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복지와 문화 체험
내가 소속된 개발 본부는 N사 내부에서도 평균 연령이 가장 높았다. 그만큼 베테랑이 모인 곳이라는 생각에 든든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분들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본부장님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임 중 하나를 개발한 분이셨다. 그렇기에 회사 안에서의 입지도 확실했고 개발진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본부장님은 격식 없이 대하는 느낌이었지만 다들 그분 앞에만 서면 긴장했다. 왜 그러는지 이해하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매년 체육 대회를 했는데, 대기업답게 대형 운동장을 빌려서 진행되었다. 여러 본부와 계열사까지 모이니 인원이 어마어마했다. 인사팀 동기에게 물어보니 2000명은 넘고 3000명은 안될 거라고 했다. (10여 년이 지난 현재는 그 몇 배로 성장했다.) 소속감과 자부심이 생겼다. 체육 대회는 당시 유행하던 콘셉트의 "출발! 드림팀!"처럼 어트렉션을 통과하는 종목도 있었고, 양궁 같은 본격적인 종목도 있었다. 무엇보다 특이했던 점은 게임 대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종목으로 철권이 지정되었는데 개인전이 아니라 각 본부마다 5명씩 나가서 진행하는 팀 전이었다. 당연히 나도 출전하게 되었다. 어릴 때 다니던 게임 대회와는 전혀 다른 재미가 느껴졌다. 거대한 야외 전광판으로 게임을 할 수 있다니 완전 로망이었다. 왕년의 격투 게이머로써 핸디캡(?)을 적용한답시고 많이 해보지 않은 니나 윌리엄즈를 선택했다. 당연히 성적은 좋지 않았다.
연말 파티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강남에 있는 클럽을 통째로 대관한 것이다. 유명한 연예인 DJ도 부르고 시끌벅적하게 진행했지만, 우리 본부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나이 탓이라고? 그냥 성향 탓이라고 해주자. 친구인 조 군과 함께 구석에서 PSP로 몬스터 헌터를 하다가 우리끼리 나가서 따로 자리를 잡았다. 개발자 성향에 맞는 파티를 해야지! 라며 투덜대긴 했지만, 회사가 직원들을 위해 어떻게든 즐거운 자리를 마련해 주려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애사심이 생기는 것이겠지.
놀 때 노는 만큼 일하는 시간도 철저했다. 연수원 동기들의 말에 따르면 보안 팀에서 모두를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PC에 부적절한 단어가 입력되면 체크가 들어온다고도 했고, 자리를 비운 시간이 따로 인사팀에 전달된다고도 했다. 인터넷 검색 기록도 체크가 되니 가급적 회사 PC에서는 일만 하는 것이 평가에 도움이 된다는 조언도 들었다. 동기들 중에 데이터 분석팀과 법무팀, 인사팀이 있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개발실에서 나갈 때와 화장실에 들어갈 때 모두 사원증을 찍고 들어갔는데, 그럴 때마다 시간을 체크하며 초조해했다. 5분 안에는 돌아가야 해!
본부에서 가장 친했던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당연히 맹우 조 군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원화가였는데, 본부 최고의 오타쿠였다. 물론 내가 들어가기 전까지만 그랬다. 결국 내가 최고였으니까. 오타쿠는 세상을 구한다고 했지? 그 역시 내가 이 조직에 적응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연좌’라고 하자. 그에 대해 기억에 남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야근 중 다 같이 치킨을 시켜 먹기로 했다. 당시 치킨 프랜차이즈에서 주문 시 걸그룹의 멤버 포스터를 주는 행사 중이었다. 다 같이 야식을 먹은 뒤, 남자들끼리 치열한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각자 좋아하는 멤버 포스터를 가지려는데 서로 겹치는 상황이었다. 이 엉뚱한 대전에서 한 발 물러서 있던 것은 여직원들, 그리고 우리 오타쿠 그룹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여직원이 이런 말을 했다.
“차라리 현실에 없는 2차원 여자를 좋아하는 너네가 낫다. 저게 싸울 일이야?”
그냥 웃고 말았지만, 어쩐지 뜨끔했다. 아이돌 마스터 포스터를 준다고 했으면 우리도 저랬을지도?
우리 본부의 워크숍 장소는 제주도였다. 나에게는 특히 의미 있는 장소다. 외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대학 시절 경험한 도보 여행 때문이었다. 600km를 걸어 제주도에 도착했던 그 시기를 통해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날 이후 제주도는 거의 10년 만이었다. 그렇게 꿈꾸던 N사에서, 뛰어난 동료들과 함께, 맹우와 함께 특별한 장소에 갈 수 있다는 것에서 운명을 느꼈다. 또 그놈의 운명 타령... 제주를 돌아다니며 관광도 하고 공연도 봤다. 워크숍인 만큼 저녁 숙소에서 본부장님을 중심으로 간단한 업무 활동도 진행했다. 마지막 날에는 숙소 거실에 다 같이 둘러앉아 무서운 이야기를 했다. 대학 시절에 느껴보지 못했던 청춘의 낭만이 이런 걸까?
