지만 역시 잠겨 있었다. 기사 아저씨가 생활하는 곳이었다. 가정부 누나는 우리와 오랜 시간을 함께 있지만, 기사 아저씨는 자주 바뀌었다. 그래서 매번 어색하고 불편했다. 지하실 안 쪽으로 더 들어가면 차고였다. 3대의 차가 있었는데, 아버지 차 두 대와 어머니 차 한 대였다. 집이 언덕에 걸쳐 있다 보니 지하실에서 차고 문을 열면 도로로 연결되었다. 어린 마음에 차를 타고 집에서 출발하는 순간이 좋았다. 마치 그랜다이져가 폭포를 뚫고 출동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하실. 사실은 2개 층이었다.
2층에는 다섯 개의 방이 있었다. 일본 할아버지 방. 일본에서 유년기를 보내신 외할아버지의 의동생이 가끔 묵으시는 곳이었다. 신기한 책이 많았는데, 무엇보다 신기한 점은 일본 책 보다 한국 책이 많다는 점이었다. 우리를 참 예뻐해 주셨지. 다만 한번 집을 비우면 몇 달씩 돌아오지 않으셨다. 그 옆에는 아버지의 서재가 있었는데, 사용하시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왜 만드신 걸까? 2층 안쪽에는 가정부 누나의 방이 있었다. 종종 같이 자기도 했고 영화나 TV를 함께 보기도 했다. 그 외에 이벤트 룸이 하나 있었는데, 크리스마스 때마다 나무를 사 와서 트리 장식을 하는 방이었다.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원도 있고, 넓은 거실도 있는데, 심지어 2층에는 거실도 테라스도 있는데, 왜 방 안에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을까? 물론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도 항상 이 방에 놓여 있었다. 남은 하나의 방은 빈 방이었는데, 나중에 대학생 형 두 명에게 월세를 받고 임대해 주었다. 역시 나에게는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2층
2층 테라스는 굉장히 넓었다. 그곳에 축구를 하기도 했으니까. 물론 초등학교 저학년인 어린아이 두 명이 미니 시합을 하는 정도이니 실제 축구장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테라스 구석에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 위에는 옥탑방이 하나 있었다. 당시에는 비워져 있었지만, 만약 이 집에 계속 살았다면 가장 갖고 싶은 방이 되지 않았을까? 구석에는 작은 화단이 있었다. 옥상에서 돗자리를 깔고 누워 아버지와 별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내 생애 어쩌면 유일한, 아버지와의 아름다운 추억이다.
옥상과 옥탑방
이 집에서의 가장 특별한 경험이라면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생일 파티였다. 학교 육성 회장이었던 어머니는 아이들을 ‘모두’ 초대하라고 하셨다. 우리 반 전부요? 우리 반은 40명인데요! 40개의 생일 선물을 받을 생각에 들떴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아니, 2학년 모두. 그날 하루 동안 주방에는 아줌마들이 가득 찼고 얼굴도 다 모르는 아이들이 정원부터 1층과 2층, 옥상까지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집주인인 나도 친구들이 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웃고 놀다가 저기 끌려가고 저기서도 웃고 놀다가 또 다른 곳으로 가고.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뒤, 안방에 쌓인 수많은 선물을 보며 행복했다. 선물을 모두 뜯고 확인하는데만 이틀이 걸렸다. 기대와 달리 중복된 선물이 많아서 조금 짜증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재수 없는 부잣집 도련님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짝이 되면서 나에게 고백한 여자 아이가 있었다. 수영이라는 아이였다. 2학년때까지 친구들 사이에서 공인 커플 같은 느낌이었는데, 어머니는 그 아이를 싫어했다. 오히려 소영이라는 다른 아이를 나와 엮으려고 하셨다. 이름도 한 글자 차이였다. 수영이는 공부를 못했지만 밝고 쾌활했다. 소영이는 나와 전교 1, 2등을 다투는 똑똑한 아이였는데 얌전하고 조용했다. 어느 날 수영이 집에 놀러 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아이의 집이 우리 기사 아저씨의 방 하나만 했기 때문이다. 그 좁은 방에서 엄마와 아빠, 수영이와 동생 넷이 살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어두운 지하였다. 수영이는 스스로 라면도 끓일 수 있었다. 나는 가정부 누나가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소영이의 집은 우리 집과 비슷한 크기였다. 어머니가 소영이를 더 예뻐하는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작은 말싸움 끝에 수영이가 말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 너네 집이 크고 돈이 많기 때문이야. 