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원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리조트로 가는 워크숍. 누가 누구와 방을 쓸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다들 들뜬 분위기였다. 그 안에서 혼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숨기랴! 사실 나는 스키 점프 금메달을 딴 이력이 있었다. 동료들 앞에서 멋진 스키 실력을 뽐낼 생각에 살짝 들떴다. 후훗. 나의 의외의 모습에 다들 놀라겠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눈 속을 헤치는 모습을 상상했다. 물론 아주 작은 불안 요소가 있었다. 스키 점프 금메달은 초등학교도 아닌 유치원 때 유아부에서 받았다는 점이다. 그 이후로 30년 가까이 스키장에 가본 적이 없긴 했지만… 뭐, 괜찮겠지? 친한 동료들과 같이 방을 쓰기로 약속했고 워크숍 날만 기다렸다.
상상속의 나는 멋진 스키 선수였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직원 중 임신부가 있었던 것이다. 조심해야 하는 몸으로 스키를 탈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워크숍까지 가서 혼자 덩그러니 방을 보는 것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 논의 끝에 워터 파크를 선택했다. 우리가 가려는 리조트에는 스키장과 함께 온수가 나오는 워터 파크가 있었다. 따듯한 온수 풀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은 임신부에도 좋을 것 같았다. 다만,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제비 뽑기를 하기로 했다. 두 사람을 뽑자. 스키는 탈 수 없겠지만 온수풀과 워터파크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50명 가까운 인원 중에 2명을 뽑는 것인데, 설마 내가 걸리진 않겠지? 누가 그러더라. 나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고.
마치 카이지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워크숍 당일. 나는 워터 파크 탈의실에서 수영복을 갈아입고 있었다. 모처럼 멋진 모습을 뽐낼 기회였는데, 신은 나에게 그보다 고귀한 일을 주셨다... 고 생각했다. 크윽! 제비 뽑기에서 당첨이 나온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몸매였다. 요즘 광고를 보면 수영장에 가기 위해 남자들이 근육을 키우던데… 앉아서 일만 하던 앙상한 몸으로 가면 다들 이상하게 보는 것 아닐까? 혐오스러워할까? 어쩌면 오히려 유니크? 아니, 그냥 공기처럼 보고 넘어가려나. 긴 머리 탓에 이목이 모이긴 할 텐데… 울퉁불퉁한 몸이 아닌 탓에 수치스러울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수영복을 갈아입고 나오는 길에 그 불안은 사라졌다. 천만다행으로 이곳은 수영복 위에 구명조끼를 입고 입장하는 곳이었다.
“왕자님~ 여기예요~”
수영복 위에 구명조끼를 입고 나와보니 두 여성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분은 임신부이셨고, 또 다른 한 분은 사내 커플이셨다. 그분의 남자 친구 역시 나와 친했는데, 우리 팀에서 단 둘 뿐인 장발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둘 다 긴 머리인데, 왜 난 왕자님이고 그 친구는 록커였던 걸까? 회식 때 노래방에서 하필이면 록이 아닌 힙합을 불렀기 때문에 멋진 별명을 놓쳤던 걸까? 어쩐지 왕자님이라는 별명은 놀리는 이미지라서 그 친구의 별명이 부러웠다. 여하튼 두 분도 모두 수영복 위에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 여성 동료들의 수영복 차림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괜히 민망하고 시선을 두기 곤란할 것 같았거든.
언제 여성 두 분과 함께 워터 파크를 와보겠는가.비록 한 분은 임신부고 한 분은 친구의 여친이었지만...
들어서는 순간 거대한 워터 어트렉션들이 우리를 압도했다. 왠지 분위기만 보면 끼얏호~하면서 달려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임신부와 함께 아닌가. 다이내믹한 장소보다는 조용한 온천 풀 쪽으로 가서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었다. 저 밖으로 스키장이 보였고 사람들의 외침이 들렸다. 기분은 좋았지만 심심했다. 두 분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오타쿠인 나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먼 내용 들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임신부 동료가 먼저 제안했다.
“왕자님, 저 때문에 잘 못 노시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미끄럼이라도 타실래요?”
몇 번인가 괜찮다고 고사했지만, 결국 딱 한 번만 타기로 했다. 다른 여성분과 함께 거대 미끄럼틀 위로 올라갔다. 커다란 튜브에 들어가서 손잡이를 잡고 매달려 있는데 두근두근했다. 잠시 후 우리가 붙잡은 튜브는 빙글빙글 돌며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놀이 공원과는 또 다른 쾌감이 있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생각보다 긴 미끄럼 끝에 풀에 풍덩 빠지는 순간, 문제가 생겼다.
“괜찮으세요? 여기 기대세요.”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고 말았다. 임신부를 돕기 위해서 워터파크로 왔는데, 오히려 내가 그녀들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다리에 쥐가 나며 허리도 삐끗한 것이다.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기에 두 여성 분이 내 양팔을 어깨에 둘러메고 걸어야 했다. 결국 남은 시간은 워터 파크 내부에 있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보내야만 했다. 역시 왕자님이라서 시녀들의 보좌를 받으셔야 하는 것 같다며 동료가 너스레를 떨었다. 민망했을 나를 위해 한 농담이겠지만, 더욱 수치심이 커졌다. 괜찮으니 두 분이서 온천 풀이라도 다녀오라고 했지만,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탓에 가지 못하는 모습에 한없이 미안할 뿐이었다. 결국 의무실에 다녀오겠다고 거짓말을 하고서야 두 분을 온천풀로 보냈다. 그 길로 나는 먼저 워터 파크를 빠져나와 숙소에 가서 다리 마사지를 했다.
두 여성 분에게 오히려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저녁 시간에 스키장에서 돌아온 동료들이 낮에 고생했다며 야간 스키라도 타자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마음이 아니었다. 너무 방에만 있으면 이상하게 볼까 싶어 리조트에 있는 오락실에 가서 게임을 하며 기분을 삭였다. 그날 밤 술자리도 슬그머니 빠졌다. 동료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숙소에서 조용히 휴대용 게임기를 들고 밤을 보냈다. 그날따라 포켓몬마저 참 안 잡히더라.
리조트에서 나와 밤을 보내준 포켓몬스터DP 펄기아
워크숍에서 돌아온 다음 날, 곧바로 헬스장을 등록했다. 오전 6시 30분. 출근 전에 한 시간 운동을 하고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쥐가 나고 허리가 삐끗한 이유는 움직이지 않고 오랫동안 앉아서 일만 했기 때문임이 명확했다. 다시는 그런 수치스럽고 비참한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출근 전에 헬스장에서 30분간 러닝머신을 뛰며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보고, 가벼운 근력 운동을 했다. 덕분에 오타쿠로서 더 많은 작품을 알게 되는 효과도 더해졌다.
출근전 런닝머신은 나의 덕력을 높이는 데에도 일조했다.
이때 시작한 운동은 10년이 지난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지금은 헬스장에 가지는 않지만, 계단이나 홈 트레이닝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운동을 유지한다. 이 날의 수치심은 나를 건강하게 만드는 가장 큰 동기 부여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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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워터파크에 함께 간 두 분이다. 그분들은 끝까지 부끄러운 그날의 일을 비밀로 간직해 주셨다. 내가 아는 한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