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 넘는 회사 생활 중 단 한 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조퇴를 한 적이 있다. 팀장님에게 말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왕자님 어디 가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조차 못한 채 힘겹게 회사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 와중에 동료들에게 보여질 나의 이미지를 걱정했다. 자기 말을 씹는다고 욕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누가 볼까 싶어 어떻게든 정상적으로 걸으려고 노력했다. 아픈 모습을 보이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렇게 을지로 지하상가로 들어갔고 계단 옆 구석에서 정신을 잃었다. 왜 이 상황이 올 때까지 일하고 있었을까? 나에게 있어 몸의 아픔은 버텨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쓰러지기 직전까지 일하다가 조퇴.결국 집까지 가지 못하고 전철역에서 기절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다. 당연히 여유로울 수는 없었고, 굶는 날이 더 많았다. 내가 먹지 않는 만큼 동생을 먹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병원은 사치였다. 비용 문제였다. 동생이나 어머니가 아프면 지체 없이 병원에 갔지만, 나는 가장이니까 참는 게 당연했다. 종종 눈앞이 뿌옇게 변하며 이명이 크게 들릴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길을 가다가도 급히 바닥에 앉거나 엎드렸다. 한 번은 동생과 목욕탕에 갔다가 이런 상태가 되어 넘어져서 돌로 된 바닥에 머리가 깨진 일이 있었다. 그 이후부터 무조건 몸을 낮추고 바닥에 엎드리게 된 것이다. 이 기이한 현상이 발생할 때면 특별한 초능력이 생기는 건 아닐까 싶어 두근두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나니 못 먹어서 생긴 빈혈이었다.
중학교 시절은 굶주림과 함께 빈혈, 감기, 천식, 두통, 치통이 항상 함께였다.
치과는 더했다. 충치가 생기기도 했고 싸우거나 맞아서 이가 흔들리기도 했다. 고통을 도저히 참지 못해 치과에 간 적이 있었는데, 대기 중에 팸플릿을 보고 뛰쳐나왔다. 나름 저렴하다고 쓰인 가격조차 나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렇게 오래 방치하며 엉망이 된 치아는 30대가 된 이후부터 하나씩 치료하고 임플란트를 해야 했다. 여자 친구가 종종 말한다. ‘오빠는 다른 건 괜찮은데 치아가…’ 어쩔 수 없다. 그것도 나의 삶의 흔적인 것을.
따라서 이전 글 '블라인드 버킷 러브'에서 치위생사와 연결될 가능성은 제로였다.
야외 주차장에서 청소 일을 하다가 가볍게 차에 치인 일도 있었는데, 혹시 잘릴까 봐 발목을 절뚝거리며 일했고, 머리가 깨지거나 날카로운 공구에 손을 베이더라도 무조건 참았다. 휴지를 움켜쥔 채 일하다 보면 손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져 당황한 적도 많았다. 다친 것을 들켜 일 자리를 잃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단 한 번도 파상풍에 걸리지 않은 것은 천운이 아니었을까. 엑스맨의 울버린은 자가 치유 능력이 보통 인간보다 극단적으로 강한 돌연변이이다. 이른바 힐링 팩터다. 좋아하는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그의 프로필에 적힌 말에 이상한 믿음을 가졌다. 보통 인간보다 강하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자가 치유 능력이 있다는 말일 테니까. 버티면 낫겠지.
울버린의 능력은 힐링 팩터.엄청난 재생과 회복 능력이다.
20대 초반에는 노가다를 자주 했었는데, 태양이 쨍쨍한 여름에 일하다가 몇 번인가 쓰러진 일이 있었다. 열사병 같은 것 아니었을까? 이를 본 아저씨들이 요령껏 하라면서 숨어서 잘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벽에 철판을 기대어 놓은 조악한 장소였지만, 어지러울 때면 그 안에 숨어서 잠시 숨을 돌렸다. 아무튼, 그 이후로 강한 빛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당시에는 중2병답게 내 안에 있는 어둠의 힘이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쓰러진 이후에도 여전히 병원은 가지 않았다.