인사 평가는 혹독했다.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자료들이 있겠지만, 이 부분은 개인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여기에 본부장님의 평가가 더해졌다. 당시 이 회사의 신규 개발 조직은 본부장님이 구상한 게임을 구현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따라서 프로젝트에 필요한 사람을 선별하는 권한을 본부장님이 갖는 것은 당연했다. 가장 잔인한 것은 인사 평가 메일이었다. 내가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평가를 해야 하는 것.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방법 아니냐고? 그게 왜 잔인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잔인한 이유는 평가 대상이 랜덤으로 지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배정받은 사람들에게 순위를 매긴다. 우리 조직에 가장 필요한 사람부터 가장 덜 필요한 사람까지. 물론 각각의 사유도 적어야 한다. 애초에 회사 업무라는 것이 모든 사람과 연관되지는 않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의 순위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는 내가 평가받을 때에도 동일하다. 따라서 미리 본부 내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일을 어필해야만 했다. 조직의 입장에서는 좋은 방식일지도 모르겠지만, 구성원 입장에서 다소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00% 마음에 드는 회사가 있겠는가? 아쉬운 것은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다닌 회사들과 차원이 다른 복지를 경험하며 회사 생활을 즐겼다. 사내 카페가 있었고, 복지 카드와 포인트도 있었다. 라면과 음료, 과자도 무료였고 복지 포인트로 식사도 가능했기에 먹는 것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없었다. 학원비나 도서 구매 비용도 제공이 되었다. 회사 바로 앞에 선정릉이 있었기에 점심시간에는 사내 카페의 샌드 위치를 하나 사들고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오랜만에 인생책인 은하영웅전설을 재독 했다. 날씨가 좋을 때면 이런 게 직장인의 낭만이 아닐까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내 동호회도 지원이 되었는데, 2개 동호회에 가입했다. 첫 번째는 마작 동호회였다. 동호회장은 한국 마작 선수권 상위권에 랭크된 사람이었는데, 역시 오타쿠였다. 그는 아이돌 마스터에 완전히 빠져 휴가를 내고 일본에 콘서트를 보러 가는 수준의 진짜 오타쿠였다. 그와 함께 노래방을 드나들며 아이돌 마스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남자 둘이서. 몇 번은 ‘연좌’도 같이 갔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었나 보다. 남자들끼리 아이돌 마스터 군무라니. 내가 지켜보는 입장이라도 싫을 것 같긴 하다. 두 번째 동호회는 사내 오케스트라였다. 어릴 때 배웠던 바이올린을 오랜만에 다시 잡았다. 사내 행사를 목표로 연습을 진행했지만, 결국 공연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우리 개발실이 크런치 기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바쁜 회사 생활 중 동호회 활동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주 1회 정도, 동호회 활동이 권장되는 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을 챙겨주는 것도 회사에 감사한 부분이었다.
어버이날은 어머니가 우리 회사에 푹 빠지게 되는 계기였다. 회사에서 근처 멀티 플렉스 영화관을 빌렸다. 그날 하루 동안 직원과 직원의 가족들은 영화를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다.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는 회사의 높은 분이 스크린 앞에서 우리 직원들을 잘 키워준 부모님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했다. 그날 어머니와 영화를 세 편이나 감상했다. 한참이 지났기에 그날 본 영화는 기억하지 못하시지만, 상영 전의 인사말만큼은 여전히 특별하게 기억하고 계시다.
우리 개발 본부는 조용한 편이었다. 사원 연수에서 균형이 중요함을 깨달은 나는 입사 초기부터 연예인 노홍철을 흉내 냈다. 수다스럽게! 더 밝게! 태양처럼! 어느 날인가 친한 프로그래머 형님이 오늘만큼은 조용히 해야 한다며 주의를 주셨다. 어쩐지 그날따라 개발실 분위기가 무거웠다. 팀장님은 조만간 손님이 올 테니 구석에 있는 책상을 깨끗이 청소하라고 지시하셨다. 수습사원 시절부터 비어있던 책상이었다. 잠시 후, 손님이 도착했다. 아니 행렬이라고 해야 할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왜 오늘은 자중하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젊은 여성 분이 상복을 입고 가슴에 영정 사진을 들고 있었다. 천천히 개발 실로 들어오셨고 그 뒤를 따라 사람들이 줄지어 왔다. 본부장님이 고개를 숙이고 여성 분을 안내했다. 조금 전, 내가 치워둔 자리였다.
“여기 구나. 병원에서도 그렇게 오고 싶어 했던 곳이.”
우리 모두에게 또렷하게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마치 연극 대사를 듣는 것처럼 비현실 적이었다.
“내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당신 자리. 아직 남아 있어.”
여성 분은 그 자리에 앉으셔서 영정 사진을 책상에 올려 두셨다. 그리고 한참 동안 멍하니 빈 모니터를 바라보셨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우리 동료들도, 본부장님도, 줄지어 들어온 일행도 그저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일이 끝난 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열정적으로 일하던 동료였는데, 몸이 안 좋아져서 치료를 위해 장기 휴직 중이었다고 했다. 병원에서도 계속 회사 걱정을 하셨다고. 본부장님의 지시로 그분을 위해 자리를 계속 비워두고 있었다고 했다. 병이 나으면 돌아오실 수 있도록. 그분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회사나 팀에서 얼마나 그를 존중했는지,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하지만 서럽게 울던 아내 분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그분이 그리워한 회사. 아내 분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나였다면 결코 좋은 마음 만은 아닐 것 같았다.
다음 날. 우리는 책상 배치를 바꿨다.