초등학교 3학년이 할 말인가 싶지만 그 말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어쩌면, 경제적 조건을 중시하는 여성에게 반감을 느끼는 나의 성향이 이때부터인 건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이 집도 사라졌다.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 잘못으로 우리 집을 ‘빼앗겼다’고 표현하셨다. 어머니에게도 특별하겠지만, 나와 동생에게도 이 집은 특별하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담긴 곳이니까. 그래서 몇 번이고 다짐했다. 언젠가 성공해서 반드시 이 집을 되찾겠다고. 중 고등학교 시절에도,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가끔 한 번씩 집을 보러 갔다. 집을 되찾는 것은 한동안 나의 삶의 큰 목표 중 하나였다.
메세나가 들어서기 직전. 무너진 집을 봤다
하지만, 그 집은 사라졌다. 집이 있던 장소인 합정역에 메세나 폴리스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집도 놀이터도 사라지며 그 당시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더 이상 어머니에게 했던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추억을 되찾을 방법도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집을 되찾을 만큼 큰 경제적 성공을 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었고, 무엇보다 덕분에 과거의 미련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 자리에 들어선 메세나폴리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억하고 싶다는 마음은 마음 한편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Gone Home이나 What Remains of Edith Finch 같은 게임을 할 때면 집을 3D로 구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VR이면 더 좋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끝까지 완성할 수는 없었다. 집이 큰 탓에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시간이 많이 남을 때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미련처럼 남았다.
gone home
PCC. 판교 크리에이터스 클럽. 경기도 콘텐츠 랩에서 진행하는 사업에 참여하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게임 개발 클럽을 만들기로 했다. 나도 클럽장이니 게임을 하나 만들기는 해야 할 텐데… 하필 이 시기에 논문에, 졸업 시험, 영상 촬영 일정까지 있어서 시간을 많이 할애하기 힘들었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RPG 쯔꾸르를 사용하기로 했고, 타일맵을 열었다. 어떤 걸 만들어야 할까? Modern type의 저택 타일을 보는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 그 집을 만들자. 창작자인 '나'를 위한 전시용 게임이다. 상업적일 필요도 없고 게이머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내 마음속에 쌓인 것을 털어내기 위해 게임을 만들자. 그렇게 나는 맨션 오브 서교를 제작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게임 제작자라는 사람이 저렇게 허접한 것을 내놓다니 무슨 생각이지?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 게임은 나를 위한 것이니까. 마음속에 쌓인 것을 내려놓기 위한 시도니까.
mansion of seogyo
과거를 돌이켜보며 매번 감사하게 된다. 충격을 안겨준 수영이 가족의 원룸도 종종 떠오른다. 이후의 나는 그보다 더 좁은 곳에서도 살게 되었고, 수백 개의 선물이 아닌 단 하나의 선물도 받지 못하는 생일을 수없이 보내왔다. 지금은 오히려 넓은 집보다 좁은 집을 선호하며 물질적인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아주 어릴 때 겪은 풍족함. 이후 성장하면서 겪은 결핍이 나의 시야를 넓혀준 것은 아닐까? 만약 그 집에 계속 살았더라면 어쩌면 감사할 줄 모르는, 내가 싫어하는 타입의 인간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남아 있던 서교동 집. 이제 미련과 집착은 떠나보내고 추억으로만, 성장을 위한 밑거름으로만 남겨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