노가다 중 열사병으로 쓰러진 날 이후, 빛을 싫어하게 되었다.언젠가 노가다 이야기도 써야지.
이처럼 참고 버티는 성향이었지만 선천성 천식을 갖고 있었다. 부유했던 어린 시절에는 병원을 자주 다녔고 의사 선생님이 집에 와서 정기 검진도 해주셨다. 천식 탓에 남보다 호흡이 얕아서 금방 피로해지는 체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텨낸 것은 결국 근성이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울버린 같은 캐릭터에 대입하며 살다 보니 겉보기와 달리 다소 마초적인 가치관도 생겨났고, 그 탓에 병원에 가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게 된 것 같다. 가끔 연인이나 가족이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서 병원에 가라고 권유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비참한 마음이 들고 자괴감에 빠진다.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나약하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다.
아플 때는 근성으로!
그날도 그랬다. 회사에서 조퇴한 이후, 귀가 중 을지로 지하상가에서 정신을 잃었다. 몇 시간 뒤 깨어나서는 가까운 모텔을 잡았다. 그리고 마치 야근을 한 것처럼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갔다. 가족들은 지켜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연인도 지켜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쓸모 없어지고 버려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항상 강해야만 한다. 이 것도 강박이겠지.
겉보기와 달리(?) 마초스러운 강박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병원을 전혀 안 간 것은 아니다. 가장 여러 번 문제가 생긴 곳은 어깨였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을 하다 보니 손가락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팔꿈치로 신경을 타고 올라온 끝에 오른쪽 어깨가 나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병원에 가지 않았고, 마우스를 왼손잡이 모드로 교체한 채 묵묵히 일을 이어갔다. 도저히 참기 힘든 상황이 되어서야 병원에 간 탓에 그 이후로 3-4년마다 어깨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다른 곳은 치욕스러운데, 어깨는 왜 괜찮을까? ‘내 팔에 흑염룡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중2병스러운 문구로 합리화(?)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강박조차 덮어쓰는 중2병이라니. 이것이 오타쿠의 진정한 힘이 아닐까?
오타쿠의 중2병은 강박보다 강하다!
가장 큰 고통을 겪은 경험은 코로나였다. 방 안에 격리되어 힘든 상황에서 떠올린 것은 고전 게임들이었다. 대부분의 게임은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체력이 완전히 회복된다. 내 삶은 게임이고, 코로나 스테이지는 지금까지 클리어한 레벨보다 어려울 뿐이다.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클리어한다면 체력은 회복될 것이다. 힘든 시기가 오면 종종 중얼거린다. ‘나는 록맨 1을 원코인으로 클리어한 사람이야.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껌이지.’
자주 언급되는 록맨.자세한 이야기는 '록맨과 공략왕' 편에서...
아프면 참는다. 인간의 자가 치유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테이지를 넘어가면 체력이 다시 회복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아픔과 고통은 다른 게임이나 만화의 주인공이 겪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이를 견뎌내면 다음에는 비슷한 수준의 아픔은 별거 아니게 느껴질 테니까. 그렇게 게이머이자 오타쿠로써 버텨왔다. 좋은 모습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나의 성향이다.
여전히 병원은 불편하며 자존감이 떨어지기도 한다.나의 약한 모습을 인정해야 하는 곳이니까.
병원은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하다. 어릴 때부터 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종종 병원에 갈 때면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아마 평생 이러지 않을까? 쓸데없는 강박이고, 재수 없는 마초 감성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이게 나인걸. 받아들여야지. 그래서 건강은 괜찮냐고? 매번 건강검진 할 때마다 같이 일하는 개발팀 직원 중 최고 점수가 나오기는 하더라. 20대 직원을 포함해서도 그렇다. 또래 개발자들 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큼 건강하기도 하다. 적당한 운동을 꾸준히 해온 덕분이 아닐까? 나이가 들다 보면 언젠가는 병원 신세를 지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과연 그 시기가 왔을 때 나의 마음이 버텨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